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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by 박성희

엄마의 말대로 치위생과는 취업은 쉬운 과였기 때문에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취업을 할 수 있었다. 취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집을 나가고 연락을 안 하고 지냈던 친가였기에 꼭 가야 하는 걸까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할아버지에 대한 나의 기억은 늘 말수가 없으셨지만, 첫 손녀였던 나를 유독 예뻐라 해주셨고 피부병과 당뇨가 있으셔서 안방에서 약을 바르시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하지만 최근에는 찾아뵌 적이 없어서 죄송스럽기도 하고 망설여졌다.


그래도 꼭 가야 한다는 엄마의 당부에 고등학교 1, 2학년이었던 동생들을 챙겨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장례식장이라는 곳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끼리 가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막막했다. 장례식장에 들어서니 드라마에서만 보던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모두 검은색 계열의 옷을 입은 사람들. 어두운 표정. 무거운 공기가 깔려있었다. 빈소에 들어서자 상주 자리에 할머니와 삼촌, 아버지가 앉아계셨다. 그리고 하얀 국화꽃 사이로 젊은 할아버지 사진을 마주하니 실감이 났다. 먼저 할머니에게 다가가 인사를 하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터져 나왔다. 한때는 같은 집에 살았었고 그 후에는 적어도 일 년에 한두 번은 꼭 만나는 사이였는데. 5~6년 만에 우리는 이런 모습으로 마주했다. 그리고 친척들은 우리를 어제도 만났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대해주셨다. 우리에게 상복을 주셨고 밥부터 먹으라는 소리에 옷을 갈아입고 구석에 앉아 밥을 먹었다.


밥을 먹고 나니 친척들은 우리의 근황을 물었다. 오랜만에 만나기도 했고 딱히 할 말은 없기에 하는 인사치레라고 해야 할까. 우리를 떠난 아버지를 숨겨주었던 친척들이 이제 와서 우리의 안부를 묻는다는 것이 불편했다. 가족이라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이라도 해주길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어떤 변명이나 사과도 없이 인사치레만 있었다.


미안하지만 미안하다고 말할 수 없으니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걸까. 아니면 정말 미안하지 않은 걸까. 내가 아는 어른이란 잘못한 게 있으면 자기보다 어린 사람이라도 사과할 줄 아는 게 어른이었다. 여기에 어른은 없었다.


가족이지만 가족이 아닌 듯 장례식장에서 우리는 손님을 치르고 절을 하고 형식적인 인사가 오갔다. 밤새 손님을 맞고 구석에서 쪽잠을 자고 나니 삼일장 마지막 날이 되었다. 그날 엄마가 장례식장에 왔다. 나는 오지 말라고 했지만 엄마는 꼭 와야 한다고 했다. 엄마가 나타나자 장례식장은 불편한 공기가 감돌았고, 엄마는 절을 두 번 하고 부조를 하고 밥을 먹었다. 밥을 다 먹은 엄마는 우리를 데리고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할 얘기가 있어. 밖에서 애들이랑 잠깐 이야기 좀 해”

“..... 알겠어”



엄마가 아버지를 불러내셨고, 우리는 따라 나갔다. 거의 십 년 만에 보는 엄마와 아버지가 같이 있는 모습. 예전에는 그 모습이 참 자연스러웠는데 지금은 너무 불안한 모습이다. 한 가족이 십 년 만에 함께 있는데 많은 것이 변해있었다. 지하에 있던 장례식장을 나와 나무 그늘 아래 엄마가 앉았고 아버지는 그 맞은편에 앉았다. 우리는 엄마 곁에 서 있었고 아버지는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너희가 엄마 보디가드야? 왜 옆에 쭉 서 있어. 앉아 다들”



늘 작기만 했던 우리가 이제 엄마, 아버지의 키를 훌쩍 넘었고 어린아이였던 동생들은 고등학생 남자아이들이 되어 엄마 곁에 서 있으니 든든했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느껴보지 못했던 자식들의 성장이 엄마, 아버지에게 전해지는 듯했다. 하지만 앉을 공간도 없었고 다섯 명이 마주 보고 앉을 사이는 아니기에 우리는 그냥 서 있었다.



“할 이야기가 있어.”

“.......... 이야기해 ”

“내가 그동안 당신이 내 이름 앞으로 빚지고 나간 거.... 내가 혼자 다 갚았어. 애들 셋 다 학교도 잘 다니고 있고!”



여태껏 엄마를 바라보면서 항상 존경스럽다고 생각했었다. 여자 혼자서 아이 셋을 키운다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엄마가 한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했었다. 본인도 힘에 벅차고 무서울 텐데 아무에게도 터놓지 못하고 꿋꿋하게 버티고 있는 엄마가 참 안됐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날 엄마는 그동안의 힘들었던 순간들을 다 보상이라도 받듯이 가장 당당하고 자랑스러운 모습이었다.



“나 당신한테 양육비 달라고 한 적 없어. 내 자식들이니까.”

“알아.... 할 말이 그거야?”

“근데 당신이 집 나갈 때 끌고 나간 트럭! 그거는 아직 못 갚았는데... 나 그거는 못 갚아. 아니 안 갚을 거야. 우리 버리고 가지고 나간 트럭은 당신이 갚아. 그 얘기하러 나 오늘 여기 온 거야.”



엄마는 이 말을 하려고 참고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엄마는 내가 모르는 새 더 큰 사람이 되어있었다. 도대체 왜 빚을 갚지 않냐고 나 혼자 왜 다 갚아야 하냐고 따지고 멱살을 잡아도 이상하지 않을 순간이었다. 하지만 차분하고 당당하게 나는 이만큼의 책임을 졌고 더 이상은 책임지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다.


두 남녀가 만나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고 지낸 세월 동안 생겼던 빚들을 홀로 갚아왔는데 억울함이나 호소가 아닌 책임감으로 자신이 갚아왔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이 말이 당신을 사랑했었고 이제는 정말 끝이다라는 말로 들렸다.



“당신이 애들 키울 때 하나도 도와주지 않은 건 나 괜찮아. 내 자식들이니까. 내가 키운 거야. 근데 그 트럭은 당신이 갚아. 그거 하나는 해줄 수 있지?”

“.......... 그래 알았어.”

“그리고 다시는 보지 말자 이제. 애들도 거의 다 컸고. 아버님께 마지막 인사는 하고 싶어서 오늘 온 거야. 다신 보지 말고 살자.”



그게 마지막이었다. 엄마는 뒤돌아보지 않고 일어섰다. 나에게 애들 잘 챙겨서 장례 치르고 데리고 오라는 말과 함께 돌아서서 갔다. 그 순간 나는 어렸을 때부터 어른은 이런 거야라고 생각해오던 모습이 엄마의 뒷모습이었나 보다라고 생각했다. 무책임하고 회피하는 어른이 아닌 자신이 한 일에 책임을 지고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는 어른의 모습. 내가 보았던 평생의 엄마 모습 중에 가장 멋있고 쓸쓸한 모습으로 기억되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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