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가게의 추억
저녁바람에 스미는 작은 가게의 기억
시골 마을 입구에는 오래된 구멍가게가 하나 있었다.
비포장도로 끝에서부터 흙냄새가 성큼 다가오던 그 길,
가게 앞마당에는 계절마다 다른 소리를 내는 느릅나무가 서 있었다.
봄이면 연둣빛 잎사귀가 바람에 파르르 떨렸고,
여름이면 짙은 그늘을 드리워
땀에 젖은 이들의 숨을 잠시 붙들어 주었다.
가게의 나무문은 세월을 견디는 법을 아는 듯
약간 쓸린 흔적이 있었고,
문고리는 작은 아이의 손에도 꼭 맞을 만큼 낮게 달려 있었다.
문을 밀면 울리던 종소리는
언제 들어도 마음 한가운데로 스며드는 작은 파문처럼 번졌다.
딸랑—
그 소리는, 한낮의 뜨거운 먼지를 식히고
저녁의 느린 햇살을 불러들이는 마법 같았다
하루가 느리게 흐르던 곳
가게 앞 평상에는
늘 누군가의 그림자가 들락거렸다.
아주 먼 옛날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쉬어가는 자리’였다.
농사일을 마친 어르신들은
구부정한 허리를 펴며 거칠어진 손바닥을 탁탁 털었다.
그 손바닥에서 쿵, 하고 떨어지는 흙먼지 소리조차
마을의 오후를 채우는 음악 같았다.
바람은 언제나 들판에서 밀려왔다.
보리향, 풀물, 햇빛에 익은 흙냄새가 뒤섞인 바람.
그 바람이 가게 처마를 스치고,
고무신 한 켤레를 굴리고,
포대자루에 붙어 있던 낡은 가격표를 흔들었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시계를 보지 않았다.
해가 어느 만큼 기울었는지,
개 짖는 소리가 어느 집에서 들려오는지,
또 바람의 결이 얼마나 부드러운지에 따라
하루의 끝을 짐작하던 시대였다.
아이들의 웃음이 머물던 공간
해 질 무렵이 되면
아이들은 하나둘씩 달려왔다.
맨발에 흙먼지가 하얗게 묻어 있었고,
웃음소리는 시냇물처럼 가볍고 투명했다.
가게 문을 열면
과자 냄새와 함께 살짝 눅눅해진 종이의 향이 났다.
할아버지는 늘 같은 자리에서
천천히 눈을 들고 말했다.
“오냐, 천천히 골라라.
여긴 급한 사람 없단다.”
그 말은 아이들에게 한 것이었지만
사실은 세상 모두에게 하고 싶은 말처럼 들렸다.
하늘이 주홍빛으로 물들던 저녁,
아이들은 쭈쭈바의 색깔을 비교하며 깔깔거리다가
금세 뛰어나가 들판으로 사라졌다.
그 뒤에 남은 것은
바람에 살짝 흔들리는 가게 처마의 그림자뿐이었다.
어느날, 조용해진 풍경
한참 시간이 지나 내가 다시 찾았을 때,
가게 앞 평상은 비어 있었다.
문도 닫혀 있었고,
느릅나무만 여전히 바람 속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마을의 길들은 그대로였지만
사람들의 발걸음은 방향을 잃은 듯 흩어져 있었다.
편의점이 마을 버스정류장 옆에 생긴 뒤부터
이 작은 구멍가게는 서서히 잊혀져 갔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작년에 도시로 나간 아들 집으로 옮겨가셨고
그 뒤로 가게는 문을 열지 않았다.
나는 문 앞에 서서
손바닥으로 나무문을 한 번 쓸어보았다.
예전엔 손톱만큼의 틈 사이로
비누 냄새와 종이 냄새가 스며 나오곤 했었다.
지금은 바람만이 그 사이를 드나들고 있었다.
바람은 예전과 똑같았지만
그 바람을 맞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사라져 있었다.
그 사실이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사라졌지만, 사라지지 않은 것들
시골의 풍경은
사람이 떠나도 천천히 변화한다.
들판 위에 남은 바람의 온도,
낡은 벽에 남아 있는 햇살 자국,
마당에 들이비치는 노을의 결이
모두 시간처럼 쌓여 있다.
구멍가게도 그랬다.
문은 닫혔지만,
그 안에서 흘러갔던 모든 계절,
모든 웃음과 한숨과 기다림이
아직도 풍경 속에 조용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리움이란,
사라진 것을 붙잡는 게 아니라
그것이 남겨 놓은 온도를 기억하는 일이라는 것을
그날에서야 깨달았다.
나는 가게 앞 평상에 잠시 앉아
노을이 들판 위에 내려앉는 것을 오래 바라보았다.
들숨마다 흙냄새가 천천히 스며들었고,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저녁의 문을 여는 듯 퍼졌다.
그 순간,
할아버지가 평상에 앉아 말하던 목소리가
바람 속에서 아주 흐릿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천천히 가도 된다.
세상 급하게 살 게 무엇이냐.”
가게는 사라져도, 그 자리는 여전히 따뜻하다
지금은 세상이 너무 빨리 돌아간다.
다들 바쁘고, 다들 목적지로 향하고,
길 위에서 느린 시간을 허락받기 어렵다.
그러나 시골 구멍가게 앞에서 흘러가던 그 시간은
사람들에게 잠시 쉬어갈 자리를 내어주었다.
그 기억은
아직도 내 마음 어딘가에서 바람처럼 움직이고 있다.
가게는 이제 문을 열지 않지만
나는 그 앞을 지날 때마다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고마웠습니다.
여기에서의 모든 여름과 가을과 겨울,
그리고 그 느린 저녁바람들.”
그곳은 사라지지 않았다.
풍경은 기억을 품고,
기억은 다시 사람의 마음을 품는다.
그렇게 작은 구멍가게는
오늘도 시골의 바람 속에서
아주 조용히 살아 숨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