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전령
낙엽 한 잎에 담긴 그리움
가을의 전령
바람이 한 잎의 낙엽을 내 발밑에 내려놓았다. 노란빛과 붉은빛이 섞인 그 작은 잎사귀는 한때 푸르렀을 날들의 기억을 품고 있었다. 나는 한참을 그 낙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문득, 누군가가 떠올랐다.
세상을 구하려 했던 사람. 찬란한 봄의 약속과 뜨거운 여름의 열정을 모두낙엽 한 잎에 담긴 그리움 쏟아부었던 사람. 이제는 헐벗은 나뭇가지처럼 외로이 서 있을 그 사람의 모습이 낙엽 한 잎 속에서 어른거렸다.
봄과 여름을 바친 이들
우리는 모두 봄에 태어난다. 새싹처럼 연약하고 희망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이 세상을 맞이한다. "나는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겠어." 누구나 한 번쯤 품어보았을 꿈. 그 순수한 다짐을 가슴에 품고 우리는 자라난다.
여름이 오면 그 다짐은 행동이 된다. 뜨거운 햇살 아래서 땀 흘리며 달려간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아픔을 보면 외면하지 못하고, 누군가의 눈물을 보면 함께 울어주고 싶어서, 우리는 찬란하게 불타올랐다.
그런데 문득 가을이 온다.
세상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완고하고, 사람들은 우리가 기대했던 것보다 무관심하고, 변화는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디다. 봄날의 약속은 희미해지고, 여름의 열정은 시들어간다. 손에 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만 같다.
그래도 우리는 나뭇가지 끝에 매달려 있다. 헐벗어가는 나무들처럼 벌거벗어가지만, 그래도 끝까지 매달려 있다. 왜일까? 무엇이 우리를 붙들고 있을까?
낙엽의 깊은 뜻
낙엽은 안다. 자신이 떨어지는 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의 몸이 부식되어 흙이 되고, 그 흙이 다시 나무의 양분이 되어, 새로운 봄을 준비한다는 것을.
낙엽은 스스로를 불태운다. 찬란했던 초록빛을 포기하고, 노랗게, 붉게 타오르다가, 결국 땅으로 돌아간다. 그것은 패배가 아니다. 그것은 희생이다. 그것은 다음 세대를 위한 헌신이다.
나뭇가지 끝에 마지막까지 매달려 있는 낙엽들을 보라. 그들은 벌거벗어가는 나무에게 말하고 있다. "새봄은 꼭 온다." 쓸쓸한 겨울의 풍경 속에서도, 차가운 바람이 매섭게 불어와도, 그들은 마지막까지 그 자리를 지키며 희망의 전령이 되어준다.
그리고 마침내 떨어질 때, 그들은 가장 아름다운 춤을 춘다. 하늘에서 땅으로 이어지는 그 짧은 순간, 그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는 평화를 경험한다. 그것은 비움이고, 내어줌이고, 완성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
지금 이 시대는 혹독한 가을을 닮았다.
청년들은 미래를 꿈꾸기보다 생존을 걱정한다. 중년들은 경쟁에 지쳐 서로를 바라볼 여유를 잃었다. 노년들은 자신이 일구어온 세상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불안해한다. 우리는 모두 어딘가 벌거벗어가는 나무처럼 헐벗은 채로 서 있다.
세상을 구하려 했던 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환경을 지키겠다던 활동가는 거대기업 앞에서 무력감을 느낀다. 교육을 바꾸겠다던 교사는 시스템의 벽 앞에서 좌절한다. 정의를 실현하겠다던 법조인은 현실의 타협 속에서 회의에 빠진다.
그들은 찬란한 봄과 뜨거운 여름을 보냈다. 그런데 가을이 왔고, 이제 그들은 나뭇가지 끝에 겨우 매달린 낙엽처럼 흔들리고 있다.
그러나 새봄은 온다
하지만 낙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 있다.
첫째, 떨어지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순환의 일부라는 것. 우리의 노력이 당장 결실을 맺지 못한다 해도, 그것은 다음 세대를 위한 자양분이 된다. 내가 흘린 땀과 눈물, 내가 견뎌낸 좌절과 실망, 그 모든 것이 헛되지 않다. 그것들은 흙이 되어 새로운 생명을 키울 것이다.
둘째, 끝까지 매달려 있는 것의 가치. 세상이 차갑고, 바람이 거세고,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처럼 보일 때도, 우리가 그 자리에 있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다. "새봄은 꼭 온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전령으로서, 우리는 존재해야 한다.
셋째, 불태우는 것의 아름다움. 낙엽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떨어지기 직전이다. 초록빛을 벗고 온통 노란빛과 붉은빛으로 타오를 때, 그들은 가장 찬란하다. 우리도 그렇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신을 불태울 때, 우리는 가장 아름답다.
그리움의 의미
나는 낙엽 한 잎을 보며 누군가를 그리워한다.
세상을 구하려다 지쳐버린 친구. 이상을 품었다가 현실 앞에서 무너진 선배. 정의를 외치다가 침묵당한 동료. 그들은 어디쯤에서 흔들리고 있을까?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그들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이 떨어졌다 해도,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의 헌신은 우리 모두의 자양분이 되었다는 것을.
그들을 그리워한다는 것은, 그들이 품었던 꿈을 기억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불태웠던 열정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전하려 했던 메시지, "새봄은 꼭 온다"는 희망을 계속 이어가겠다는 다짐이다.
벌거벗어가는 나무들에게
이 시대의 모든 벌거벗어가는 나무들에게 말하고 싶다.
당신이 잎을 잃었다 해도, 당신은 여전히 나무다. 당신의 뿌리는 땅속 깊이 내려가 있고, 당신의 가지는 하늘을 향해 뻗어 있다. 겨울은 춥고 길지만, 그것은 영원하지 않다.
당신이 흘렸던 땀, 당신이 견뎌냈던 고통, 당신이 불태웠던 열정, 그 모든 것이 지금 땅속에서 새봄을 준비하고 있다. 당신은 보지 못할지라도, 당신의 헌신은 이미 씨앗이 되었다.
그러니 조금만 더 견디자. 나뭇가지 끝에 매달린 마지막 낙엽처럼, 우리도 끝까지 우리 자리를 지키자. 그리고 떨어질 때가 오면, 가장 아름다운 춤을 추며 떨어지자. 우리의 몸이 흙이 되어 다음 세대의 양분이 될 것을 믿으며.
낙엽이 된다는 것
결국 우리는 모두 낙엽이 된다.
찬란했던 봄의 약속도, 뜨거웠던 여름의 열정도, 언젠가는 가을의 빛깔로 물들고, 겨울 앞에서 떨어진다. 그것은 슬픈 일일까? 아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필요한 일이고, 아름다운 일이다.
낙엽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시간을 다했다는 것이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다는 것이다. 이제 다음 세대에게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낙엽 한 잎을 손에 들고 나는 생각한다. 나도 언젠가 이렇게 떨어질 것이다. 세상을 구하려던 거창한 꿈은 이루지 못한 채, 작은 낙엽 한 잎처럼 땅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 내가 초록빛으로 빛났던 시간이 있었고, 광합성을 하며 산소를 만들어냈던 순간이 있었고, 누군가에게 그늘이 되어주었던 기억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새봄을 믿으며
오늘도 나는 창밖의 나무를 바라본다. 벌거벗어가는 그 나무는 처량해 보이지만, 동시에 꿋꿋해 보인다. 마지막 남은 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말하고 있다.
"새봄은 꼭 온다."
그렇다. 새봄은 꼭 온다. 역사가 그것을 증명했고, 자연이 그것을 약속한다. 아무리 긴 겨울도 영원하지 않다. 아무리 깊은 어둠도 새벽을 막을 수 없다.
세상을 구하려다 지친 이들이여, 찬란한 봄과 여름을 보내고 이제 헐벗은 가지 끝에 매달린 이들이여, 조금만 더 견디자. 우리의 헌신은 헛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불태운 열정은 다음 세대의 따뜻함이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떨어질 때, 우리는 가장 아름다운 춤을 추며 떨어지자. 두려움 없이, 후회 없이, 평화롭게. 우리의 몸이 흙이 되어 새로운 생명을 키울 것을 믿으며.
낙엽 한 잎에 담긴 그리움. 그것은 과거에 대한 애틋함이면서 동시에 미래에 대한 희망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세상을 구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들의 봄과 여름이 결코 헛되지 않기를, 그들의 가을이 아름답기를, 그들의 겨울 뒤에 반드시 새봄이 오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나 역시, 오늘도 나뭇가지 끝에 매달려 흔들리며, 희망의 전령이 되기로 한다. 새봄은 꼭 온다고, 우리의 헌신은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작은 목소리로 계속 말하기로 한다.
낙엽 한 잎이 바람에 날려간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