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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Jan 26. 2024

핵, 예술가와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

살바도르 달리의 <비키니섬의 세 스핑크스>

1945년 8월 6일과 9일,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 '리틀보이'와 플로투늄탄 '핏맨'이 떨어졌다. 히로시마에서 즉사한 7만 명을 포함하여 1950년까지 2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한다. 상대적으로 조선인 피해가 더 컸다. 전쟁 중 강제 노역을 위해 일본으로 끌려간 약 67만 명 중 2만 명이 히로시마에서, 2천 명이 나가사키에서 죽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6년, 남태평양의 작은 섬 비키니섬에 다시 핵폭탄이 떨어졌다. ‘길다’와 ‘헬렌’이다.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1904~1989)의 <비키니섬의 세 스핑크스(1947)>는 이 실험에서 영감을 받았다. 구름버섯 모양의 핵폭발을 사람의 머리와 나무로 표현했다. 핵폭탄을 찬미한다는 견해를 밝힌 달리는 당시 대중의 욕망을 대변했다. 그의 한없이 가벼운 철학관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때의 대중적 열광은 핵의 후폭풍을 짐작조차 못 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제목 그림; 달리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초입방체(1954)>, 역설적으로 수학에 대한 이해는 깊어 4차원의 도형적 형태를 이해한 그림이다)



폴란드에서 이민을 온 마리 퀴리(Marie Curie, 1867~1934)는 앙리 베크렐로부터 우라늄 덩어리의 흔적이 사진판에 새겨지는 이유를 알아보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녀는 남편 피에르와 함께 어떤 암석은 상당한 양의 에너지를 일정하게 방출하면서 ‘베크렐 선(방사선)’을 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방사능’이란 말을 도입했고, 이런 물질을 ‘방사선 물질’이라고 불렀다. 이때 그녀는 두 종류의 원소를 발견했는데, 폴로늄과 라듐이다. 이후 어니스트 러더퍼드(Ernest Rutherford, 1871~1937)는 ‘반감기’와 함께 방사능이란 한 원소가 복사(빛)를 방출하면서 다른 원소로 변환되는 것으로 확신했다. 

하지만 그의 ‘방사선 붕괴 이론’이 발표된 이후 방사능은 예측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발전했다. 당시 많은 사람이 방사능을 신비로운 에너지원으로 여겨 몸에 좋은 작용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치약과 변비약에 방사성 토륨(Th)을 넣었다. 뉴욕주 핑거 레이크 지역에 있던 글렌 스프링스 호텔은 방사성 미네랄 온천으로 유명했다. 


1932년이 되자 영국의 물리학자 제임스 채드윅(James Chadwick, 1891~1974)이 원자핵에서 중성자를 분리하면서 핵물리학이 출발했다. 1938년 12월에는 독일의 오토 한(Otto Hahn, 1879~1968)과 프리츠 슈트라스만(Fritz Strassmann, 1902~1980)이 중성자를 우라늄 235의 원자핵에 충돌시키면, 질량수가 작은 바륨과 크립톤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해 생활용품에 방사성 물질의 사용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마리 퀴리에게는 너무 늦은 조치였다. 그녀는 1934년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역시 같은 해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했다. 리제 마이트너(Lise Meitner, 1878~1968)가 네덜란드를 거쳐 스웨덴으로 탈출했다. 60세의 유대인인 그녀는 여성 차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분투했던 물리학자다. 1939년 1월, 그녀는 오토 한의 연구를 바탕으로 우라늄 원자를 쪼개는 실험에 성공했다. 이때 급격한 연쇄반응을 일으키면서 핵분열이라고 알려진 파괴적인 과정, 즉 손실된 질량만큼 에너지를 외부로 방출한다. 아인슈타인의 E=mc2, 즉 질량이 에너지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현상으로, 이때 방출하는 막대한 에너지를 이용한 것이 원자폭탄과 원자로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과학자들의 관심이 급속히 핵 연쇄반응으로 옮겨갔다. 발견에서 발명의 단계로 넘어간 것이다. 재능 있는 젊은 과학자들이 핵물리학으로 몰려들었다. 그중 한 명이 미국의 오펜하이머(Julius Robert Oppenheimer, 1904~1967)다. 그는 1941년 겨울 무렵 착수에 들어간 맨해튼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뉴멕시코주 로스앨러모스에서 1년 예산 20억 달러를 쓰면서 만든 것이 바로 ‘리틀보이’와 ‘팻맨’이다. 독일과 영국도 핵무기 개발에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제한 사항이 너무 많았다. 전장 속 한가운데 있어 보안이 취약했고, 전비 충당에 급급하여 입자가속기를 비롯해 막대한 자금과 인력을 동원할 능력이 없었다. 

 

한편 전시 상황이 되자 과학자들은 자기 인생에서 중요한 질문이 생겼다. 격동하는 정세 속에서 과연 어떤 행보를 취해야 하느냐는 딜레마였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국가나 직책과 상관없는 개인적 가치관 문제로 귀착된다. 특히 나치 지배하 독일인 과학자들은 신념과 행동이 엇갈렸다. 

'아리안 물리학'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반면, 파울 오펜하임은 사재 일부를 털어 불운한 동료 유대인 과학자들이 나치 체제를 탈출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힘이 되어줄 수 없음에 안타까워만 했던 인물도 있었다. 고결한 인품과 책임감을 지녔던 막스 플랑크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무슨 업보였는지 그는 가정적으로 큰 비극을 맞았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큰아들 칼이 베르됭 전투에서 전사했고, 딸 그레테는 1917년 출산 중 사망했다. 1944년에는 둘째 아들 에르빈이 미수에 그친 히틀러 암살 계획에 연루되어 처형당했다. 

오펜하이머의 옛 동료이자 ‘백색 유대인'이라 불렸던 하이젠베르크는 이중성을 드러냈다. 그는 독일에 남아 전후 젊은이들을 가르쳐 독일 과학계를 재건하려 했다고 변명했다. 그러나 전력, 주변의 증언, 무엇보다 그의 강한 애국심을 고려해 볼 때 그가 독일 핵무기 개발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리라 추정한다. 그는 쓸쓸하게 말년을 보내다가 1976년,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임종하기 열흘 전 자신을 찾아온 칼 폰 바이츠재커에게 회한이 가득 찬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이제 물리학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 (…) 거기에 있었던 사람들. (…) 그들이 중요한 거야.” 


서른한 살에 노벨물리학상을 탄 천재 물리학자의 마지막 말로써는 매우 뜻밖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불행, 핵무기 개발과 관련해서는 승전국 편에 선 오펜하이머도 마찬가지였다. 1945년 7월 16일 최초의 핵폭발 실험에 성공한 후 이렇게 말했다. 핵 문제가 양심에서 비껴간 아인슈타인이 여덟 살 난 여자 아이들로부터 수학 숙제를 도와 달라는 공세를 받고 있을 때였다. 


“우리는 이제 세상이 전과 같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누군가는 웃었고, 누군가는 울었고, 대부분의 사람은 침묵했다. “나는 이제 죽음이 된다. 세상의 파괴자가 된다”던 힌두 경전인 바가바드기타의 한 구절이 기억났다.” (스티븐 호킹, <호킹의 빅 퀘스천에 대한 간결한 대답>)



그간 연재를 꾸준히 읽어 주신 많은 분들에게 감사 인사 올립니다. 다른 이야기로 곧 만나 뵙겠습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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