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전 함께 쓰기 프로젝트
주말부부 청산을 위해 서울로 이사를 결정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남편이 있어야 수월했다면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고 난 후에는 남편이 집에 있으면 오히려 불편했다. 하지만 남편은 나이를 먹을수록 가족과 떨어져 생활하는 것을 힘들어했다. 가족이 함께 살려면 지방에 있으면 잦은 이동으로 어려웠기 때문에 남편이 서울로 발령을 받고 이사를 하게 되었다. 40년을 지방에 살다가 서울로 이사를 하려니 여간 스트레스가 아니었다.
돈돈돈 돈이 문제로다
서울로 이사하려니 가장 큰 어려움이 집을 얻는 문제였다. 집을 어디에 얻을 것이며, 전세로 할 것인지 자가로 구입을 할 것인지 고민이었다. 서울에 언니 둘이 살고 있어서 자문을 구했다. 서울에서 아파트는 아파트 층은 저층보다 고층이 좋다고 했다. 큰 언니는 서대문구에 작은 언니는 강남구에 살고 있었다. 형부들은 당연히 강남구에 집을 얻어야 한다고 말했다. 아이들을 키우려면 교육 일번지라고 할 수 있는 강남구에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파트를 사려니 너무 비싸서 전세를 얻을까도 생각해 봤지만 전세를 살면 집주인에 의해서 뜻하지 않는 때에 뜻하지 않게 이사를 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 신혼 때 계약이 만기 되기 전에 나가라고 해서 느닷없이 이사한 경험이 있어서 집은 자가로 구입하기로 했다. 집을 구입하려고 하니 2011년도 집값은 지방에 살던 아파트에 비해서 서울 집값은 열 배가 비쌌다. 지방에서 아파트는 육천오백에 사서 십 년쯤 지나 1억 천만 원이었다. 서울에서 아파트를 사려니 같은 평수는 너무 비싸서 엄두도 못 냈다. 작은 평수를 알아보았는데 5억 4천이었다. 지금 이 가격으로는 서울에서 집 구하기는 어림없는 일이지만 당시에는 너무 비싸서 고민이었다.
이사하기로 하고 집을 알아보고 난 후부터 잠이 오지 않았다. 집 값만 보고도 현실을 자각하니 우울감에 사로잡혔고, 어떻게 돈을 마련할지가 고민이었다. 한 달 동안 밤에 잠을 자지 않았다. 아이들을 재우고 나면 고민을 잊기 위해 드라마 몰아보기를 했다. 케이블 TV가 있었는데 애들 키우느라 보지 못했던 온갖 드라마를 다 보았다. 가을동화, 겨울연가, 성균관스캔들, 내조의 여왕 등등. 그중에서 당시 한창 유행하던 시크릿가든은 여섯 번을 넘게 돌려보았고, 현빈과 하지원의 팬이 되었다. 드라마를 보면서 답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현실의 벽을 잠깐 잊을 수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돈을 마련할지 길을 찾아야 했다. 가지고 있는 저축, 아파트 가격, 기타 융통할 수 있는 돈 등을 따져보았다. 부동산 취득세, 이사비용, 부동산 중개 수수료 등 이사에 따른 비용도 꽤 많았다. 이리저리 돈을 모으고 부족한 1억은 주택담보대출을 했다. 지금은 1억이 큰(?) 돈이라 생각하지 않지만 당시에는 1억은 어마어마하게 큰돈이었다. 빚은 져본 적이 없어서 마음에 부담도 많이 되었다.
이사할 집은 리모델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도배만 새로 했다. 전주에서 한지를 직접 공수하여 한지도배사를 찾았다. 한지는 오래되었어도 은은하니 질리지 않았다. 이삿짐은 많지 않았으나 책이 많았기 때문에 인터넷으로 원목가구로 만든 슬라이딩 책장을 구매했다. 32평에서 24평으로 이사를 하는 것이었으므로 가지고 있던 짐은 많이 뺐고, 책도 많이 버렸다. 이사할 때 가장 힘든 물건은 책과 화분이라더니 우리 집은 책이 많은 집이었다. 책을 많이 버렸는데도 이사하고 보니 책을 정리할 수가 없어서 거실에 가득 쌓아 두었다. 그리고 이사 후 이주동안 내내 집정리를 했다. 아파트 평수가 조금 작아졌을 뿐인데 너무 작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집은 사는 내내 작게 느껴졌다. 무리를 해서라도 32평을 얻을걸 그랬나 후회도 했다.
낯선 도시, 낯섦이 주는 두려움
서울로 이사하면서 만난 서울 사람들에 대한 인상은 좋지 않았다. 이사할 때 매도인 할머니가 집에 있던 삼성 에어컨을 사지 않겠다고 했더니 현관 비밀번호를 바꿔 버렸다. 이사 전에 물건을 옮기고 도배를 하려고 했는데 문을 열어주지 않아서 애를 먹었다. 또 청소업체를 불러 집 청소를 했는데 피톤치드 분사를 말했을 때 하겠다고 하지 않고 망설이고 있는데 제멋대로 분사를 했다. 서울에서 처음 만난 사람에게 꽤 마음이 상했다.
이사 후 2주간 짐을 정리하고 나니 갑자기 서울의 낯섦이 주는 스트레스가 확 올라왔다. 아는 사람 한 사람 없었고, 어디를 둘러보아도 낯선 곳이었다. 물건을 하나 사려고 해도 누군가에게 길을 물어야 했고, 집 밖을 나서면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밀려드는 쓸쓸함과 홀로 된 듯 한 낯섦이 우울로 돌아왔다. 망망대해에 혼자 서있는 듯했다. 카오스 혼돈의 도시 속에 갈길을 몰라 넋을 놓고 있는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노스탤지어, 향수병이 저절로 날 것 같았다. 이사 후 근 한 달 만에 일기를 썼는데 당시의 마음을 이렇게 적고 있다.
2월 21일 이사한 지 이주가 지났다. 그동안 어찌나 열심히 청소를 했던지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다. 아직도 멍한 정신상태, 이사를 앞두고부터 석 달 째인가? 이제 청소와 정리정돈을 마쳤으니 멍 때리기 상태에서 벗어나야 할 텐데...
첫째, 깍쟁이(자신이 불편하면 마구 불평불만을 터트리는 내가 보기에는 자기중심적인 사람) 서울 사람들의 정서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조금 걸릴 듯하다. 괜찮은 사람도 있겠지만.
둘째, 조금만 나가면 문화생활을 할 수 있으나 어딘지 몰라 헤매는 것이 재미있는 듯하면서도 신경 쓰이고 힘들기도 하다. 불편한 옷을 입은 듯, 내 집이 아닌 듯, 내 살 땅(곳)이 아닌 듯, 낯선 땅.
셋째, 이웃에 누가 사는지 알지도 못하고 엘리베이터에서 사람을 만나도 인사를 나누지 않는 삭막함.
낯선 환경과 낯선 사람들에게서 풍기는 낯섦이 조금은 설레기도 했다가 조금은 두렵기도 하다.
... 중략 (2011년 3월 7일 일기)
낯선 서울 살이에 적응하는 방법
극심한 우울함에 시달리다가는 정말 향수병이라도 걸릴 것 같았다.
어디든 나가보기로 했다. 이십여분을 걸어서 영동대교로 갔다. 남편에게 한강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어서 보냈는데 일하고 있던 남편은 우울한 얼굴 표정을 보고 덜컥 겁이 났다고 한다. 한강 다리에서 떨어져 내릴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한강을 바라보노라니 한강의 역사를 생각하게 되었다. 온조대왕이 백제를 세우기 이전부터 도도히 흘러서 이천 년 이상 모진 세월 풍파를 이겨내고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생각했다. 도도히 흐르는 한강을 바라보니 자연의 섭리가 느껴지고 서울 살이의 낯섦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메마른 서울살이를 한강이 위로라도 해준 듯 마음이 편안해졌다.
다음으로 서울에서는 자신의 요구에 대해서 예스와 노를 정확히 하기로 했다. 서울사람들은 지방에서 살던 사람들과는 달랐다. 이사할 때 인부들에게 점심을 사주고, 청소할 때 함께 청소하고 점심 사주고, 도배할 때 간식을 사다 줄 필요는 없었다. 그저 내 편하자고 하는 호의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인사하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서울살이였다. 사람들에게 하는 호의와 친절은 안 해줘도 되는 일이었다. 나중에 보니 다 그런 것은 아니었다. 서울살이에서 필요한 것은 친절이 아니라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거절하는 법, 요구하는 법,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전달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지방에서 살면서 인정에 묻혀서 혹은 관계가 틀어질까 봐, 또는 좋은 사람이라는 평판을 받기 위해서 했던 행동들을 조금은 바꿀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서울에서 살아남기 위해 '여행하듯 살자', '행복을 선택하자'라는 목표를 세웠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했을 때 도시에서의 낯섦을 떠올렸다. 멀리 미국으로 유학 간 조카가 가졌을 외국에 대한 거부감과 두려움, 차별과 멸시 등도 생각했다. 타향살이가 일으키는 익숙했던 것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에 대한 마음을 새롭게 바꿔보기로 했다. 이제부터는 서울을 제3의 고향으로 만들기로 했다. 언젠가는 서울살이가 그리워질 만큼 새로운 여행을 해보기 한 것이다.
구체적인 실천으로는 매일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 하나씩 하기(예를 들면, 예쁜 찻잔에 차 마시기), 운동하기, 공부하기, 실내정원 만들기, 서울 여행하기, 3년 안에 빚 갚기 등의 계획을 세웠다.
'서울을 여행하듯 사람들과 문화, 이 도시의 곳곳을, 숨 쉬는 공기를, 여행자인 듯 살아보자. 내가 행복할 수 있는 방법과 생각을 선택하자'라고 일기장에 썼다.
이사 후 한 달 반이 지나서 다시 일하게 되었다. 아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에서 보건교사 보조 교사를 뽑았다. 처음에는 탈락했는데 채용되었던 사람이 건강상의 이유로 퇴사하면서 보건교사를 하게 되었다. 이후에는 서울살이의 낯섦은 접어두고 조금씩 적응하며 지내게 되었다.
이사 과정을 생각하면 이사는 미리 계획하고 결정한 것이 아니다. 서울로 이사할 것이라고는 생각한 적도 없었는데 갑자기 결정하게 되었다. '가족이 모여서 살고 싶다.'라는 단순한 소망으로 시작했다. 이것저것 잴 것도 없었다. 선택의 시간은 짧았고 결정은 빨랐다. 보건교사로 일하게 된 것도 계획한 것이라기보다는 우연히 주어진 일이기도 했다. '아이들 가까이에서 일하고 싶다.'라는 작은 희망을 이룬 것뿐이다. 인생이란 어쩌면 작은 바람으로 시작해서 우연을 만들고 인연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 계획해서 이루어지기보다는 우연의 연속이라고 해야 할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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