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가깝게 지내던 친구와 심하게 다툰 적이 있었다.
그 친구가 좋은 이유는 분명했지만, 가깝게 지내기에 불편한 점도 분명 존재하였다.
그 불편한 점을 미처 몰랐던 바는 아닌데, 어느 순간 한계에 다 달았고 내가 거기에 문제 제기를 하면서 갈등이 시작되었다. 그때 그 아이가 말하는 바가 인상적이었다.
"내가 그런 면을 갖고 있다는 걸 아예 모르지는 않아. 그런데 그건 고쳐지지 않는 점이라, 그걸 네가 지적하면 내 존재가 부정당하는 느낌이 들어. 나는 '나'랑 계속 살아가야 하잖아."
말 자체가 이해 안 되는 건 아니었다만 참 이기적인 발언이라고 생각했다. 이 정도 문제제기는 할 수 있을 만큼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내 의견을 아예 받아들이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아예 듣지도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천명하는 그 아이와 나는 더 이상 대화를 이어나갈 수 없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나 스스로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일을 미루는, 그것도 상당히 심하게 미루는 버릇이 나에게는 꽤 어린 시절부터 있어왔다. 생각해 보면 수학 학습지며, 외국어 학습지며, 그림 그리기 과제며 독서과제며 모두 한가득 미뤄뒀다가 제출하기 전날 늦은 저녁에 되어서야 했던 것이다. 대학을 다닐 때에도 좋은 성적에 대한 욕심이 심했던 몇몇 시기를 제외하고는 항상 수 일 전부터 밤샘을 하곤 했다. (그마저도 밤을 잘 못 새워서 불완전한 밤샘을 하긴 했지만.)
직장인이 되고 나서도 이 버릇은 잘 고쳐지지가 않아서, 나는 분명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고 좋아하는 사람인데 그 인식과는 반대로 모든 일을 최대치로 미루고 나서야 시작하곤 했다.
처음에는 이런 나를 꽤나 갈궜다. 일을 시작하지 않고 미루는 순간에도 나를 비난했고, 일을 항상 급하게 함으로써 내 기준에 맞는 완성도를 뽑아내지 못하는 스스로를 또 힐난했다.
그러다 최근에는 이런 식의 비난이 나를 괴롭히기만 할 뿐, 오래된 습관을 고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비로소 알게 되었다. 스스로를 비난하고 괴롭히며 자책하느라 '에너지'만 소모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내가 나를 비난해 봤자 의미가 없다. 나는 나인채로 계속 살아야 한다.'는 식으로 생각이 흐르면서 수년 전에 저 친구가 했던 말이 떠오르는 것이다. 그때는 막연히 이기적이라고만 생각했던 말인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나보다 수년 앞선 똑똑한 깨달음은 아니었을까 싶다.
아무튼 나는 미뤄뒀던 일을 얼른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