잽이 두려워질 때.

by Oroxiweol

재미가 있는 순간이 있다면 그 반대의 감정이 드는 순간도 분명 온다.

근래 시합을 앞두고(시합이라고 하기에도 뭐 한... 승패 없는 대회인 ISTK를 앞두고) 자주 스파링을 하다 보니 맞닥뜨리는 건 나의 어마어마한 부족함과 두려움이었다. 같이 하던 사람들의 실력은 날로 느는 것 같고, 나는 제자리인 것 같은 느낌. 관장님과 코치님이 열심히 주문을 넣지만 이제 막 칼 잡는 법만 익힌 초보 요리사처럼 나는 아무것도 출력하지 못했다. 연습 때마다 하지 말라는 건 계속 나오고, 하라는 건 하나도 써먹지 못했다. 순간 잊어버렸다. 평소에 하던 잽을 날리는 손동작도, 발 바꿔서 킥을 날리는 것도. 눈앞에 사람을 마주하면 그대로 머리가 하얘졌다.


'이 사람이 어떻게 공격을 할 것인지, 내가 어떤 동작으로 먼저 시작하지? 아.. 생각을 하라고 했는데, 생각을 해서 공격을 하려고 하니 동작조차 하나도 기억이 안 나!!!'


연습하는 동안 계속 '생각, 생각, 생각'

일상에서는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들까지 끄집어내서 생각하는 사람인데, 운동을 할 때면 머리 나쁜 나를 마주하는 것 같아 자신감은 점점 바닥을 향했다. 이러다 재미있던 복싱까지 싫어지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설상가상. 몇 주 전, 함께 신나게 복싱을 다니던 친구는 운태기이자 복태기가 와서 잠시 쉬기로 했다. 나에게 친구의 몫은 생각보다 컸고, 친구와 함께 했던 운동 시간이 그리웠다. 티는 안 냈지만 어쩔 수 없이 텐션이 조금 내려갔다. 하지만, 이렇게 여기서 그만두기에는 아직 복싱을 많이 좋아하는 나였다. 원래 성장하려면 아픈 법이다. 그래, 성장통이라는 말이 괜히 나왔겠냐고.

지금껏 살면서 숱한 권태기를 만나왔다. 관계, 공부, 일. 나름의 극복 방법이 있는데,


하나, 부정적인 감정은 무시하고 정말 그냥 한다.

둘, 아예 쳐다도 안 보고 덮어둔다.(진심이라면 언제고 다시 의욕이 샘솟을 걸 알기에)

셋, 관련 분야의 영상을 보거나, 예를 들면 브이로그 같은 것들. 자극이 될 만한 것들을 찾아본다.


현재 나의 상황은 다행히도 싫어짐이 아닌 위축이었다. 자신감을 끌어올릴, 열정을 다시 불 지필 요소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때마침 운명처럼 알고리즘 녀석이 Tvn 무쇠소년단 2를 재생해 주었다. 본방 사수하는 프로그램은 아니고 간간이 올라오는 클립만 봤었는데, 어느 일요일 저녁. 화면 속 멋진 그녀들의 시합 영상을 보게 됐다. 순간 집 나갔던 도파민이 짐 싸들고 돌아왔다. 출전했던 4명 모두 잘했다고 생각하지만, 특히 설인아 선수와 금새록 선수가 인상 깊었다. 설인아 선수는 연예인이 아니라, 그냥 선수였다. 거침없는 잽과 훅. 모든 게 빈틈없어 보였다. 무엇보다 닮고 싶었던 건 그녀의 눈빛이었다. 상대의 눈과 공격을 피하지 않고 집중하며 경기를 이어나가는 그녀의 눈빛. 초점이 명확하고 목표를 향한 그 눈빛은 흐리멍덩하게 뜨고 있던 나의 눈을 다시금 뜨게 해 주었다.


'그래, 하려면 저렇게 해야지! 상대를 피하지 않고 똑바로 응시하고 나의 할 일을 해야지!'


금새록 선수는 힘이 강해 보이지는 않아도 피하지 않고 계속해서 공격을 이어나가는 모습이 멋있었다.

'이만하면 됐다.'가 아닌, 자신이 할 수 있는 정말 최선의 것을 하고 있는 그 모습이 보여서 더 뭉클하고 멋있었다. 게다가 온 힘을 다해 뻗는 공격이 모두 유효타였다. 시합은 비록 승과 패라는 결과로 마무리가 되지만 그런 결과 너머에는 수많은 노력과 땀방울이 있다. 남들은 알아주지 않는 땀과 노력일지라도, 패로 마무리되는 결과를 받게 되더라도 내가 흘린 땀과 노력, 고통이었던 무수한 시간들은 뼛속 깊이 각인되어 나를 더 성장시킬 것이다. 잠시 주춤하는 시간마저 내 안에 잘 쌓아두고 묵묵히 해나가면 커다란 퍼즐판을 완성시킬 중요한 작은 조각이 될 것이다. 무쇠소년단을 보고 나니 다시 재밌게 의욕을 가지고 복싱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다음날, 나는 가볍고 즐거운 발걸음으로 체육관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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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이해 못 할 수도 있는 나의 이 즐거움과 주춤.

그리고 고민의 시간들이 내가 살아가는 데에 있어 아주 중요하고 소중한 감정들일 것임을 안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