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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Jan 16. 2024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와 과학기술에서 윤리의 탄생

높이 11.1cm, 석회암으로 만든 이 작은 조각상은 1909년 오스트리아 다뉴브강 강가 빌렌도르프에서 철도 공사를 하던 중 발견된 유물 중 하나다. 그래서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라고 불린다. 주변의 지층 분석을 통해 기원전 2만 5천 년에서 2만 년 사이 구석기시대의 유물임이 밝혀졌다. 가장 특징적인 점은 유방과 복부, 볼기 부위의 과장된 표현이다. 실제 모습처럼 만들지 몰라 그랬을까? 아니다. 출산을 상징하는 원시적인 주술의 도구, 혹은 숭배의 대상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가부장제가 정착하기 이전 모계 사회의 문화를 보여준다. 

구석기시대는 1만 년 전 신석기시대 이전 인류사의 99.8%를 차지한다. 주로 채집과 수렵으로 먹고살았다. 돌을 깨뜨리거나 떼어내서 도구로 사용했던 때임에도 조각상은 매우 정교하다. 우리는 유물을 오늘날의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홀대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고인돌(支石墓)을 보면, 들판에 큰 돌을 올려놓았을 뿐이다. 하지만 이면에는 인류가 죽음이라는 ‘추상’을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방증이다. 피카소는 1만 4천 년 전 스페인 알타미라 동굴벽화(대문 사진)를 보고 말했다.


“인류는 2만 년 동안 나아진 게 없구나.”


2,000년, 안톤 차일링거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를 암호화한 사진을 ‘앨리스’라는 컴퓨터로부터 광섬유를 통해 몇 채 떨어진 건물에 있는 다른 컴퓨터 ‘밥’에게로 전송했다. ‘밥’이 암호를 풀자 화려한 색조의 무작위적인 점이 작고 통통한 원래 모습이 완벽하게 재현되었다. ‘양자 텔레포테이션(Teleportation, 순간 이동)’으로, 암호화된 정보가 빛의 속도로 전달되었다. 

파인만이 제안했던 양자 컴퓨터의 기본이 되는 '양자 얽힘'에 충실한 현상이다. 얽힘은 두 개 이상의 입자들이 서로 연관되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한 입자에 일어난 변화가 다른 입자에 영향을 준다. 양자 컴퓨터는 반도체 대신 원자를 소재로 한다. 0과 1을 양자 중첩과 얽힘으로 다루면서 연산 속도와 처리 용량이 급격히 치솟는다. 세로 4m, 가로 2m의 절반 정도 크기의 장치로도 막대한 조합의 계산을 거의 무한으로 반복할 수 있다. 멀지 않은 장래에 슈퍼컴퓨터 성능을 지닌 양자 컴퓨터 칩이 상용화될 전망이다. 그러면 고도의 영상진단에 의한 질병의 조기 발견, 양자 보안, 그리고 수집된 빅데이터의 활용 등에 응용이 가능하리라 기대된다. 


과학과 기술은 오랜 세월 따로 발전해 왔다. 이때는 상호 보완성이 강조되었다. 과학은 이론 체계를 구축하여 기술의 진보를 촉진했다. 반면 기술은 실천적 노동으로, 문제 제기를 통해 과학이 발전을 자극하는 행태다. 처음에는 이 둘이 서로 어울릴 수 없는 사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발전 속도가 빨라지면서 오늘날에는 ‘과학기술’로 묶어 사용한다. 

20세기 말 등장한 내비게이션이 상징적이다. ‘전지구측위시스템(GPS, global positioning system)을 기반으로 하는데, 지구 주위에 인공위성을 띄우고 거기서 원자시계를 돌리는 기본 구조다. 위성을 발사하고 조정하는 원리는 뉴턴역학이다. 그리고 원자시계의 작동에는 양자역학이나 상대성이론을 통해 시간을 교정해야 한다. 


17세기 유럽에서 식민지 전쟁이 치열해지면서 군수공업이 발달했고, 그 영향으로 물리학과 수학이 중요해졌다. 기술의 유용성이 두드러지게 된 정점에는 산업혁명이 자리 잡았다고 할 수 있다. 기계가 인간의 근력을 대체하면서, 기술은 국가의 흥망성쇠와 직결되었다. 봉건제 뿌리가 약했던 영국에서 시작했다. 올리버 크롬웰의 철권정치 아래 공화제가 실시되었고, 근대적 경제질서가 조기에 확립되었다. 1776년 3월 22일, 뉴커먼 엔진을 개량한 증기기관이 탄생했다. ‘철의 족장’ 매슈 볼턴이 제임스 와트(James Watt, 1736~1819)를 금전적으로 후원했다. 그는 문필가 제임스 보즈웰을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선생, 이곳에서 나는 온 세상이 손에 넣기를 원하는 것을 팝니다. 바로 힘이지요.”


그렇다. 기술은 힘, 즉 권력이 되었다. 이언 모리스도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에서 같은 관점을 밝혔다. 동양은 서양보다 사회발전 지수에서 1,200년을 앞서다가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추월당했는데, 그 전환점이 바로 영국의 산업혁명이라는 주장이다. 뒤이어 프랑스와 독일이 산업혁명에 성공했다. 그러나 인류는 창조적이지만, 태생적으로 폭력적이기도 하다. 이때부터 대규모 노동력 착취와 이에 따른 인권, 그리고 ‘삶의 질’과 관련한 문제가 발생했다. 

식민지 개발 과정에서 전쟁은 더욱 파괴적으로 바뀌었다. 제1차, 제2차 세계대전 사이인 1920~1930년대 과학과 기술이 융합하기 시작했다. 국가가 주도하는 형태로 군사기술의 혁신이 일어났으며 그 결과 전투기, 잠수함, 전차 등 새로운 무기가 개발되었다. 자연스럽게 과학기술에서 윤리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이 개발한 독가스가 대표적이다. 


화학자 프리츠 하버(Fritz Haber, 1868~1934)는 제1차 세계대전 중 비인도적인 독가스를 제조하면서 사용 문제는 독일 정부의 선택이라고 강변했다. 1918년 독일 패전하여 전범으로 몰릴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오히려 그는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인공 질소 비료를 만드는 방법을 찾아내 맬서스의 인구론을 극복하고 유럽의 식량 위기를 해결한 공로다. 하지만 물리학자였던 아내 클라라 임머바르(Clara Immerwahr)가 1915년 하버와 다툼 끝에 권총으로 자살했다. 유대인인 하버 자신도 1933년 나치에 의해 공직에서 추방된 후 스위스 바젤의 한 호텔에서 자던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연합군 측에서도 독가스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 유용성을 인정, 개발에 착수하여 포스겐 가스를 독일군 참호에 뿌려 댔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전쟁보다 빠른 기술적 진보는 없었다. 특성상 이른 시일 내 효과를 보아야 해서 국가 주도로 엄청난 군사 예산을 쏟아부었다. 따라서 과학기술로부터 발생한 모든 후유증은 개인 혹은 국가가 탐욕에 천착하면서 생긴 부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정점에 위치한 것이 바로 핵무기 개발이다. 공부하면 할수록 광활한 우주에서 살아 있다는 자체가 기적이라는 사실을 자주 실감한다. 그 이상의 가치는 단언컨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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