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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마 Oct 01. 2021

이직 한달 차, 또 이직을 결심하다 Ⅸ

줏대

줏대


   이 회사에서 일하면서 종종 나는 (아니 거의 매일) 남편에게 징징거렸다. 너무 힘들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실컷 만들어놓으면 이게 아니라고 한다. 다 없어진다. 오늘도 엎었다. 징징징징! 그럴때마다 남편은 내게 말했다.

  "걍 그럼 대충해! 대충하고 대표가 만든거 쓰면 되잖아. 뭐하러 열심히해서 고생해? 걍 대표가 하라는대로 해"

   늘 징징되는 나에게 남편은 답답하다는 듯 '하라는 대로 하면되지' 라고 했다.


  그래 말은 쉽지. 나도 대표가 원하는대로 해주고 싶었다. 전편에서도 말했듯이 대표는 내게 '본인 회사에서 왜 네 마음대로 하느냐' 라고 했다. '내가 하라는 대로 하면되지!' 라고. 진심으로 나는 대표가 원하는대로 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문제가 뭐냐면


  대표가 원하는 게 도대체 뭔지 모르겠다는 것


  그는 나를 툴러 취급하면서도 본인이 원하는 게 뭔지 정확히 모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설사 본인이 원하는 그대로 만들어줘도 (옆에 앉혀놓고 '여기에 이거 맞아요?' '이 컬러 맞아요?' 혹은 레퍼런스 준 것 카피수준으로 배껴줘도) 다음날 출근하면 없어져 있었다. 아니 출근하기도 전에 없어져 있었다. 이유를 물어보면 한결같이 하는 말들이 '친구들이 별로래' '와이프가 이상하대' '다시 보니까 이게 아닌 것 같아서' 아, 지금 쓰면서도 가슴 한 가운데가 너무 답답하고 토할 거 같다.

  그래, 취향이 줏대없이 매일, 아니다 1시간에 한번씩 바뀌는 거 그럴 수 있다고 치자. 본인 브랜드의 색깔도 정확히 정하지 못하는 대표를 백번 양보하고 이해해서 '그래 내가 직원인데 너무 고집을 부렸나!' 하고 넘어간다고 치자, 그래서 남편의 말대로 대표가 디자인한 것 그대로 사용한다고 하자. 그럼 어떻게 될까?

   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대표와 함께 사무실 1층 카페에 끌려가서

   "XX씨는 손이 너무 느려"

   "입사 한달인데 한게 없네"

   "할 수 있겠어? 손이 이렇게 느려서?"

   라며 갈궈진다. 달달 볶아진다. 그럼 컴퓨터 앞에 앉아서 멍해진다. 해서 뭐하나 또 아니라고 할텐데..

   기획안, 레퍼런스 백날 천날 요구하고 수없이 회의하고 해도 대표의 기분에 그날 바뀐 취향에 모든 작업물이 없어졌다.

   그런데 대표가 내게 묻는다.

  "왜 내 회사에서 니 마음대로 해?"

   

   그래 대표 니 마음 그대로 해줄게. 도대체 원하는 게 뭔데?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다. 일러스트를 그리고 대표에게 보여줬더니 또 똥씹은 표정과 함께 말했다.

   "컬러 형광색 다 빼. 이렇게 쨍한거 싫어"

   아!네! 하고 수정해서 가져다줬더니

   "컬러에 형광색 좀 더 넣어! 쨍하게!"

    어쩌라고 도대체 나보고?

   

    또 하루는 경쟁 브랜드의 인스타 광고를 들고와서 그대로! 아주 똑같이 만들어달라길래 컬러, 레이아웃, 폰트까지 아주 그대로 배껴줬다. (카피로 논란 생겨도 나는 몰라. 니가 엿대봐라) 다 만든 것 쓰윽 보고 아주 아주 맘에 든단다. 이걸로 오늘부터 광고 돌려야지! 라길래 다음날 물었다. 광고 돌리셨어요?

    "아니! 별로 인거 같아서 지웠어!"

    

    그래서 나는 대표에게 물었다. 대표님 원하시는게 도대체 뭐냐고. 매일 바뀌는 취향, 매일 바뀌는 컨셉 중에 도대체 뭘 원하시냐고. 그리고 위의 형광색 일화를 말했더니 대표는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나 그런 적 없는데?"


   대표는 거짓말도 주특기지만 우기기도 주특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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