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이번 주말에 천안에 동생 데리고 놀러 와~」
그 후로도 아버지는 불쑥불쑥 연락이 왔다. 둘째 동생이 고등학교를 수원으로 오고 나서는 보고 싶다는 이유로 연락이 잦아졌다. 처음에는 너무 당황스러워서 피하기도 하고, 못 본 척도 했었다. 하지만 계속 피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아버지였다.
“아빠가 이번 주말에 오라고 하는 데 같이 갈래?”
“............ 글쎄”
“불편하면 누나만 갔다 올게.”
혹여나 이제 곧 스무 살이 되는 동생이 상처받을까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그런 내 마음을 눈치챈 것인지 혼자 갈 누나가 안쓰러웠는지 동생은 그럴 때마다 별말 없이 같이 가 주었다. 나보다 더 어렸을 때 아버지를 잃어서 어색하고 불편할 텐데 투정 한번 부리지 않았다.
그리고 아버지를 만나러 간다고 하면 혹여나 엄마가 서운해하실까 봐. 처음에는 솔직히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계속 엄마를 속이는 기분이 들어 언제부턴가 솔직히 털어놓고 아버지를 만나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만나는 일이 엄마의 기분을 살피고 동생의 눈치를 보는 일이라니. 우리는 왜 이렇게 돼버렸을까. 아버지는 우리가 무슨 마음으로 당신을 만나러 가는지 아실까.
수원에서 천안은 가깝다면 가깝고 멀다면 먼 거리다. 두 달에 한 번 정도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길은 몸보다는 마음이 더 힘든 길이었다. 그 시기쯤 나와 동생은 운전면허를 딴지 얼마 안 되었고 아버지는 우리 운전 연습을 시켜준다는 명분으로 천안으로 불렀다. 둘 다 1종 보통을 취득하였고 아버지는 트럭 운전을 오래 하셔서 수동 운전에는 베테랑이었다.
천안에서 만난 우리는 아버지 트럭을 타고 천안의 공터로 향했다. 나와 동생은 돌아가면서 공터 한 바퀴씩 운전했고, 종종 시동도 꺼트리며(주로 내가) 아버지에게 운전을 배웠다.
“그래도 확실히 아들이 운전을 잘하네~”
“저도 잘해요. 아빠!!”
“그래그래 우리 딸도 여자치고는 잘하지~, 딸 차는 언제 살 거야?”
“.... 네? 아직은 돈이 없어요~”
“그래도 면허 따고 바로 차 끌고 다니는 게 좋아!”
아직 수원에서 월세로 살고 있고, 월급도 넉넉지 않아서 꿈도 못 꾸고 있는 차였다. 아버지는 여전히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고 계셨다. 엄마가 들었으면 아마 펄쩍 뛰었겠지.
“나중에요~”
“끌고 싶은 차가 있어?”
“음.... 쏘울이요”
사정은 넉넉지 않았지만 내가 갖고 싶은 위시리스트 차는 있었다. 기아자동차에 쏘울!! 넘나리 내 스타일에 귀여운 디자인! 내가 첫차를 산다면 꼭 쏘울이다!라고 생각해둔 차였다.
“에이 현기차는 안전하지 않아서~”
“그냥 생각만 한 거예요! 어차피 못 사요. 아빠!”
“왜 못 사! 사면 사는 거지~ 아빠가 돈 많이 벌면 우리 딸 차 사줄게~”
그거 말고 엄마 트럭 값이나 갚아주세요. 아버지.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결국 말하지 못했다. 다시 아버지와 웃으면서 대화할 수 있게 된 게 얼마 만인데. 또다시 무거운 이야기로 냉랭한 분위기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날 우리는 열심히 운전 연습을 했고 지하철을 타고 돌아왔다. 아버지를 만나고 돌아오는 날이면 바닥 아래까지 기분이 가라앉곤 했다. 하하 호호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만, 진심으로 즐겁지 않고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현실과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하며 사는 아버지와 현실에 부딪히며 사는 엄마가 너무나도 달라서 어느 온도에 나를 맞춰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맞나. 평생을 함께 살아야 하는 부부가 이렇게 달라서 엄마와 아버지는 헤어진 걸지도 모른다. 아버지와 무의미한 만남을 열 번쯤 이어가고 있던 어느 내 생일날 아침이었다. 평소보다 눈이 일찍 떠졌고 출근하기 전 침대에 누워 뭉그적거리고 있었는데 문자 하나가 왔다.
「딸 생일 축하해.. 아빠가 생일인데 해줄 게 없네..」
그날이 내 생일이어서 그랬을까. 딱히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괜찮아요. 그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늘 다른 사람 눈치 보느라 말하지 못했던 내 감정, 내 생각에 솔직해지고 싶었다. 아버지에게는 할 말이 없었다. 결국 그날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아버지에게 연락이 없었다. 그리고 몇 개월 후 나는 핸드폰 번호를 바꿨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의 자연스러운 이별이었다. 그렇게 나는 또 네 번째 아버지와 이별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설날이었다. 우리 집은 교회를 다니지 않으면서도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그렇지만 음식은 항상 소쿠리로 한가득했고 명절 전날까지 매일 식당에서 일하느라 바쁜 엄마 대신 내가 음식을 해야 했다. 먼저 엄마는 재료 손질과 준비를 다 해놓고 출근을 한다. 그러면 수원에서 온 내가 하루 종일 전을 부쳤다. 너무 많다고 투정 부리는 나에게 엄마는 전은 부치는 것만 하면 된다며 굉장히 쉬운 일인 것처럼 말하길 잘했다.
그날도 아침부터 음식을 하고 저녁이 되어서야 전 부치는 것이 끝이 났다. 엄마가 밤늦게 돌아오면 같이 음식을 나눠 먹고 다음 날 끓여 먹을 떡국 준비, 김밥 준비까지 끝내면 설날 음식 준비가 모두 끝이 난다. 설날 당일은 떡국을 끓여 먹고 김밥을 스무 줄을 싼다. 설날인데 웬 김밥이냐고요? 그 김밥은 전과 함께 엄마가 같이 일하는 군인들에게 갖다 주곤 했다.
가끔 내가 요리하는 게 너무 힘들 때면 우스갯소리로 엄마는 전생에 전쟁을 일으켰나 봐. 군인들에게 이렇게 잘해주는 걸 보면말이야라고 했다. 아주 그럴듯하지 않은가. 항상 정 많은 엄마라서 나는 좀 힘들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같이 일하는 군인들에게 명절 음식을 나눠주고 흐뭇해하는 엄마가 참 따듯했다.
아버지는 집을 나갔고 다시 우리에게 연락하고 싶을 때 연락하셨고 또다시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다. 그리고 엄마는 스치는 인연에도 정이 많은 사람이라 우리를 버리지 못했다. 그때는 내가 문자에 대답하지 않고 연락처를 바꿨기 때문에 연락이 끊긴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언제든 연락하고 싶을 때 하던 아버지였기에 마음이 없어져서 연락하지 않으신 거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때 대답하지 않은 죄책감을 덜기 위한 나의 변명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버지와 연락하지 않게 되어서 솔직히 내 마음은 좀 편해졌다. 마음에 없는 말이나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