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 피었던 꽃이 지고 여름에 알맞은 꽃이 피었다가 사라졌다. 봄꽃인 황매화나 장미, 철쭉은 철을 모르고 다시 피기도 했다. 여름은 꽃은 아직도 피어있는 꽃이 여럿 있다. 배롱나무, 꽃댕강나무, 옥잠화 등등 피었다 지고 피었다가 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상가 앞에 화분에서는 아직도 분꽃, 란타나가 여전하며 가을을 맞이하여 국화 화분이 노란색 자주색 빛깔을 뽐내고 있다. 시골길이나 도롯가를 나가보면 가을을 알리는 코스모스가 한창이다. 해바라기가 익어가고 버찌 열매도 익어간다. 꽃이 진자리에 나무의 열매나 화초의 열매들이 가을 준비에 한창이다.
어느 꽃인들 예쁘지 않으리오.
올가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꽃은 구절초다.
구절초는 구일초(九日草)·선모초(仙母草)라고도 한다. 아홉 번 꺾이는 풀이라는 의미와 음력 9월 9일에 꺾은 풀이 약효가 좋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구절초는 예로부터 향이 좋아 차로 마셨다. 물속에서 꽃이 활짝 피며 은은히 퍼지는 향기가 일품이다. 약제로도 많이 사용했는데 구절초 효능은 기침 가래, 기관지염, 각종부인병, 우울증, 갱년기 증상완화, 염증제거, 식욕부진, 피로해복에 효과를 볼 수 있다.
구절초는 쑥부쟁이와 많이 닮아서 그것이 쑥부쟁이인지 구절초인지 잘 모를 때가 많다. 구절초는 쑥부쟁이, 취나물, 해국, 산국 등이 모두 국화 속에 속하며 이들을 통틀어 들국화라고 부른다. 그러니 잘 모르면 그냥 ‘들국화구나.’ 여기면 된다.
지금 산이든 들이든 어디를 가도 구절초를 볼 수 있다. 유명 구절초 축제에 가지 않아도 가을이면 어김없이 피는 꽃, 구절초를 만나러 어디든 여행을 떠나보자.
향원정 들국화
건청궁 앞마당 구절초, 향원정을 바라보며 핀 구절초, 집옥재 앞마당 취꽃
며칠 전 조선 제일의 법궁인 경복궁에 갔다. 애기 솜털을 간질이며 살랑대는 가을바람, 바닷속 고래가 뛰어놀 것만 같은 파란 하늘, 하늘 속 궁전에 사는 하얀 구름, 적당히 내리는 가을 햇살 등이 춤추고 노래하는 계절에는 바깥으로만 나가고 싶었다. 가을이 손짓하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사람을 압도할만한 근정전이 북악산과 인왕산을 배경으로 떡 하니 버티고 서 있다.
검은 기와와 어울리는 단청, 악귀를 물리치는 해치, 궁궐의 삼장법사 어처구니, 울퉁불퉁 과학적인 물 빠짐과 미끄럼 방지를 위한 박석, 화마를 물리치는 드무, 시간을 담은 해시계, 빛바랜 문창살의 국화, 불을 담은 아궁이와 굴뚝, 처마 끝 아름다운 곡선, 산을 병풍처럼 두른 지붕과 담장 등등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고 아름답다. 하늘과 바람, 나무와 꽃, 돌멩이 하나에도 역사가 있는 곳이 궁궐이다.
왕이 정무를 보던 사정전, 왕과 왕비의 침전인 강녕전을 관람한 후 뒤편으로 가면 왕비의 공간인 교태전이 있다. 구중궁궐에 들어오면 언제 바깥으로 나갈 수 없는 상황에서 왕비는 어떻게 일상을 살았을까 생각해 본다.
사가를 그리워할 왕비를 위한 교태전 뒤에는 작은 뜰 ‘아미산’이 있다. 아미산은 장대석(길게 다듬어 만든 돌)으로 석축을 쌓아 계단식 화원을 조성하였는데 십장생(두루미·박쥐·봉황·대나무·매화 등) 굴뚝이 보물이다.
아미산에 들어서면 살구색 굴뚝이 보이고 층층이 놓인 화단에 핀 꽃과 나무가 있다.
아미산에 들어서니 가장 아래단 정원에 구절초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살랑 바람을 타고 꽃향기가 그윽하게 퍼지고 높은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날아온 벌이 하얀 꽃잎에 앉는다. 이끌리듯 발걸음이 저절로 꽃 가까이에 가면 하얀 꽃잎 여러 장에 가운데 노란 꽃술을 담은 구절초가 인사를 한다. 하얀 얼굴로 갓 시집온 새색시 같다. 말간 얼굴을 한 것이 아직은 세월에 절지 않은 왕비의 모습이다.
구절초에 마음을 빼앗겨 카메라 버튼을 수도 없이 눌렀다. 구절초만으로도 아름답지만 아미산 굴뚝을 배경으로 피어 있는 모습은 세상 시름을 잊게 했다. 구중궁궐에서 바깥세상을 그리워하는 왕비도 이와 같지 않았을까. 행여나 바람을 타고 사가 소식이 전해질까. 높고 푸른 하늘에 떠 있는 구름에게 자신의 안부를 전해볼까. 벌이 물고 온 세상의 재미를 들어볼까. 구절초 향기에 왕비의 마음을 실어 보낸다.
구절초에는 어떤 전설이 숨어 있을 것만 같다.
오랜 옛날 하늘나라에 옥황상제의 수발을 들던 예쁜 선녀가 살고 있었다. 선녀는 꽃을 좋아해 꽃 가꾸기에만 정신이 팔렸다. 옥황상제는 선녀의 죄를 물어 지상으로 쫓아냈다. 지상에 내려온 선녀는 다행히 마음씨 착한 사람을 만나 행복한 날을 보냈다.
선녀의 아름다운 미색이 입소문을 타고 호색가인 원님 귀에 들어갔다. 원님은 선녀의 남편에게 죄를 뒤집어 씌워 터무니없는 내기를 했다. 내기에서 지면 선녀를 관비로 바쳐야 했다. 남편은 시 짓기와 말타기 시합에서 원님을 이겼다. 그러나 원님은 막무가내로 선녀를 잡아가 옥에 가두고 고문하며 회유했다. 의금부에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선녀는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결국 생을 마감하였다. 남편도 선녀를 따라 죽고 말았다. 이듬해부터 선녀가 천상으로 돌아간 9월이 되면 그녀의 집 주위에서 구절초가 피기 시작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구절초를 '9월에 피는 천상의 꽃'이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