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전 함께 쓰기 프로젝트
늦깎이 대학원 공부는 재미있었고, 대학병원을 퇴사할 때 바닥을 쳤던 간호사로서 자존감도 되돌아왔다.
노인 치매공부를 하고 보니 초고령화 사회에 일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사십 대에는 육십 세까지 꾸준히 일할 수 있는 직장이 필수라고 생각했다. 나이 먹어서 자주 옮겨 다니는 것도 쉽지 않기 때문에 오래 일하려면 정규직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수명연장으로 노년을 오래 살아야 하는 세대로서는 당연한 요구이다.
병원을 떠난 지 십 년 만에 다시 병원에서 일하게 되었다. 유휴 간호사로 십 년을 다른 길을 걷다가 다시 찾은 병원 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아니 십 년 전 대학병원보다 더 열악했다. 병원에서 일하기 시작한 첫날부터 그만둬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할 정도였다. 그래도 미래를 위해서 우리 가정을 위해서 참고 일했다. 인내하다 보면 좋아지리라 여겼다. 다음은 어떤 마음으로 병원에 다시 입사하게 되었는지 <간호사, 무드셀라 증후군처럼> 수록된 내용을 소개한다.
<정규직이 될 수 있다면>
10여 년간 병원을 떠나 육아를 하는 동안 엄마로서 열심히 살아왔다. 아이들을 키울 때는 항상 아이들 곁에 머무를 수 있는 일자리를 구했다. 아이들이 중·고등학생쯤 되니 엄마의 손길은 덜 필요했고, 돈이 더 필요하게 되었다. 병원에 취업하게 된다면 ‘아이들의 학원비라도 벌 수 있으니 좋겠다.’라고 생각했다. 우리 가계의 경제 사정도 금방 더 좋아질 것만 같았다. 몇 달 쉬는 동안에도 좀이 쑤셨고, 남편의 월급은 늘 쓰기가 미안했다. 내가 일해서 번 돈으로 맘 편히 쓰고 싶었다. 40대 후반의 나이도 고려해야 했다. 자주 옮겨야 하는 불안정한 직장이나 계약직은 적응이 어려웠다. 정년이 보장되는 안정적인 직장에서 일하고 싶었다. 직장을 고를 때 정규직은 경제적인 측면과 고용안정을 위해서도 일 순위로 고려해야 했다.
“2025년 우리나라는 전체 인구 중 만 65세 이상의 고령자 비율이 20%를 넘어서는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할 것이다.”, “은퇴한 베이비붐 세대가 재취업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60세 이상 취업자가 20대를 앞질렀다.” 등의 기사는 일자리의 절박성을 갖기에 충분했다. 뉴스는 현실이었다. 부모님은 평균수명을 넘게 사셨고, 오십이 넘은 언니 오빠들은 임금피크제로 정년을 연장하거나 다른 회사에 재취업하기도 했다. 간호사 지인 중에는 퇴직 이후 중소병원에 재취업하는 사람도 종종 있었다.
어느 직장에서 40대 후반의 아줌마를 고용해 줄지 생각해 보니 간호사 면허증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 가장 빠르고 손쉽게 여겨졌다. 예상은 적중하여 10여 년간 병원을 떠났던 사람에게 일자리를 그것도 정규직으로 준다고 했다. 이십 대에 대학병원에 입사할 때보다 더 기뻤다. 취업의 기쁨에 들떴고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
일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서 ‘그 병원 엄청 힘들다고 하더라’는 주변 사람의 말과 커뮤니티의 의견을 무시했다. 친구가 다니는 병원이었기 때문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과거에 일했던 것만 생각하고 쉽게 생각했다. 의욕이 앞서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었다.
병원 근무환경까지 충분히 고려하지는 못했지만, 간호사로서 자존감과 자신감, 철학은 잘 간직하고 면접에 임했다. 면접 때는 자신 있고 당당하게 말했다.
“어떻게 우리 병원에 입사하게 되었나요?”라며 면접관이 입사 동기를 물었다.
“봉사하는 마음으로 일하고 싶습니다.”라고 답했다.
일해야 하는 이유는 많았지만, 봉사 정신으로 일하겠다고 말했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진짜 봉사 정신으로 일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다. 마음에 촛불 하나를 켜고 ‘나이팅게일선서’를 외듯이 소망했다.
‘나이팅게일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가리라’
봉사정신으로 일하고 싶었으나 일터는 그렇게 일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 간호사들은 새로 입사한 나이 많은 간호사에게 곁을 주지 않았고 차가웠다. 새로운 전산업무를 익혀야 했으며, 일은 넘쳐났다. 퇴근시간은 예정된 시간보다 두세 시간을 훌쩍 넘었다. 퇴사를 해야 되나 생각했지만 처음 입사할 때 마음을 생각하며 퇴사 대신 부서이동을 요청했다. 외래 주사실로 부서이동을 하면서 병동에서 벌어졌던 여러 가지 고단함이 누그러졌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4년째, 2020년 코로나 팬데믹이 몰아쳤다. 전 세계가 코로나 공포에 휩싸였다. 코로나는 서울의 작은 병원에도 찾아왔다. 외래 직원들이 병원에 설치된 선별진료소 업무를 맡으면서 감염병과 싸워야 했다. 처음에는 방호복을 입고 추위와 감염에 대한 공포와 싸웠고, 나중에는 더위와 병원에서 벌어지는 일방적인 폭력에 대항해야 했다. 다음은 선별진료소에서 일할 때 힘겨움을 어떻게 이겨냈는지 <간호사, 무드셀라 증후군처럼> 수록된 내용을 소개한다.
<코로나가 남긴 것>
직장인이라면 ‘오늘은 진짜 일하기 싫다’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원하고 또 바라던 직장이었지만, 힘들어서 쉬고만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출근하자마자 퇴근하고 싶은 날이 있고, 일하는 것에 진저리가 나는 날이 있다.
선별진료소에서 일할 때 종종 그런 날이 찾아왔다. 제대로 쉬지 못하고 근무해야 했던 날은 더 심했다. 너무 일하고 싶지 않아서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날이면 ‘이건 도무지 사람이 할 짓이 아니무니다~ 미쳐버릴 것 같스무니다~’라고 어느 개그맨의 유행어를 혼잣말로 중얼거리기도 했다. 아직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다시 돌아온 선별진료소 업무에서 일할 의욕을 상실했다. 그러나 아무리 일하기 싫어도 퇴사를 하지 않는 이상 일은 해야 했다. 효과적인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동화 속 ‘톰 소여’를 생각했다. 재미없는 일을 즐겁게 하는 방법을 톰은 알고 있었다.
《톰 소여의 모험》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동화이다. 말썽꾸러기 톰은 친구와 싸운 벌로 폴리 이모에게 긴 울타리에 페인트칠할 것을 벌로 받는다. 며칠을 해도 다 끝내지 못할 정도의 일이었다. 따분하고 괴로워하던 톰은 자신을 놀리고 비웃었던 친구 벤을 보면서 기발한 생각을 한다. 톰은 벤에게 “페인트칠은 굉장히 재미있고 환상적인 일”이라고 말한다. 톰은 정말 신나고 즐거운 것처럼 페인트칠한다. 톰의 연기에 속은 벤은 페인트칠을 너무나 하고 싶어서 톰에게 사과를 주며 페인트칠을 하겠다고 했다. 다른 아이들도 서로 톰 대신 일하겠다고 한다. 톰의 친구들은 톰 대신 즐겁고 열심히 울타리 페인트칠을 하게 된다.
일할 의욕이 도무지 나지 않을 때는 ‘톰’에게서 힌트를 얻었다. 여러 가지로 밀려드는 잡다한 생각을 밀어내고, 불편한 마음들도 비워보았다. 톰처럼 다른 사람까지 즐겁게 일하도록 할 수는 없었지만, 혼자라도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려고 애를 썼다. 오늘만큼은 일을 재미있게 해 보자며 속으로 파이팅을 외쳤다. 다행히 <톰 소여 효과>는 힘을 발휘했다. 출근하자마자 퇴근하고 싶었지만, 나중엔 꽤 괜찮은 하루였다고 말했다. ...
메디컬 드라마에서는 이런 장면이 가끔 등장한다. 응급상황에서 바쁘게 일한 의료진이 기진맥진하여 복도에 쓰러지듯 주저앉는 모습, 잠이 부족해서 쪽잠을 자는 모습, 몇 끼니를 굶고 숙소에서 컵라면으로 때우는 모습 등.
고단하게 일한 그들의 모습이 멋지고 아름답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들의 고단한 삶이 누군가에게는 건강을 돌려주는 치유의 시간이 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돕는다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라고 여긴다. <톰 소여의 효과>는 생각을 바꾸게 해 주었고, 더 나아가 마치 드라마 속 주인공이라도 된 듯 착각하게 했다.
‘지금의 신은 주인공이 엄청 힘들고 심리적 갈등을 겪는 상황이다. 한 장면이 끝나면 연기는 끝난다. 제대로 신을 살리기 위해서 힘든 일을 해봐야 한다. 명품 연기를 위해 필요한 일이다. 지금은 가상이다. 이것은 내가 아니라 명품 배우가 해야 할 연기일 뿐이다.’
어느새 현실이라는 드라마 속에 멋진 배우가 되었다.
‘열심히 일한 멋진 간호사라니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이보다 더 우아한 간호사는 다시없을 거야.’ 매일매일 연기를 한다고 생각하니 힘겨움이 아니라 약간은 즐겁기까지 했다. 내일은 어떤 드라마를 찍을까 살짝 기대도 되었다. 이 정도면 <톰 소여의 효과> 부작용일지도...
참고 견디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유휴 간호사에서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을 때 정년까지 일하겠다는 굳건한 의지는 꺾였고, 4년 만에 퇴사를 했다. 코로나가 남긴 후유증은 컸고, 병원을 퇴사하면서 마음의 상처도 깊었다.
#하나만 #라라크루
#딸아행복은여기에있단다_엄마에세이
#간호사무드셀라증후군처럼_간호사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