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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살아야 100년인것을 (74)현재 부정

그때는 최선이었다

by seungbum lee

현재 부정
Q: 왜 "내가 이럴 줄 알았어"라고 말할까요?
A: 과거를 재해석하기 때문입니다. 해법은 "그때는 최선이었어"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책은 성장을 막습니다.


서른다섯의 윤재는 퇴근 후 조용한 골목을 따라 걸으며 스스로를 혼내는 버릇이 있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역시 또 이 모양이지.”
그 말은 오래된 상처처럼 그의 입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회사에서 진행하던 프로젝트가 경쟁 팀에게 넘어갔고, 상사는 담담하게 “준비가 부족했잖아”라고 말했다.
누가 들어도 마음에 칼끝이 닿는 말이었지만, 정작 그 칼을 더 깊이 찌른 건 본인이었다.
윤재는 조용한 횡단보도 앞에 서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겨울 저녁의 공기는 차갑고 투명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은 오래된 비바람이 몰아치는 듯했다.
“저번에도 그랬고, 이번에도…”
그는 자신에게 예언자라도 되는 듯 말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그러나 그 말 뒤에는 늘 같은 목소리가 숨어 있었다.
‘내가 왜 항상 이렇게 될까?’
‘왜 이렇게밖에 못 살까?’
그 순간, 버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피곤한 눈, 굳은 입꼬리, 무기력한 어깨.
마치 자신이 아닌 어떤 낡은 그림자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그날 밤, 윤재는 오랜만에 고향 집을 찾았다.
마당에 들어서자 낡은 감나무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여전히 부엌에서 조용히 저녁 찌개를 끓이고 있었다.
“와도 된다고 안 했는데?”
“생각 좀 하고 싶어서.”
“그래. 근데 얼굴이 무섭네.”
어머니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오래전부터 윤재를 지켜본 사람의 무게가 있었다.
식탁에 앉은 윤재는 별말 없이 밥을 먹었다.




그러다 문득 중학생 때 일이 떠올랐다.
모의고사 성적이 떨어져 분노한 아버지가 “이럴 줄 알았다”고 소리쳤던 날.
그때의 윤재는 울며 변명했다.
“할 만큼 했어…”
하지만 그 말은 아버지의 큰 한숨에 묻혔다.
어머니는 조용히 수저를 놓았다.
“넌 요즘 그 말 자주 하더라.”
“뭐가?”
“‘이럴 줄 알았어’라는 말.”
윤재는 움찔했다.
어머니는 마치 그의 머릿속을 보고 말하는 듯했다.




“넌 과거를 지금 눈으로 다시 보고 있는 거야.
그때 네가 한 선택들이 잘못된 게 아니라… 그냥 그때의 너에게는 그게 최선이었을 뿐이야.”
“최선…?”
“그래. 사람이 지나고 나서 결과를 보면 무엇이든 더 나은 선택을 떠올리게 돼.
그걸 후회라고 부르겠지.
근데 그건 지금의 너가 그때의 너를 심판하는 거야.
그럴 필요 없어.”
어머니의 목소리가 부엌의 노란 조명 아래서 잔잔하게 흘러갔다.
“실패를 예견했던 것처럼 말하는 건 자책하려는 마음 때문이야.
너는 그때마다 열심히 살았어.”
윤재는 말없이 국을 한 숟가락 떠먹었다.
따뜻함이 목을 넘어가면서 묘하게 오래된 고통을 적셔주는 느낌이 들었다.


이틀 후, 윤재는 회사로 돌아갔다.
회의실 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와 함께 팀원들의 웅성거림이 왔다.
상사가 말했다.
“이번 건은 다른 팀에서 가져가지만, 다음 프로젝트는 네가 리드를 맡아라.”
“제가요?”
“그렇지. 지난번에 부족했던 건… 노력의 문제가 아니라 상황 판단 문제였어.
네가 데이터를 다듬어온 과정은 누구보다 꼼꼼했어.”
윤재는 순간 어색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또 익숙한 말이 떠오르려 했다.
‘내가 또 실수하면…’
‘또 이럴 줄 알았다고 말하게 되는 건—’
하지만 어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다.
네가 노력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 문장이 그의 손목을 잡아 당기듯 가슴에서 떠올랐다.




윤재는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래. 그때는 최선이었어.”
그 말은 놀랍도록 부드러웠다.
오랫동안 잠겨 있던 문이 조용히 열리는 느낌.
스스로를 감옥에 가두던 열쇠를 자신에게 돌려준 순간이었다.
그날 저녁, 그는 사무실 옥상에 올라 도시의 불빛을 내려다보았다.






바람이 그의 머리칼을 스쳤다.
빛이 도로 위에서 길게 흘렀다.
도시는 늘 그랬듯 무심하게 아름다웠다.
“난 지금도 최선을 하고 있어.”
그는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때도 그랬어.”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자
그동안 자신을 가두던 그림자가 한순간 옅어지는 것 같았다.




한 달 later, 윤재의 팀은 새로운 프로젝트의 초기 검증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상사는 말했다.
“좋아. 이건 네 주도로 계속 밀어가라.”
그 말을 들은 윤재는 순간 예전처럼 무겁게 굳어질 뻔했지만, 곧 스스로를 붙잡았다.
‘이럴 줄 알았어’라는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대신 차분한 생각이 자리했다.
과거는 실패가 아니라 과정이었다.
스스로를 심판하는 목소리를 내려놓자, 비로소 배울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오래전에 멈춰 있던 시계가 다시 흐르는 것처럼,
모든 것이 새롭게 움직이는 느낌을 받았다.
퇴근길의 지하철 창문에 비친 자신의 눈빛이 달라졌다.
피하지 않고, 움츠리지 않고,
자신을 조금은 온기로 바라보는 눈빛.
“괜찮다.”
그는 낮게 웃었다.
“나는 그때도 지금도… 늘 최선을 다하고 있다.”
겨울 끝자락의 바람이 도시의 건물 사이를 지나며 조용히 귓가를 스쳤다.
그리고 그 순간, 윤재는 깨달았다.
자책을 끝내는 순간,
비로소 사람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그는 그 길 위에 첫 발을 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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