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방식으로 깨달아야 하는 이유
조언 무시
Q: 왜 좋은 조언을 들어도 실천 안 할까요?
A: 스스로 깨달아야 믿기 때문입니다. 해법은 조언을 듣고 "이걸 내 방식으로 적용하면?"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완벽한 복사가 아니라 맞춤 적용.
나만의 방식으로 깨달아야 하는 이유
닳아버린 충고의 메아리
찬 바람이 코끝을 시리게 하던 늦가을 오후, 서울의 어느 허름한 옥탑방. 서른을 막 넘긴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 윤재는 무거운 한숨과 함께 낡은 노트북을 닫았다. 화면 속에는 온갖 클리셰와 미완성 캐릭터로 뒤덮인, '삼류' 딱지가 붙을 것이 뻔한 그의 일곱 번째 초고가 깜빡이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그의 멘토이자 충무로의 잔뼈 굵은 감독인 강 감독의 자필 쪽지가 놓여 있었다.
윤재야. 이번 작품의 핵심 문제는 이거야. 네 시선이 너무 '나'에게만 머물러 있어. 관객에게 닿으려면, 세상을 읽는 보편적인 감정에 집중해야 해. 제발 밖으로 나가. 사람들을 만나. 네 좁은 방에서 벗어나.
윤재는 그 쪽지를 구겨 쓰레기통에 던졌다.
지난 3년간, 강 감독이 그에게 해준 조언은 수백 가지였다.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만들어라," "갈등 구조에 숨 쉴 틈을 줘라," "엔딩은 예측 불가능하게." 그리고 항상 빠지지 않는 레퍼토리, "좁은 방에서 벗어나라."
'좋은 조언인 건 알지, 왜 모르겠어.' 윤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그건 내 이야기가 아니라 강 감독의 이야기가 될 뿐이야. 그의 성공 방식을 완벽하게 복사한다고 해서 내가 성공할 수 있을까? 결국 난 또 다른 강 감독의 아류작을 만들겠지.'
그의 머릿속에는 모순적인 생각들이 뒤섞여 있었다. 좋은 조언이라는 이성적 판단과, 그것을 그대로 따랐을 때 자신의 고유성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는 조언을 들을수록, 오히려 자신의 방식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을 강화하고 있었다.
"왜 나는 남들이 좋다고 하는 조언을 실천하지 못할까?" 그는 스스로에게 질문했지만, 대답은 언제나 '불가능'이라는 먹구름뿐이었다. 조언은 허공을 떠도는 메아리처럼 그의 귓가만 맴돌 뿐, 그의 깊은 내면까지는 스며들지 못하고 튕겨져 나왔다.
조언과 현실 사이의 불협화음
윤재는 강 감독의 조언을 '무시'하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이른 새벽부터 종로의 한 오래된 도서관을 찾았다. 심리학, 철학, 자기계발서를 뒤적이며 그는 하나의 문장을 발견했다.
"인간은 타인의 지혜를 이성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으나, 그것을 '나의 진실'로 내면화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스스로의 경험을 통한 깨달음이 필요하다."
'스스로의 경험... 깨달음...' 윤재는 멈춰 섰다. 그래, 그는 강 감독의 조언이 옳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조언이 자신의 인생이라는 캔버스에 어떤 물감으로 칠해져야 할지는 알지 못했다. 조언은 강 감독의 깨달음이었지, 윤재의 깨달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날 저녁, 윤재는 강 감독이 일하는 영화 촬영장 근처의 포장마차로 향했다. 그는 강 감독에게 자신의 솔직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감독님, 감독님 조언이 틀렸다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그걸 그대로 따라 하면 제가 망가질 것 같아요. 제가 아닌, 감독님의 꼭두각시가 될 것 같아서... 자꾸만 반발하게 됩니다."
강 감독은 소주잔을 내려놓고는 씁쓸하게 웃었다.
"하하, 네가 이제야 그 질문을 하는구나."
강 감독은 그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며 말했다. "나는 너에게 내 성공 방식을 복사하라고 가르친 적 없어. 좋은 조언을 듣고 그것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은, 사실 아무런 생각 없이 지름길만을 찾는 게으름과 다를 바가 없다."
"해법은 '이 조언을 내 방식대로 적용하면?'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강 감독은 힘주어 말했다. "나는 너에게 '방에서 나가라'고 했지만, 그건 너의 캐릭터를 살리기 위한 재료를 모으라는 뜻이었지, 네가 당장 대중교통을 이용해 전국 여행을 떠나라는 뜻이 아니었어."
"네 방식대로 적용하는 것...?" 윤재는 그 말이 낯설면서도, 가슴속 깊은 곳을 울리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완벽한 복사에서 맞춤 적용으로
강 감독과의 대화 후, 윤재는 처음으로 '강 감독의 조언을 듣고, 그걸 나의 방식으로 변형시키는 실험'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강 감독의 조언: "좁은 방에서 벗어나, 보편적인 감정에 집중하라."
윤재의 '맞춤 적용': 그는 당장 여행을 떠나는 대신, 자신의 좁은 옥탑방을 무대로 하여, 가장 좁고 일상적인 공간에서 느껴지는 보편적인 감정—고립감, 희망, 좌절—을 포착하기로 했다.
그는 옥탑방의 낡은 계단을 캔버스로 삼았다. 매일 아침, 옆집에 사는 택배 기사 아저씨가 힘겹게 짐을 나르는 소리,
늦은 밤 아래층 편의점 알바생이 올려다보는 밤하늘의 시선, 옥상에서 키우는 화분에 매달린 이름 모를 벌레의 삶.
그는 밖으로 '나가는' 대신, 좁은 방 안에 들어오는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제야 그는 강 감독의 조언이 단지 '물리적인 이동'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시선의 확장'**을 의미했음을 깨달았다. 그의 시야는 방 밖의 세상을 향하지 않았지만, 방 안으로 침투하는 세상의 진동을 섬세하게 포착하기 시작했다.
며칠 후, 그는 택배 기사 아저씨가 계단을 오르내리는 소리에서 영감을 받은 단편 시나리오의 첫 문장을 써내려갔다.
“낡은 계단은, 모든 짐을 짊어진 삶의 무게를 아는 듯이 삐걱거렸다. 그 소리는 고통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묵직한 응답이었다.”
이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이전의 글은 윤재 자신의 공허한 절규였지만, 이 글은 택배 기사의 삶이라는 구체적인 현장에서 끌어낸, 윤재의 시선으로 재해석된 보편적인 감정이었다.
나만의 진실을 품은 조언
윤재는 단편 시나리오를 완성했고, 강 감독에게 보냈다. 며칠 뒤, 강 감독에게서 온 연락은 예상 밖이었다.
"이거... 네가 썼다고? 어쩌면 좋아. 이거 냄새가 나. 네 냄새."
윤재는 가슴이 떨렸다. "냄새라뇨, 감독님?"
"전에는 네 글에서 내가 준 조언의 향기만 났어. 좋은 향기지만, 네 본연의 체취는 아니었지. 그런데 이 단편은 달라. 여전히 좁은 공간이 배경이지만, 그 안에는 너만의 방식으로 세상의 무게를 담아낸 '윤재'라는 작가의 진실이 담겨있어."
강 감독은 전화를 끊기 전 마지막 말을 남겼다. "조언을 무시하는 건 나쁜 습관이야. 하지만 조언을 무작정 복사하는 것도 결국 너의 성장을 가로막는 습관이야. 너는 이제 알았구나. 좋은 조언은, 완벽한 복사가 아니라 나에게 맞는 맞춤 적용을 통해 비로소 나의 깨달음이 되는 것을."
며칠 후, 윤재는 자신의 옥탑방 창문을 활짝 열었다. 좁은 방 안으로 신선한 가을 공기가 스며들어왔다.
그는 노트북을 켜고, 새로운 장편 시나리오의 제목을 적었다.
《계단의 응답》
그의 시선은 더 이상 불안하지 않았다. 강 감독의 조언을 완전히 흡수한 것도 아니었고, 완전히 거부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이제 조언을 듣는 동시에, "이것을 내 방식대로 어떻게 변형하고, 내 삶의 지도를 어떻게 그릴까?"를 고민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윤재는 깨달았다. 우리가 좋은 조언을 듣고도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조언을 자신이 깨달은 진실로 만들기 위한 ‘재해석’의 과정이 빠져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언은 타인이 던져준 씨앗일 뿐, 그것이 나의 땅에서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나만의 토양과 나만의 물주기 방식이 필요했다.
윤재는 이제 더 이상 조언을 무시하지 않았다. 대신, 모든 조언을 자신만의 필터로 걸러내고, 새롭게 탄생시키는 과정을 즐겼다. 옥탑방 창문 너머로 보이는 서울의 빌딩 숲은, 이제 그에게 더 이상 고립의 상징이 아닌, 무궁무진한 영감의 재료가 담긴 거대한 시나리오 창고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마침내, 타인의 지혜를 자신의 힘으로 바꾸는 법을 배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