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시절부터 엄마를 속상하게 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엄마가 시키지 않아도 집안일을 했고, 용돈 벌이로 아르바이트를 열심히 했다. 그랬던 내가 엄마 말을 처음으로 안 들었던 일이 있었다. 대학교 1학년 때 일이었다.
학기 중에는 대학교 내에 있는 평생교육원에서 아르바이트했고, 방학 때는 조금 더 수입이 짭짤한 곳을 찾아다니며 아르바이트를 했다. 방학 때 만이라도 자취방 월세 비용을 엄마에게 손 벌리기 싫어서 했던 일이다. 그래서 방학이라고 강원도 집에 가서 쉬는 날은 드물었다.
한 번은 방학 때 장기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기 며칠 전 엄마가 저녁에 일하는 식당에서 며칠만 아르바이트하겠냐는 제안이 들어와서 집에도 갈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신이 나서 강원도로 향했다. 오랜만에 가는 강원도라 여기저기 동창 친구들에게도 연락하며 내려갔다. 식당은 손님이 별로 없었고 엄마와 함께 홀을 담당했다. 인심 좋으신 사장님이 별로 바쁘지도 않으면서 용돈 주시려고 핑계 삼아 부르신 거 같아 민망했다. 뻘쭘한 마음에 엄마랑 함께 식당 잡일을 했다.
“oo야 전화 온다”
「여보세요?」
「야 안 나와? 애들 다 모였어.」
「나 아르바이트하고 있어 못 나가~」
「잠깐만 왔다가~ 애들 다 모였는데 얼굴만 잠깐 보고가~」
「음 ,, 오늘 여기서 열 시까지 일해야 해 못 나가」
「에이 아쉽다. 오랜만에 얼굴 보고 싶었는데 애들이 다 너 보고 싶대」
거의 육 개월 만에 친구들이 모였다고 연락이 왔다. 다들 너무 보고 싶었다. 엄마 눈치를 살살 보며 통화를 끊었다.
“엄마... 있잖아..”
“왜?”
“애들 다 시내에 있나 봐....”
“아 그래? 애들도 연휴라서 다 내려왔나 보네”
“응 나 빼고 다 모였나 봐”
눈치 빠른 엄마가 실눈을 뜨고 쳐다봤다.
“......... 그래서 가고 싶다고?”
“..... 나는 여기서 아르바이트해야 하잖아.. 근데 가고 싶긴 하네”
“친구들이 얼마나 보고 싶겠어 한 시간만 갔다 와~”
“에이 사장님 안돼요”
주방에서 청소하시던 사장님이 눈치채고 먼저 말씀해주셨다. 엄마는 내심 알바만 하는 내가 안쓰러웠지만, 사장님 눈치가 보여 아무 말 못 하고 있었는데 사장님이 그렇게 말씀해주시자 오히려 화를 내셨다.
“안 되겠지?”
“응 안돼. 아르바이트하기로 했잖아”
“........ 사장님 말씀처럼 딱 한 시간만 갔다 오면 안 돼?”
“응 안돼”
“아 엄마 제발.. 나 진짜 딱 한 시간만 애들 얼굴만 보고 올게!”
“얘가 정말?..... 으휴 그럼 딱 한 시간이야?”
“응응 엄마. 고마워”
엄마 속도 모르고 신나서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갔다. 친구들은 몇 안 되는 호프집에 모여있었고 반가운 마음에 맥주도 한잔하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시골의 버스는 한 시간에 한 대뿐이었고 친구들을 만난 지 삼십 분만에 버스를 타야 나는 엄마와 약속한 시각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데 막상 친구들을 만나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꼭 돌아가야 한다고 마음먹고 나왔는데, 버스를 놓쳐버렸다. 내가 돌아오지 않자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지금 어디야?」
「어... 엄마 미안해. 친구들 너무 오랜만에 만나서 이야기하다 보니까 버스를 놓쳤어....」
「너 이러려고 강원도 왔어? 이럴 거면 집에 들어오지 마」
처음이었다. 엄마 말을 거스르거나 대놓고 말을 듣지 않은 적은 그때가 정말 처음이었다. 그래서 화난 엄마가 무서웠다. 하지만 바로 집으로 돌아가기는 싫었다. 오늘만큼은 무슨 오기가 생긴 것인지 명백히 내가 잘못한 일이지만 집으로 바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철이 없었다. 찜찜하지만 뒷일은 생각하지 않으려 친구들과 웃으며 이야기했고 저녁 막차 시간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엄마는 퇴근하고 집에 들어와 있었고 내가 들어가자 가방이 던져졌다.
“너 이럴 거면 가. 강원도 오지 마”
“엄마? 이 시간에 나가라고?”
“응 너 같은 딸 필요 없어. 나가”
“내가 지금 이 시간에 어딜 가?”
“나가”
처음으로 한 반항인데 이렇게까지 하는 엄마가 너무 서운하고 미웠다. 나도 아직 놀고 싶고 친구도 만나고 싶은 나이인데 그거 하나 이해 못 해주는 거야.
“6개월 만에 만난 친구들이라 이야기하다 보니까 버스를 놓쳤어. 이렇게까지 화낼 일이야?”
“내가 사장님한테 할 말이 없더라. 너 엄마 입장 생각해 봤어? 사장님한테 한 시간 후에 온다고 해놓고 안 들어왔잖아. 엄마가 사장님한테 얼마나 미안할지 생각해 봤어?”
“그건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근데 식당도 별로 안 바빠 보이고 친구들 너무 오랜만에 만나니까........ 나도 생각이 짧았어...”
“아니 필요 없어. 수원으로 가. 다시는 강원도 오지 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진짜 너무해 엄마!”
내가 내 인생에서 손꼽는 가장 철없는 시기였다. 그날 나는 내가 잘못해놓고 오히려 세상이 떠나가라 서럽게 울었다. 다 큰 딸내미를 매정하게 혼내던 엄마는 내가 오히려 서럽게 울자 와서 눈물을 닦아주셨다. 엄마에게 절대 대들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내게 그날은 특별한 날이었다. 엄마에게 이렇게 투정 부리고 울어도 되는구나. 나는 자식이구나. 우리 엄마는 내 엄마구나.
지금 생각해보면 당연한 걸 참 오랫동안 모르고 살았다. 자식이 엄마에게 기대고 응석 부릴 수도 있는 건데 언제부턴가 머릿속에 박혀버린 장녀라는 압박감은 나를 더 엄격하게 궁지로 몰아세웠다. 그 사건 이후로 엄마와 나는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엄마는 엄마답게 나는 자식답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