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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by 박성희

대한민국에서 미혼부로 살아간다는 건 미혼모보다 훨씬 힘들다고 들은 적이 있다. 심지어 아이의 출생신고조차 제대로 할 수 없다고 말이다. 이게 얼마나 황당하고 어이없는 소리인가. 엄마가 없다고 아빠 혼자 아이의 출생신고를 할 수 없다니.


아이의 성은 무조건 아빠를 따르는 가부장적인 우리나라에서 이런 법이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이 논란은 국민청원에 올라가고 사람들의 목소리가 높아져도 몇 년째 법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심지어 엄마가 아이를 버리고 갔는데 아빠 혼자서 아이를 키우다 출생신고가 되지 않아 학교도 못 가고 아파도 병원을 못 가는 상황이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다.


한부모가정에서 사는 것을 선택하거나 원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일반적이지 않다고 해서 조금 특별하다고 살아가는 기본권리조차 불편하게 만들어 놓고 무관심한 정치인들이 답답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혹시 이런 것 때문에 아버지가 우리를 데려갈 생각을 못 한 건 아닐까. 만약 이런 불리함이 없었다면 셋 중에 한 명이라도 아버지가 데려가 키울 생각을 하셨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찢어져서 서로의 세월을 모른 채 어색한 사이로 자랐겠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인지 못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버지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해야 될지도 모르겠다.


매일 아침 출근하기 위해 지하철을 타러 갈 때나 버스를 타러 갈 때 지하상가에 누워있는 노숙자분들을 지나칠 때가 있다. 요즘은 누군가의 투철한 신고 정신으로 인해 많이 사라졌지만, 그런 분들을 지나칠 때면 왜, 무슨 사연으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이곳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내고 계신 걸까라는 궁금증이 밀려올 때가 있다. 그들도 부모가 있을 테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친구, 지인, 친척이 있을 텐데. 왜 아무에게도 향하지 못하고 누구나 향하는 역 지하상가에서 지내고 있는 걸까. 혹시 우리 아버지도 어딘가에서 우리에게 오지 못하고 이런 생활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어느 날 갑자기 경찰이나 병원에서 연락이 오는 상상을 종종 한다. 하지만 상상의 끝은 항상 답이 없다. 무작정 달려가서 확인을 해야 하나 걱정을 해야 하나 아니면 매정하게 모른 척을 해야 하나 어느 것도 답이 없다. 고모부에게 말했던 것처럼 나도 이제 어른이고 결정할 수 있는 나이인데 아버지 문제에서는 항상 답이 없다.

어딘가에서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네 가지 인연이 있다고 읽은 적이 있다.


첫째 은혜를 갚는 인연. 전생에 자식이 부모에게 큰 은혜가 있어 그 은혜를 갚기 위해 금생에 자식으로 태어나 부모가 기뻐하도록 극진히 봉양하는 인연.

두 번째. 원한을 갚을 인연. 부모가 자식에게 전생에 원한을 사서 그걸 갚기 위해 태어난 것으로 작게는 부모 마음을 거스르고 크게는 화가 미치게 하며 살아생전에 봉양을 올리지 않고, 죽은 뒤에는 모욕을 당하게 하는 인연.

세 번째. 빚을 갚을 인연. 자식이 전생에 부모에게 진 재산상의 빚을 갚으려고 태어난 경우. 진 빚이 많으면 평생토록 뼈 빠지게 일해 받들어 모시지만 빚이 적으면 잘 봉양하다가 중간에 그만두기도 한다는 인연.

네 번째. 빚을 되찾는 인연. 부모가 자식에게 전생에 재산상의 빚을 진 까닭에 그 빚을 받으려고 태어난 인연.


아버지와 나는 어떤 인연이었을까. 아직 자식이 없는 나는 엄마의 마음도, 아버지의 마음도,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내가 나중에 자식을 낳게 된다면 오히려 아버지를 더 이해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도대체 왜 우리를 떠났을까. 무슨 이유에서건 아버지가 우리를 버린 건 변함이 없었다. 나는 열다섯 살에 아버지를 잃었다. 그리고 동생들은 아버지와 함께한 시간이 평생을 통틀어 10년이 채 되지 않는다. 이제 서른이 넘은 동생들에게는 평생 아버지가 안 계시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 셋이 함께였고 엄마가 있어 줬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행복하게 살 수 있었다. 그 어떤 조건도 빗나가지 않고 지금의 조건이어야만 우리는 자랄 수 있었다고 확신한다. 나는 종교를 믿지 않지만, 혹시 신이 있다면 우리 네 명을 꼭 붙여놓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정말 신이 있다면 수많은 경우의 수에서 하나라도 빗나가지 않고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해 줘서 너무 감사하다고 꼭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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