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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by 박성희

이쯤에서 우리 막내 이야기를 안 하고 넘어갈 수 없겠다.


우리 집의 막내. 엄마의 뱃속에서 6개월 동안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있던 녀석이자 우리 가족의 마침표를 찍어준 없어서는 안 될 녀석. 아버지가 집을 나가고 둘째는 장남 노릇을 한다고 고민이 많고 힘들었지만 막내 역시 나름의 힘들었던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내가 먼저 독립을 하고 3년 뒤 연년생이던 형마저 독립을 해버렸을 때, 막내는 고작 중학교 3학년이었다. 그 예민한 시기에 하루도 빠짐없이 일하는 엄마 곁에 그 녀석이 혼자 있었다. 처음에 둘째도 수원에서 고등학교를 보냈기에 혹시 막내도 수원에서 고등학교를 보내고 싶은지 물었다. 하지만 막내는 가지 않겠다고 했다. 엄마는 혹시 엄마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면 신경 쓰지 말고 수원으로 가라고 매정하게 이야기를 했지만, 막내는 끝내 수원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 시간이 많이 흘러 나중에 물어보았을 때 막내도 수원에서 공부하고 싶었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하지만 엄마를 혼자 두고 가기 싫어서 3년만 더 있자는 생각으로 엄마 곁에 남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래서인지 수원에 가지 않기로 하고 막내는 친구들과 자주 어울렸다. 항상 아무도 집에 없기에 자주 밖으로 나돌았고 공부는 뒷전이었다. 그런 막내를 불안하게 지켜보던 엄마가 어느 날 동생을 불러 앉혔다.



“이제 조금 있으면 너 고등학교 2학년이야. 알고 있어?”

“....... 네”

“네가 여기 남아서 공부한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는데. 이렇게 공부 안 하고 친구들이랑 놀러 다닐 거면 대학 가지 마. 엄마 아무 지원도 안 해줄 거야”



엄마로서는 최후의 통첩이었다. 집안이 넉넉지 않아서 막내라고 더 챙겨주지도 못했는데 지금 정신 차리지 않으면 막내가 정말 아무것도 못 할까 봐 걱정이 앞섰다고 했다. 그래서 겁을 주고자 이야기했다. 엄마의 충격요법이 통했는지 그 후로 막내는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본인 말로는 자기 머리가 좋아서 공부 조금 했더니 성적이 나왔다고 했지만 아마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동생은 나의 뒤를 따라 수원에 있는 물리치료학과에 합격하였고 물리치료는 치위생, 치기공과 다르게 전신 해부학을 공부해야 해서 어렵다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좋은 성적으로 졸업 후 면허증 취득까지 성공했다. 그리고 지금은 서울에서 손꼽히는 종합병원에 최연소 정직원으로 취업해 우리 집안의 기둥을 담당하고 있다.

인제 와서야 동생이 말하길 그때 엄마가 자기에게 단호하게 말할 때 자기를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 엄마의 진심을 알았다고 했다. 그래서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었고 엄마를 걱정시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 하나로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다고.


어쩜 이렇게 든든한 동생을 둘이나 가질 수 있었는지 다시 생각해봐도 나는 누구보다 운이 좋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아서 동생들이 빨리 철들 수 있었고 삐뚤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모든 게 아버지 덕분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런 동생들을 보고 있으면 안쓰럽다가도 대견한 묘한 감정이 든다. 항상 나보다 어리다고만 생각했었는데 벌써 서른을 넘어가고 있고 이제는 엄마와 나를 든든하게 지켜준다.


아 그럼 난 곧 마흔인가. 잠시 눈물 좀 닦고 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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