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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파, 오이, 당근, 깻잎, 대파를 총총 썰어 넣고 고추장, 간장, 고춧가루, 설탕, 식초, 참기름을 넣고 빨갛게 양념을 한다. 여기부터 벌써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면 당신은 골뱅이무침과 도토리묵무침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특히 매운 걸 좋아하는 우리 부부는 이런 양념을 할 때 꼭 청양고추를 두세 개씩 썰어 넣는 걸로 모자라 청양고춧가루를 팍팍 쳐야 직성이 풀린다. 잘 삶아진 소면에 참기름 한 바퀴 두르고 야무지게 비벼내면 구수한 막걸리 안주로 제격이다.
어렸을 때 처음 골뱅이 통조림을 보고 경악을 했던 적이 있다. 투명하고 끈적거리는 액체 속에 꽤 큰 사이즈의 달팽이인지 외계생명체인지 모를 것이 담겨 있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저으며 못 먹겠다고 발버둥 쳤다. 정말 맛있으니까 나만 믿고 한 번만 먹어보라는 친구의 애원에도 끝끝내 나는 먹지 못했다. 그 후 스무 살이 넘어서야 빨갛게 양념된 골뱅이 소면을 처음 호프집에서 대면하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비주얼에 이 맛이 나온다고?
역시 아는 만큼 보인다고 먹어본 게 많이 없던 어린 나이에는 비주얼만 보고 음식을 속단한 적이 많았다. 성인이 된 후에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이었는지 뼈저리게 느낀 적이 몇 번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예가 바로 골뱅이다. 골뱅이를 섭렵한 후로는 그 어떤 비주얼이라도 일단 한번 도전해 보자는 용기가 생겼다. 골뱅이 양념과 도토리묵 양념은 들어가는 재료가 비슷해 보이지만 각 재료의 비중이 미묘하게 다르다. 개인적으로 골뱅이 양념은 조금 빨갛고 매운 것이 좋고 도토리묵양념은 고추장 양념보다 간장베이스의 가벼운 양념이 더 좋다.
이 두 가지 요리는 미묘하게 다르지만 중요한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막걸리와 너무 찰떡궁합이라는 것이다. 일단 막걸리는 쌀로 만들기에 두세 잔만 먹어도 배가 쉽게 부르다. 그래서 항상 막걸리를 먹을 때는 안주를 가볍게 준비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술 취하면 4개 5개까지 안주를 꺼내는 나이기에 일단 취하기 전까지만이라도 노력이라는 걸 하는 걸로.
나는 도토리묵은 처음부터 비주얼과 맛까지 전부 좋아했다. 하지만 조금 더 좋아하게 된 계기는 엄마가 직접 국산 도토리묵 가루로 도토리묵을 만들어 주었을 때부터였다. 시판에 판매되는 도토리묵 말고 직접 열심히 가루를 풀어 저어가면서 굳혀서 만드는 도토리묵은 씹을수록 나오는 고소함의 깊이가 차원이 다르다. 이것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깊이의 차이를 쉽게 체감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 간도 하지 않은 도토리묵만 먹고도 진짜 맛있다는 말을 할 수 있었다. 그 후에 시판되는 도토리묵은 너무나 시시해졌다는 슬픈 사실.
보통 대표적인 막걸리 안주라고 하면 파전 같은 기름진 안주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 비 내리는 소리와 파전 익어가는 소리와 비슷하다고 하며 비 오는 날 막걸리와 파전을 주로 찾는다. 하지만 이런 전은 너무 맛있지만 한 장만 먹어도 배가 불러서 양껏 먹지 못하고 비가 와야만 그 분위기를 탓할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많이 배부르지 않고 비가 안 와도 찾을 수 있는 골뱅이 무침이나 도토리묵무침이 막걸리의 영혼의 단짝이라고 생각한다. 새콤 달콤하고 다양하게 소면을 넣어 먹거나 골뱅이나 도토리묵을 먹다가 야채를 다양하게 골라 먹을 수도 있다.
아 그런 의미에서 오늘 날씨가 좋으니까 골뱅이 무침에 막걸리 한잔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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