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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Jan 05. 2024

<베르툼누스>와 속씨식물의 유혹

아르침볼도의 <베르툼누스>, 뒤러의 <큰 잡초 덤불>

주세페 아르침볼도의 <베르툼누스(1590)>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지배했던 카를 5세는 1556년에 친동생인 페르디난트 1세에게 신성로마 제국을, 아들 펠리페 2세에게 에스파냐를 넘겨주면서 모든 직위에서 물러났다. 1562년, 그 페르디난트 황제의 눈에 띄어 밀라노를 떠난 주세페 아르침볼도(Giuseppe Arcimboldo, 1527?~1593)가 서른다섯 살에 제국의 궁정화가가 되었다. 화가로써 유럽 최고의 지위에 올랐다는 의미다.

그는 빈과 프라하 궁정에서 작업을 했고, 페르디난트의 장남 막시밀리안 2세 때에 와서 마음껏 끼를 펼쳤다. 4계절 각각 절기에 맞는 각종 식물을 조합하여 유쾌한 이미지를 창조했다. 봄은 꽃, 여름은 과일과 채소, 가을은 포도와 곡식, 겨울은 잎사귀가 떨어진 나목(裸木)으로 인간을 형상화했다. 마침내 그의 대표작 계절의 신 <베르툼누스(1590)>를 완성했다. 하지만 이미지의 형상이 당시 황제 루돌프 2세(막시밀리안의 차남)의 얼굴이다. 그는 이 초상화를 과연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황제가 그림 속 모습으로 변장하고 축제에 등장했다. 작가의 상상력에 만족한 것이다. 예술을 사랑한 통치자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러고 보니 작품 속 식물도 생각할 줄 아는 인간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런 독특한 상상력은 아르침볼도가 죽자 이어지지 못했다. 4세기가 지난 후 초현실주의 작품에 와서야 비로소 유사성이 나타난다.



사실 식물은 동물보다 더 오랜 진화의 역사를 가졌다. 식물은 광합성이라는 혁명적 방법을 고안해 내 지구에 산소를 공급한다. 동물, 특히 산소가 있어야 하는 호기성(好氣性) 동물은 이 덕분에 생명을 유지한다. 그러나 인간도 포유류 동물이거늘 식물에 감사는커녕 의식 없는 무생물처럼 대한다. 과연 그 생각이 맞을까? 

지금으로부터 2억 5,000만 년 전 페름기 말에 '대멸종' 시기가 있었다. 모든 종의 95%가 사라진 것으로 추정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로부터 약 1억 년이 지난 쥐라기 말(약 1억 6,000만 년 전)부터 식물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꽃을 피운 뒤 씨를 안으로 맺는 속씨식물의 등장이다. 속씨식물은 오늘날 전체 식물의 약 90%를 차지한다. 동물과 공진화(共進化) 덕분이다. 이 갑작스러운 사건을 일러 찰스 다윈은 '지독한 신비'라고 했다.

 

보완 설명을 하자면, 2억 5,000만 년 전 대륙은 남극 근처에 '판게아(Pangaea, 초대륙)'라는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판게아는 20세기 초 알프레드 베게너(Alfred Wegener, 1880~1930)가 대륙 이동설을 주장하면서 내세운 가상의 원시 대륙이다. 여하튼 한 공간이기에 각자도생 하던 종(種) 간 경쟁이 치열해질 수밖에 없었다. 해안가에 있던 박테리아가 충분히 마른 후 양치류 종자식물로 발전해 판게아를 뒤덮고 있는 상황에서 중대한 변화가 도래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약 5,000만 년을 유지했던 판게아가 서서히 둘로 분리되었다. 1억 3,500만 년 전 무렵, 라우라시아(Laursia, 현재 북아메리카와 유럽, 그리고 시베리아 포함)와 곤드와나(Gondwana, 남반구로 다시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인도 대륙으로 갈라진다)로 완전히 나누어졌다. 식물과 동물의 공진화는 이 과정에서 생겼다고 보면 된다. 한편 대륙은 약 6,500만 년 전에 와서야 현재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벌새 한 마리가 꽃 앞에서 정지 비행한다. 벌 같이 생긴 새라 하여 벌새다. 하지만, 날갯짓은 오히려 벌보다 더 부지런하다. 초당 19~90번, 역시 꿀을 빨아먹기 위해서다. 이런 비행이 가능해지려면, 우선 몸집이 작아야 한다. (길이 약 5~21.5cm, 체중 1.8~24g) 그리고 엄청나게 먹어야 에너지를 유지할 수 있다. 따라서 벌새는 날마다 체중의 절반이 넘는 꿀을 먹기 위해 수백 송이의 꽃을 옮겨 다닌다. 벌새의 의지에서 촉발된 날갯짓일까? 거꾸로 식물이 유혹했다고 보면 무리일까? 실제 꽃은 꿀을 생산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특정한 곤충이나 새의 시각, 후각, 촉각 등을 자극한다. 아니, 유혹한다. 

어떤 낭상엽 식물은 파리를 잡아먹으려고 냄새까지 썩은 고기로 위장한다. 오프리스 난초는 암컷 곤충의 뒷모습을 닮은 꽃을 피워 '매춘란'이라 부른다. 루고사스와 티 같은 장미는 일본 딱정벌레에게 배를 채워주고, 자기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교미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원추리는 깊숙이 들어와 꿀을 실컷 먹고 나가는 작은 말벌에게 꽃가루를 흠뻑 뒤집어씌운다. (마이클 폴란의 <욕망하는 식물> 참조) 결정적으로 꽃은 열매를 수확할 때가 이르렀다는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열매가 성숙하기 전에는 그 모습을 숨기다가 씨앗이 단단해지면, 비로소 오렌지색이나 빨간색을 띤다. 동물의 눈에 잘 띄는 원초적인 색깔이다. 그리고 열매는 단백질과 함께 당분을 함유한다. 동물로부터 사랑받을 수밖에 없다.

 

한편 꽃이 핀 위치를 잘 기억하는 동물은 상대적으로 생존력이 뛰어나다. 식물은 당연히 먹이사슬 맨 위에 있는 인간도 이용하려 하지 않았을까? 번식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유리한데. 그래서 아름답게 꽃 피우는 것일 수 있다. 비약이라고? 곤충이나 새는 꽃을 보면서 인간처럼 감상하는 즐거움이 없다고 한다. 그럼, 굳이 수고스럽게 식물이 꽃을 아름답게 장식할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우연이라고 하기엔 매우 전략적이다. 

전략이라는 말에 거부감을 느낀다면, 등에와 초봄에 꽃을 피우는 잡초와의 예를 살펴보자. 등에는 벌보다 낮은 기온에서 활동한다. 따라서 추위가 가시지 않은 초봄의 잡초엔 등에의 도움이 절실하다. 하지만 등에의 결점은 꽃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소모적으로 꽃가루를 나른다. 그래서 잡초는 씨앗을 맺으려 서로 모여서 꽃을 피운다. 어느 한 지역에 집중적으로 출점하는 ‘도미넌트(dominant) 전략’을 빼닮았다. (이나가키 히데히로의 <식물학 수업>)



화가이면서 식물, 그것도 ‘하찮다’는 잡초를 주인공으로 그린 인물이 있었다. 바로 알브레히트 뒤러의 <큰 잡초 덤불(1503, 제목 그림)>이다. 17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풍경화, 정물화는 인물화처럼 독자적인 장르로써 대접받지 못 했다. 하긴 동물도 배경으로만 대했을 진데, 소리내지 못하는 식물은 생명 없는 바위나 돌과 다름없는 처지에 불과했다. 그러나 뒤러는 곤충의 시선에서 잡초를 바라보며 수채와 구야슈를 배합하여 마분지에 이미지를 옮겼다. 그가 위대한 예술가로 우뚝 선 배경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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