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위생사 1년 차. 첫 직장에 들어가 정신없이 일을 배우느라 1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몰랐다. 그쯤 동생들은 중학교 2, 3학년이었다. 어느 날 둘째에게서 연락이 왔다.
「누나, 나 수원에서 고등학교 다니고 싶어」
당연히 고등학교는 엄마 옆에서 지낼 줄 알았는데, 아버지도 안 계신 가정에 첫 남자아이라 그랬을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걱정이 많았나 보다. 내가 수원에 있으니까 나랑 같이 지내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내가 걱정하는 건 엄마가 서운해하실 거고, 둘째는 적응하기 힘들 거고, 막내도 외롭겠지.
엄마와 의논하기 위해 주말에 강원도에 내려왔다. 엄마는 내가 온다고 오랜만에 이것저것 맛있는 것을 많이 해놓고 다 같이 식탁에 둘러앉았다.
“엄마는 상관없어. 네가 가고 싶으면 수원에서 누나랑 같이 있어. 딸은 괜찮아?”
“응 나는 상관없지!”
“난 가고 싶어.”
“아무리 그래도 누나가 밥이랑 청소랑 빨래해줘야 하는데 괜찮아?”
“괜찮아. 내 짐에다 얘 것만 합치면 돼. 전학은 내가 한번 알아볼게”
이렇게 해서 생각보다 쉽게 둘째를 수원으로 전학 보내기 위한 준비를 했다. 주소를 수원으로 옮기고 고등학교 서류접수를 하러 다녔다. 당시 수원에는 특정 고등학교로 과도하게 진학하려는 것을 막기 위해 일명 ‘뺑뺑이‘로 고등학교 진학을 결정하고 있었다. 모든 절차는 끝났고 고등학교를 결정하기 위해 희망고등학교 5개를 적어오라는 용지를 받았다.
“누나가 알아봤는데 수원에서 좋은 고등학교는 A고, B고, C고 D고가 괜찮은 거 같아.”
“난 무조건 남녀공학 갈 거야!”
“남녀공학?? 이놈 시키 남자네 ~ 음 그러면 A고, C고, D고? 근데 5개 써야 해 2개는 뭐써? 그래도 3 지망 안에서 다 되겠지? 4번째는 남고 쓰자~ 수원에서 남고 중에 수원 고가 제일 좋데~”
“아 그래도 만약에 4 지망되면 어떻게?”
“에이 설마 네가 그렇게 재수가 없으려고?”
자기 운명을 예감했던 걸까? 동생은 실눈을 뜨고 못 미덥다는 눈으로 날 바라봤다. 하지만 쓸 곳이 없어서 울며 겨자 먹기로 4 지망으로 수원고를 적었다.
“....... 불안한데?”
“쓸 곳 없어 그냥 써~”
동생은 정말 재수가 없었다. 하필 5 지망 중에 그렇게 싫다던 하나밖에 안 쓴 남고가 당첨되었다. 그 후에 내가 동생한테 나 때문에 남고가 되었다는 책망을 얼마나 당했는지 모른다. 자기가 재수가 없는걸? 어쩐담 하하하
그렇게 우리의 수원 생활이 시작되었고 엄마는 두 번째 자식을 떠나보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엄마가 둘째를 수원으로 보내고 한 달 동안 계속 꿈에 둘째가 나왔다고 했다. 학교에서 사고를 쳐서 울면서 전화하는 꿈, 친구랑 싸워서 다친 꿈, 사고를 쳤으니 백만 원만 보내달라고 하는 꿈 등등 온갖 안 좋은 꿈을 한 달 내내 꾸고 나서야 엄마는 괜찮아졌다.
그리고 막내는 매일 같이 있던 형이 없어지고 나서야 형의 빈자리를 알았고, 늘 막내였던 자신이 엄마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말은 안 했지만 혼자 많이 힘들어했다. 어쩌면 우리는 그때부터 아버지의 빈자리를 이렇게 조금씩 나눠 가졌던 게 아닐까 싶다. 아버지가 곁에 계셨다면 막내는 막내답게 어리광 부릴 수 있었을까. 나는 가고 싶던 문예창작과를 갔을까. 엄마는 운전을 안 해도 됐을까. 둘째는 좀 더 늦게 철들어도 됐을까.
사람은 원래 살아보지 않은 삶을 항상 동경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건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삶이기에 아버지가 계셨으면 어땠을까는 언제나 더 우월한 조건이다. 혹 계셨으면 더 안 좋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상상을 하게 된다. 지금 이 순간에 아버지가 계셨다면 어땠을까 하고 말이다. 그 상상의 끝이 비극인지 희극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단지 아버지라는 보호막이 있는 삶은 어떤 것인지 한번 살아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