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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Jan 22. 2024

제1차 세계대전과 윤리의 확장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의 <군인으로서의 자화상>

제1차 세계대전은 예고된 전쟁이었다. 참전 군인들 대부분이 그해 크리스마스를 집에서 맞으리라고 가볍게 생각했다. 그러나 4년 넘게 동부와 서부 전선에서 7,000만 명 이상의 군인이 싸웠다. 그중 940만 명(13.5%)이 목숨을 잃었고, 1,540만 명이 다쳤다. 참혹한 전쟁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1차 대전의 연결선상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했다. 그래서 영국 역사가 에릭 홉스봄은 양대 전쟁을 묶어 ‘20세기의 31년 전쟁’이라고 했다. 돌이켜 보면, 독일 표현주의가 제1차 세계대전 전후 태어날 수밖에 없는 시대 상황이었다. 그들의 복잡한 고뇌를 담아내기 위해서는 형태를 왜곡하고, 색채를 해방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 드레스덴 공과대학에서 건축학을 공부한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 1880~1938)는 1905년 ‘다리파’를 결성했다. ‘현재를 더 나은 미래로 이어주는’ 다리로, 자연과 도시 풍경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키르히너는 기꺼이 참전했다. 전쟁이 부정한 사회를 심판할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그가 얻은 것은 처절한 고통뿐이었고, 약물 중독으로 인한 신경쇠약이었다. <군인으로서의 자화상(1915)>은 이런 고통 속에서 태어났다. 독일군 75연대 견장이 달린 군복과 모자, 키르히너의 초점 잃은 눈동자, 절단된 오른쪽 손목....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을 표현했다. '가장 위대한 반전 그림'이다. 그림 속 누드는 반문명, 반근대화를 상징하며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외침이다. (제목 그림은 또다른 표현주의 화가 오토 딕스의 <군인 모습의 자화상(1914)>이다)



전쟁은 불행한 일이지만, 변화의 동력이기도 하다. 앤드루 마는 <세계사>에서 “금속 가공과 바퀴, 승마술과 항해술, 수학과 셈법, 건축과 종교에서 이루어진 발전은 무력 대립에서 비롯되었다”고 증언한다. 제1, 2차 세계대전은 과학 전쟁이었다. 특히 과학이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2차 대전 이후 과학 연구에 대한 지원금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덕분에 과학은 놀라운 발전을 거듭했다. 그러나 경이로운 시선을 보내던 대중은 문득 깨닫는다. 과학기술에도 '좋은' 게 있고, '나쁜' 게 있다는 사실을. 

이런 조짐은 사실 일찌감치 발견되었다. 1888년 프랑스의 한 신문이 “죽음을 팔아 돈을 번 거부, 알프레드 노벨 사망하다.”라는 오보를 냈다. 형 루트비히 노벨의 죽음을 오인했던 것이다. 다이너마이트는 전쟁에 사용되었다. 하지만 더 많은 양이 세계 각국의 철도, 댐 건설 등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부고 기사를 통해 세상이 평가하는 자신의 실체를 알게 된 알프레드(Alfred Bernhard Nobel, 1833~1896)는 적이 당황했다. ‘노벨상’을 제정했고, 엄청난 재산을 모두 기부했다. 당연히 1896년 12월 10일 실제 부고 기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맹자가 말했다. 


"화살을 만드는 사람(矢人)이 어찌 갑옷을 만드는 사람(函人)보다 어질지 않겠는가? 그러나 화살을 만드는 사람은 사람이 상하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갑옷을 만드는 사람은 사람이 상할까 두려워한다. (....) 그러니 일은 신중하지 않을 수 없다."


과학자들은 불편할지 모른다. 과학을 선악의 개념으로 바라보는 그 시선이. 그러나 과학기술은 권력, 즉 양날을 가진 칼이 되었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과학기술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윤리 또는 인문학이 상대적으로 중요해지는 이유다. 특히 환경 문제는 그 후유증이 몇 세대가 지나 나타날 수 있다. 지구 나이 연구로 납 측정의 세계적인 권위자가 된 클레어 패터슨(Clair Cameron Patterson, 1922~1995)은 대기 중에 있는 납의 존재에 관심을 집중했다. 

납은 노폐물로 배출되지 않고 뼈와 혈액에 축적된다. 그는 빙핵(氷核) 연구를 통해 1923년 이전 대기 중에는 없던 납이 휘발유에 납을 사용함으로써 위험수위에 이르렀음을 알게 되었다. 환경보호가로 신분을 바꾼 그는 자본의 온갖 압력에 흔들리지 않고 1970년 청정대기법 제정을 끌어냈다. 이후 1986년 미국에서 모든 유연 휘발유 판매가 금지되었다. 그러자 미국인 혈액의 납 농도가 80% 감소했다. 하지만 이미 대기 중에 배출된 납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기에 오늘날 현대인의 혈액 속 납 농도는 한 세기 전 사람보다 625배나 더 높다.


미 캘리포니아주 클리어 호수에 모기 비슷한 ‘각다귀’가 살았다. 피를 빨아먹지 않고 성충이 되면, 아무것도 먹지 않고 산다. 한 마디로 인간에게나 동물에게 무해하다. 하지만 모기를 닮았고 귀찮게 한다는 이유로, 1949년부터 1957년까지 살충제 D.D.D를 뿌려 박멸했다. 각다귀가 보이지 않자, 모든 것이 잘 끝난 것 같았다. 그런데 이번엔 농병아리가 떼죽음을 당했다. 살충제는 호수를 오염시켰고, 플랑크톤을 먹은 농병아리의 죽음으로 이어진 것이다. 대한민국 ‘옥시 사태’는 레이첼 카슨 여사가 <침묵의 봄>에서 화학제의 위험을 경고한 지 50년이 지난 2011년에 발생했다. 임신부 5명이 급성 폐질환으로 사망하면서 사태가 시작되었다. 


인류의 관심을 모든 생명체로 확장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유전자 변형 문제도 경계를 소홀히 할 수 없다. 아! 기계도 포함해야겠다. 2017년 6월 페이스북 측에서 놀라운 소식을 전해왔다. AI(인공지능)가 자신들이 만든 언어로 대화를 나누었기에 시스템을 강제 종료했다. 언어는 호모 사피엔스가 먹이사슬 맨 위에 설 수 있게 한 동력이다. 이제 로봇이 인간보다 뛰어난 두뇌를 갖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로 여겨진다. 따라서 로봇이 인간의 단순한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리라는 기대는 그야말로 순진한 생각이다. 

그러나 차분하게 생각해 보라. 바둑에서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긴 것이 기계의 승리일까? 인간의 성취로 받아들이면 안 될까? 기계에 질투를 느끼는 대신, 로봇을 인간 친화적으로 대해야 한다. 2016년 인공지능의 선구자 마빈 민스키(Marvin Lee Minsky, 1927~2016)가 타계했다. 그는 "인간은 생각하는 기계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리고 덧붙여 말했다.


"장차 로봇이 지구를 물려받을 것인가? 그렇다. 하지만 서운해 할 것 없다. 그들이 바로 우리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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