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전 함께 쓰기 프로젝트
사십 대에 그녀는 서울 살이에 적응하며 새로운 일을 찾아다녔고, 늦깎이 대학원생으로 공부하며 또 다른 기회를 엿보았다. 남편은 직장에서 중요한 위치에서 많은 일을 하였고 성실하고 책임감있게 생활했다. 아이들은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며 폭풍성장을 이루었다. 아버지는 영면하셨고, 어머니는 치매로 요양원에 입소하셨다.
만남, 직장 구하기
서울로 이사 온 첫해에는 보건교사로 학교에서 일했다. 아이들을 좋아해서 보건실에 오는 학생들이 너무 예뻤다. 초등학교 일 학년 중에는 '엄마보다 선생님이 더 좋아요.'라고 말하는 학생도 있었다.
보건교사로 일한 지 몇 개월 되지 않아 남편 지인이 보험회사에서 일할 것을 권유했다. 학교 계약기간이 있어서 후배를 소개해서 몇 개월 대신 일하게 한 후 계약이 만료된 후에 보험회사로 자리를 옮겼다. 사실은 보험회사보다는 학교에서 일하는 것이 좋았다. 아이들을 좋아했고 학교라는 공간이 마음에 들었으며 보건실에서 일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보험회사로 자리를 옮긴 이유는 재택근무라 아이들 곁에 있으면서 일할 수 있다는 장점과 다니고 싶을 때까지 다닐 수 있다고 해서 들어갔다. 보험회사에서는 차트를 점검해 주고 해석해 주며, 궁금한 부분을 상담해 주는 역할을 했다. 일은 어렵지 않았고 집에서 일하기 때문에 집안일을 하며 아이들을 돌볼 수 있었다. 하지만 삼 년 정도 지난 후 회사에서 개인정보 보안문제로 재택근무를 없애게 되어 퇴사했다. 다른 보험회사로 옮겨가는 방법도 있었으나 선뜻 내키지 않았다.
다음으로는 친구 소개로 대학 연구원을 하게 되었다. 간호대학 교수님 연구를 도와주는 일이었다. 국가사업 일환으로 에이즈예방을 위해 인력을 양성하는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했다. 교수님 보조하기, 교육전 자료 준비, 교육생과 강사님께 연락하기, 간식 준비하기, 교육장소 섭외 하기 등의 일을 했다. 대학원을 다니고 있는 중이라 연구 논문을 쓸 때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며 일했다. 대학원 석사를 마치고 나니 노인치매 관련 일을 하고 싶기도 하고 박사를 하고 싶기도 했다. 고민 끝에 먼저 취업을 하기로 했다. 교수님이 병원 질관리 관련 업무를 하는 일자리를 소개해줬으나 탈락했다. 딱히 병원에서 일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 절실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아쉽지도 않았다.
대학원을 마친 후에는 박사 공부를 염두에 두었고, 장래성도 있는 치매센터나 요양원에 관심을 가졌다. 치매지원센터에 지원했으나 불합격했고, 요양센터(원)에 합격해서 일하게 되었다. 구립에서 위탁한 요양센터였다. 입소자는 이백여명이 넘었다. 입소자 중 오십여 명은 와상으로 누워있는 환자였고, 나머지는 치매어르신이었다. 시설장은 사회복지사였고, 간호사는 일곱 명이 정원이었는데 간호팀장과 간호사 한 명은 한 달 후에 퇴사 예정이었으며, 나이 드신 간호사 한 명이 있었다. 간호조무사는 십여 명이 있었는데 간호사와 같은 일을 했다. 업무는 간호행정업무, 위관영양, 투약 등을 했다. 요양보호사가 목욕, 위생관리, 마사지 등 직접케어를 담당했다. 의식 없는 입소자 오십여 명은 병원을 방불케 할 정도로 그야말로 환자였다. 할 일은 많았고 간호사에 대한 처우는 형편없었으며, 임금도 낮았다. 환자 관리나 운영시스템도 간호사로서 일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다. 게다가 밤근무를 해야 했기 때문에 일주일 만에 퇴사를 통보하고 한 달 만에 그만두었다.
여러 직장을 옮겨 다니고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다 보니 백세 시대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정규직으로 일할 직장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대학병원에서 퇴사할 때 간호사로서 자존감이 바닥을 쳤었는데 대학원을 다니면서 어느 정도 회복했다. 마침 라디오에서 유휴간호사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고 취업까지 연결해 준다는 방송을 듣게 되었다. 대한간호협회에서 주관하는 교육에 참여하여 실무에 대한 불안감을 잠재웠다. 친구가 일하고 있는 병원을 소개받아 종합병원에 입사하게 되었다. 유휴기간 십 년 만에 다시 병원간호사가 되었다.
이별, 아버지의 죽음
2013년 7월 12일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향년 83세. 이 정도면 평균 수명은 넘게 사신 것이었으나 뜻하지 않는 죽음이라 가슴이 떨리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육십에 뇌졸중으로 좌측 마비가 있기는 하셨지만 다른 특별한 질병은 없었다. 다만 돌아가시기 이삼주 전부터 계속 전화하셔서 자식들의 돌봄을 받고 싶다고 하셨다. 부양해 줄 자식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우울해하면서 어쩔 수 없으니 요양원이라도 가겠다고 한 상황이었다. 토요일에 가족모임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금요일에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일주일 내내 어머니가 배가 아프다고 한다며 어떻게 해야 한다고 전화를 하셨다. 그녀는 서울에 있어서 어쩌지 못하니 119라도 타고 병원에 가보라고 했는데 그건 싫다고 하셨다. 다른 형제들도 바빠서 가지 못하다 막내 올케가 금요일에 시골집에 갔다. 아버지는 당일 아침 어머니를 남원병원에 택시를 태워 보내고, 당신은 오수 병원에 갔다가 돌아와서 마루로 사용하는 현관 입구에서 자는 듯이 가셨다.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혹자는 죽을 복은 타고났다고 말했다.
그녀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쯤 아버지를 무척 미워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달리 딸과 아들을 구별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아버지도 어머니처럼 차별하고 계셨다. 아버지께서 교통사고가 나서 입원했을 때 자주 대화를 하며 아버지의 본심을 알게 되었다. 딸은 당신이 필요할 때 이용하는 것이었고, 아들에게는 많이 의지하고 있으며 아들이 자신을 돌봐줄 것을 기대하며 아들에게 재산분배 같은 혜택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셨다. 실제로 아들에게 돈도 많이 주었고 재산도 분배했다. 그럴 줄 몰랐다.
우리 부모세대는 남녀 차별이 심하던 시대에 교육받고 자랐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이성적으로는 이해하면서도 마음에서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차별이 너무 싫었다. 딸들이 아들들보다 부모에게 더 잘하는데 차별받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아버지 상을 치른 후에 상속된 재산을 보니 한 푼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미 몇 년 전에 모두 아들들에게 나눠주었다고 한다. 또 한 번 배신감이 들었다. 딸에게 남겨줄 사랑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사랑과 재산은 별개의 문제일 수 있지만) 그 사상이 싫었다. 아! 평등 세상에서 살고 싶다.
나중에 친구들에게 들어보니 친구들 부모들도 다 그렇다고 말한다. 한 친구는 말했다.
"그래도 너는 학교는 보내줬잖아."
친구는 어릴 때부터 계모밑에서 집안일을 도맡았고, 중학교까지만 부모님 곁에서 있을 수 있었다.
또 한 친구 부모님은 딸은 가르쳐서 뭐 하느냐며 도시에 있는 고등학교에 합격했는데 진학시키지 않았고, 대학도 보내지 않았다.
"그래 그렇지. 우리 부모님은 딸이어도 대학은 보냈지."
친구의 처지에 비해 더 낫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그래도 여전히 차별은 싫다.
또 다른 이별과 만남, 어머니의 치매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대학병원에 입원하고 수술을 받았다. 큰 병원에 가지 못하고 있다가 병을 키웠다. 담낭결석이 복막염으로까지 퍼진 것이다. 아버지 장례식이 치러지는 동안 병원에서 어머니 곁을 지켰다. 매일 어머니를 뵈러 갔는데 어머니가 이상했다.
"왜 인제 와."
"어제도 오고 매일 왔잖아요."
"몰라."
어머니는 매일 방문하는 딸이 안 온다고 타박을 했다.
"엄마 내가 누구여?"
"영아."
엉뚱하게도 조카의 이름을 댔다.
이름을 고쳐 말해줘야 제대로 말을 하는데 다시 고쳐줘도 다음날 또 잊어버렸다.
대학병원에서 퇴원하여 종합병원으로 옮겼는데 몹시 불안해하며 화를 많이 내곤 했다. 간병인뿐만 아니라 환자들이나 보호자들과 싸움도 잦았다. 자신의 병실을 찾지 못해 길을 헤매기도 했다. 치매 검사를 받았는데 뇌가 많이 위축되어 있고, 치매가 상당히 진행된 상태라고 진단되었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네 엄마가 이상하다."라는 말을 여러 번 하시곤 했는데, 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무심이 넘긴 것이 화근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어머니의 치매는 폭발적으로 드러났다. 어머니는 집에 혼자 있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므로 종합병원에서 요양병원으로 옮겼다. 공동 간병인이 있어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낯선 사람과 환경을 무척 힘들어했고 불안감은 극도로 치달했다. 환청, 환시가 심했고 이상행동까지 보였다. 개인 간병인을 24시간 해야만 했다. 병원비가 일 년간 거의 천여만원이 들어갔다. 어머니의 모습이 안타까워 직접 돌볼까도 생각했으나 냉정하게 생각해서 현실적으로는 어려운 문제였다. 다른 형제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제부터는 돈이 효자라는 말이 현실이 되었다.
어머니를 돌봐 줄 요양원을 알아보았다. 등급에 따라서 다르지만 요양원에 입소하면 국가 지원을 받기 때문에 개인 부담금은 적었다. 요양원 선택 기준은 온돌방이었다. 어머니는 무릎이 좋지 않아 집에서 생활할 때도 걷기보다는 손으로 바닥을 짚으면서 엉덩이로 밀고 다니곤 했는데 병원에 계실 때 침대생활에 익숙하지 않아서 자꾸 바닥으로 내려가려고 했었다. 온돌 생활이 가능한 고향집 근처 요양원으로 옮긴 후에야 어머니는 편안해졌다.
어머니를 입소시킬 때 십 년 넘게 요양원에 계신 어르신 명단을 보고 무척 놀랐다. 이제는 우리 어머니가 십이 년째 요양원에 계신다. 요양원 입소 초기에는 어머니를 모시고 집에 오기도 하고 식당에 가서 밥도 사드리기도 했다. 코로나 시기에는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대면해야 했다. 지금은 직접 대면할 수 있으나 어머니를 모시고 나오거나 음식을 가지고 가지 않는다. 코로나 이후 감염 우려가 커서 조심하고 있다.
어머니는 예전의 거친 성질은 남아있으나 사나운 기운은 거의 다 빠졌다. 거칠었던 손은 아기 피부처럼 부드럽고, 얼굴에는 독기가 없어져 곱고 순하다. 여전히 풍성하고 윤기가 흐르는 하얀 백발은 단정하니 예쁘다. 머슴처럼 일했는데 일도 안 하고 세상 욕심도 내려놓으니 순한 아기가 된 것 같다. 만나는 사람마다 예쁘다고 말씀하신다. 몸은 쇠약해져 휠체어로 이동하며, 숨이 가빠 쌕쌕거리며 침을 흘리기도 한다. 자녀이름은 거의 다 잊었으나 느낌으로 아는 것 같다. 힌트를 주거나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녀의 이름을 기억하여 불러주기도 한다. 요즘은 우울증이 심해졌는지 만나기만 하면 눈물을 쏟아낸다. 어머니는 만날 때마다 말씀하신다. "나 여기 있기 싫어. 집에 데리고 가."
그리고 후회...
지난 추석 연휴 때도 고향을 방문해서 아버지 산소에 다녀오고 요양원에 계신 어머니를 만나고 왔다. 연휴 마지막날 잠자리에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으면서 갑자기 아버지 생각이 났다. 아버지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오르며 아버지가 그리웠다. 난데없이 찾아온 그리움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움의 아픔이란 미워하고 싶어도 미워할 수 없고, 원망하고 싶어도 원망할 수 없으며,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으며, 만지고 싶어도 만질 수 없기 때문인 것 같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가 살아계시던 때로 다시 돌아간다 해도 더 잘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그때를 후회한다. 내 감정에 빠져 어리석었고, 성숙하지 못해서 거칠게 말했다. 아버지에게 못되게 군것이 미안하다. 심성이 곱고 유약하며 여리기만 했던 아버지를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죄송하다.
'아버지가 지금 살아 계시다면 좀 더 잘해드릴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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