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 배경이 되는 오세아니아는 빅 브라더의 지배하에 있는 전체주의이다. ‘빅 브라더가 당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포스터가 어디든 따라붙는다. 텔레스크린이라는 보이지 않는 감시 카메라가 언제나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다. 조금이라도 당의 지시와 방침에 어긋나기라도 하면 바로 지시와 명령을 내린다. 텔레스크린은 송신과 수신이 동시에 행한다. 이 기계는 사람들이 내는 소리가 아무리 작아도 낱낱이 포착한다. 이 금속판의 시계 안에 들어 있는 한, 당신의 일거일동은 다 보이고 들린다. 물론 언제 감시를 받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사상경찰이 개개인을 감시한다. 어떤 방법으로 감시하며 얼마나 자주 하는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매일 ‘이 분간 증오’ 때는 빅 브라더를 찬양하는 찬가를 부르고 국가 전복을 꾀하는 음모자이자 거대한 비밀군대의 사령관인 ‘형제단’을 이끄는 골드스타인을 증오하는 의식을 갖는다. 조금이라도 흐트러진 행동과 불손한 마음을 갖는다면 텔레스크린과 사상경찰에게 즉시 포착될 수 있다.
생각만 해도 소름 돋는 사회다.
주인공 윈스턴은 흰색 콘크리트로 번쩍이는 피라미드 모양의 웅장한 건물이 층마다 계단식을 쌓아 올려진 채 300미터나 하늘 높이 솟아 있는 정부 기관에서 일한다. 건물에는 네 개의 청사가 있다. 보도.연예.교육 및 예술을 관장하는 진리부, 전쟁을 관장하는 평화부,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애정부, 경제 문제를 책임지는 풍요부가 있다. 이 이름은 신어(오세아니아의 공용어)로 각각 ‘진부’ ‘평부’ ‘애부’ ‘풍부’라고 한다.
윈스턴은 진리부에서 일한다. 모든 사건 사고 등을 당의 입맛에 맞게 재가공하고 꾸며내고 조작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다. 없는 것도 있는 것으로 만들고, 있는 것도 없는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과거의 사실뿐 아니라 사람까지도 창조해 낼 수 있으며 깨끗이 없앨 수도 있다.
그는 당원이지만 빅브라더를 타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증오해야 할 골드스타인을 동경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동료들 앞에서는 절대로 내색하는 눈빛도 내서는 안 된다. 혹여 눈이라도 마주쳐서 들키기라도 한다면 어느 날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게 된다. 흔적도 없이 존재했다는 사실조차도 지워져 버리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이것은 사상죄에 해당하며 사상죄는 죽음을 수반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 그 자체였다.
결혼과 섹스는 아이를 낳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사랑의 감정으로 만난다면 결혼은 당으로부터 인정되지 않는다. 연애하는 남녀도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다.
과거 일제강점기와 군부독재 시대를 생각하게 한다. 주인공 윈스턴이 이런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윈스턴은 당이 하지 말라는 일기를 쓰고, 줄리아와 사랑에 빠지고, 채링턴 노인의 가게 이층을 빌려 줄리아와 은신처를 마련한다. 오브라이언을 비밀리에 만나 ‘형제단’에 가입하고, 골드스타인의 ‘그 책’을 받아 읽는다. 그러나 이 모두가 자신을 사상범으로 만드는 과정으로 자기 무덤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일기장을 사기 위해서 몰래 채링턴 노인의 가게에 들르고, 텔레스크린을 피해 일기를 쓰는 장면은 지금 일기를 쓰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생각하게 했다.
줄리아와 만나 사랑을 나누는 장면은 얼마나 아슬아슬하고 위험하게 느껴지는지 긴장감이 가득하다. 마음껏 사랑하고 애정을 나눌 수 있는 우리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윈스턴이 애정부 감옥에 갇혀 모진 고문을 받을 때는 일제 치하에 독립투사가 고문받던 모습과 군부 독재하에 민주투사의 고통도 느껴져 소름이 돋았다. 그 시절을 살았다면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상상하기도 싫었다.
인간이 모진 고문을 이기고 자신의 사상과 철학, 신념을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
2 더하기 2는 4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사실을 말할 수 없다. 자유란 2+2=4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라 말했던 윈스턴은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했다. 2 더하기 2는 5가 될 수도 있고 3이 될 수도 있다는 오브라이언의 말을 받아들였다.
자신은 인간이며 자신이 존재하는 인물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자신은 사랑하는 사람을 절대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윈스턴은 참을 수 없는 고통 앞에 무너졌다. 현실을 통제하는 당의 ‘이중사고’를 훈련하고 받아들였다.
그는 전체주의와 독재자에 저항하는 힘을 잃었다. 자신의 존재자체도 확신하지 못했고, 자신의 기억조차 믿지 못했다. 사랑하는 줄리아를 배반했으며, 자신의 고통이 줄리아에게 가게 해달라고 외치기까지 했다. 자신의 모든 죄를 고백했고,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을 공범자로 만들었다.
마침내 당의 모든 것을 받아들였으며 당이 원하는 방향대로 그의 영혼은 흰 눈처럼 깨끗해졌다. 사상과 기억까지도 완전히 깨끗하게 세탁되었다. 있던 것은 없는 것이 되고, 없던 것은 새롭게 만들어졌다. 빅 브라더의 거대한 얼굴을 보면서 회개하고 눈물을 흘렸다. 거대한 국가와 체제에 저항하던 윈스턴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당이 사람의 속마음까지 지배할 수 없다고 확신했지만 결국 그는 패배하였다. 그에게는 패배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속마음까지 완전히 지배당한 그는 독재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독재자 빅 브라더를 사랑하다니... 와~ 이런 뜻밖의 결론에 마음이 쓸쓸해졌다.
책을 읽고 나니 가장 먼저 독재와 전체주의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빅 브라더 전체주의 체제의 오세아니아 정부는 평화는 전쟁이고, 자유는 예속이며 무지는 힘이라고 한다. 현재의 우리나라처럼 자유로운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다. 평화는 전쟁이 없는 것이고, 자유는 예속되지 않으며, 아는 것이 힘인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어떨지 생각해 본다. 우리 형제가 살고 있는 북한은 또 어떨까?
다음으로는 텔레스크린의 기계다. 지금 우리는 어쩌면 텔레스크린의 감시를 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디를 가나 감시카메라가 있으며 무엇을 결제하든지 전산에 그대로 남는다. 가끔은 자신이 하는 행동과 말들이 실시간으로 전파를 타고 이름 모름 대중에게 퍼져나간다. 빅데이터라는 형태로 피드백을 받기도 하고, 온라인에서 검색하기만 하면 모든 일거수일투족이 좌르륵 검색기에 올라온다. 우리는 기계로부터 진정 자유로운 것인지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다. 코로나 시기 통제와 제약이 더 심했던 시기도 떠오른다.
전체주의를 혐오한 작가 조지 오웰은 1935년 스페인 내전에도 참가했으며, 1945년 2차 세계대전 직후 러시아가 스탈린 독재 통치를 받고 있던 때 <동물농장>을 발표했다. 누구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사회를 꿈 꾸던 조지 오웰. 지금 우리 사회를 본다면 뭐라고 말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