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장에 가보면 구석에 혹은 거울을 보고 홀로 섀도우 복싱을 하고 있는 이들을 왕왕 보게 된다.
그 모습은 멋있어 보이기도 하고 굉장히 복싱 고수처럼 보이기도 한다. 복싱에 '복'자도 모를 때는 그 모습을 그저 감탄하며 관망했고, 저런 동작은 대체 어디에 도움이 되길래 샌드백도 아니고, 글러브도 안 끼고 하는 걸까 의문이었다. 직접 글러브를 끼는 생활 체육인이 된 후 섀도우 복싱을 하게 되었을 때는...
"으악"
민망함 그 자체였다. 아무리 같은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체육관이지만, 거울을 마주하고 서서 어정쩡하게 멋도 없이 허공에 양팔과 두 발을 가르는 꼴이란(나의 웃긴 모습을 희화하고자 '꼴'이라고 표현하겠다.) 미디어에서나 보던, 체육관의 고수 복서들의 자태와는 분명 다른 나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섀도우는 늘 자체 생략이었다. 스파링 시작 전이나, 수업 전에 관장님께서 시간을 정해두고 섀도우 복싱을 시키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도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기 직전. 아무튼 나에게 섀도우 복싱은 기피 동작 1호였다. 관장님은 섀도우 복싱을 많이 해봐야 한다고, 중요하다고 하셨지만 나는 늘 냅다 샌드백 앞으로 달려갔다. 그. 런. 데. 어느 날 나의 마음속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생활 복서라면! 저 도움이 되는, 분명 이유가 있을 섀도우 복싱을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관장님, 섀도우 복싱은 왜 해야 하는 거죠? 대체 어디에 도움이 되는 거죠?!!!"
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졌고, 이에 관장님은 '오!'를 외치며 대답하셨다.
"섀도우 복싱은 그냥 동작 연습이 아니지. 내가 잽을 날렸을 때 상대가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를 예측하고 상상하는 훈련이야. 내가 잽을 날리면 상대는 안면 가드를 하겠지, 그럼 어느 공간이 비어있겠어? 왼쪽이나 오른쪽이 비어있겠지. 그때 빈 공간을 노려 훅을 날리는 거야. 또, 상대가 샌드백처럼 가만히 그 자리에 서있지 않지? 상대가 피하는 쪽을 상상하면서 그 방향으로 나도 움직여가며 공격과 가드, 피하는 연습을 해보는 거야."
"아, 근데 관장님 너무 민망해요..ㅠㅠ"
"나도 창피할 때가 있어. 섀도우 복싱의 포커스가 내 동작에 맞춰져 있어서 그런 거야. 너 스파링 할 때 어때?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모습을 생각하면서 해? 아니잖아. 상대랑 겨루고 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안 드는 거야. 섀도우 복싱도 같아. 포커스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동작이 아닌 상대의 동작에 대응하는 중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덜 창피하고 내 연습에 더 집중할 수가 있지."
진작 물어볼걸!!! 관장님이 우다다 뱉어내는 적확한 설명에 머리 위에 전구가 '띵'하고 떴다.
그런 이유라면 나의 실력 향상을 위해, 뻘쭘함을 밀어내고 연습할 수가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생각보다 상대의 동작을 상상하며 연습하는 건 쉽지 않았다. 그냥 기계처럼 아무 생각 없이 주먹을 날리고 있었던 그간의 나의 모습이 아쉬웠다. 복싱을 하고 있는데, 괜히 머리도 좋아지는 일석이조인 기분. 꿩 먹고 알 먹고. 도랑치고 가재잡고!
샌드백 치기만큼이나 중요한 기본기가 섀도우 복싱이구나 이제야 깨달았다.
덧붙이기 :)
이후에 아직 제대로 된 섀도우 복싱을 혼자 해보지 못했다. 이런... 역시 머리로는 알지만 실천은 어려운 것. 머리로는 알지만 실천은 어려운 수많은 것들이 떠올랐다. 쉽지 않지만 해내야 하는 것들, 창피함과 민망함을 무릅써야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갈 수 있는 것들. 결국은 나를 더 강하지게 만들어줄 것들. 섀도우 복싱도 하자고 마음먹은 난데, 다른 일 쯤이야...!
복싱 덕에 오늘도 한층 더 단단해진 나를 만나러 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