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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살아야 100년인 것을(73) 의존성

점심의 무게

by seungbum lee



의존성
Q: 왜 타인의 승인을 받아야 행동할까요?
A: 자신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해법은 작은 결정부터 스스로 내리는 것입니다. 오늘 점심 메뉴부터 시작하세요.



승인 없이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
서울 도심의 겨울은 유난히 회색이었다. 새벽부터 깔린 미세먼지는 창밖 건물들의 가장자리를 흐릿하게 덮어, 모두가 어딘가로 사라져 가는 듯한 느낌을 주곤 했다. 송도윤은 13층 사무실 창가에 서서 그 흐릿한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도윤 씨, 오늘 보고서 최종 버전 김 부장님께 확인받았어요?”
맞은편 자리의 선배, 전혜린이 묻자 도윤은 움찔하며 돌아섰다.
“아… 아뇨. 아직요. 초안은 괜찮다고 하셨는데… 수정본도 보여드리는 게 좋겠죠?”
“스스로 괜찮다고 판단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혜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도윤의 목이 잔뜩 굳어졌다.





“그래도 혹시… 제가 잘못 판단했을 수도 있으니까요.”
혜린은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미 여러 번 들어본 문장이었기 때문이다. 도윤은 늘 그랬다. 점심 메뉴를 고를 때도, 회의 발언을 준비할 때도, 옷 색깔을 선택할 때마저도 누군가의 ‘맞다’는 확인 없이는 움직이지 못했다.




그는 사람들은 ‘자기 확신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가볍게 말하지만, 사실 그 말은 그의 삶 전체를 뒤덮는 그림자였다.



작은 결정에도 떨려오는 손
그날 오전, 팀 회의가 열렸다. 회의실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도윤은 프레젠테이션 자료가 든 노트북을 쥐고 손가락을 계속 어루만지고 있었다.
김 부장이 말했다.
“이번 제안 관련해서 디자인 방향은 대부분 결정됐습니다. 단, 마지막에 넣을 사용자 사례는 도윤 씨가 이야기한 두 개 중 하나로 정해야겠어요. A 사례? 아니면 B 사례?”
도윤은 갑작스럽게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소리를 들었다.
머릿속에선 이미 수십 번 시뮬레이션한 내용이었지만, 막상 선택의 순간이 오자 그의 입은 심하게 말라붙었다.
“저는… 음…”
그는 주변 시선을 살핀다. 팀원 모두가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도윤의 가슴속에서 불편한 압박감이 차오른다.
‘내가 잘못 선택하면… 팀 성과에 영향이 생기면… 다들 실망하겠지. A가 맞는 걸까? 아니면 B가 더 안전한 선택일까?’
도윤의 눈동자가 조용히 흔들렸다.



결국 그는 단호한 대신 안전한 말을 택했다.
“… 부장님께서 보시기엔 어떤 게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김 부장은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도윤 씨 의견을 묻는 겁니다. 책임도요.”
회의 후, 그는 자리로 돌아와 의자에 몸을 묻으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뒷목을 잡자 굳은 근육이 단단히 뭉쳐 있었다.


점심 메뉴 하나의 의미
점심시간이 다가왔다. 팀원들이 하나둘 모여 엘리베이터 앞에 모이기 시작했다.





혜린이 물었다.
“도윤 씨, 오늘 뭐 먹을래요?”
순간 도윤의 머릿속은 텅 비었다.
점심 메뉴. 단지 점심 메뉴였다.
하지만 그는 또다시 가슴이 조여 오는 느낌을 느꼈다.
‘내가 선택하면 누군가 불만이 생길 수도 있어. 너무 매운 걸 고르면 매운 걸 못 먹는 팀원은 어쩌지? 밥집이 붐비면 시간 낭비라고 누가 속으로 짜증낼지도 모르고….’
그래서 그는 평소처럼 대답했다.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다들 드시고 싶은 걸로…”
이번에도 팀원들은 익숙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대부분이 좋아하는 파스타집으로 갔다.




식탁 위에서 뜨거운 크림 파스타 향이 퍼졌다. 모두의 대화가 가볍게 오가며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도윤은 조용했고, 포크를 쥔 손에는 미세한 떨림이 있었다.





그때였다. 맞은편에 앉은 혜린이 갑자기 말했다.
“도윤 씨, 오늘 메뉴 고르기 힘들었어요?”
한순간 공기가 고요해졌다.
도윤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네?”
“아무거나 괜찮다고 늘 말하잖아요. 근데 그게… 사실 괜찮은 게 아닌 것 같아서요. 매번 누군가가 먼저 선택해 주길 기다리는 것처럼 보여요.”
도윤의 마음이 깊게 흔들렸다.
비난은 아니었다. 진심으로 걱정하는 목소리였다.
“혹시… 스스로 결정하면 누가 뭐라고 할까 봐 그래요?”
혜린의 질문은 정확했다. 너무 정확해서 가슴이 조였다.
도윤은 처음으로 입술을 열었다.




조용히, 그리고 어렵게.
“맞아요… 그냥… 틀리면 안 될 것 같아서요. 내가 선택한 게 누군가에게 불편함을 줄까 봐.”
혜린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도윤 씨가 뭘 선택하든 대부분은 그걸 그저 ‘도윤 씨의 선택’으로 받아들일 뿐이에요.”
잠시 후 혜린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점심 메뉴 정도는… 스스로 골라도 괜찮아요.”
말은 정말 단순했지만, 도윤의 심장 깊은 곳에 작은 충격처럼 박혔다.


‘오늘 점심부터’라는 작은 결심
며칠 후 금요일 아침, 회사 분위기는 주말을 앞둔 들뜬 기운이 섞여 있었다.
도윤은 출근하자마자 모니터를 켜고, 잠시 손을 깍지 낀 채 책상 위에서 깊은숨을 들이켰다.
‘오늘은… 작은 것 하나만 해보자. 아주 작은 것.’
오후가 되자, 팀원들이 다시 점심 이야기를 꺼냈다.
“오늘 뭐 먹을까?”
“도윤 씨, 아무거 나죠?”
평소처럼 대답이 튀어나올 뻔했다.
But—
도윤은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손끝이 작게 떨렸다.
그는 속으로 말했다.
오늘 점심 메뉴부터 스스로 고르기.
그 단순한 문장이 그의 마음속에서는 산을 넘는 일처럼 무겁게 느껴졌지만, 동시에 꼭 부딪혀야만 하는 벽처럼 생각됐다.
그는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말했다.




“… 저는 오늘 김치가락국수 먹고 싶습니다.”
조용한 정적이 흘렀다.
팀원들이 도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심장이 쿵, 쿵 뛰었다.
하지만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웃으며 말했다.
“오! 좋다.”
“갑자기 가락국수 당기네.”
“거기 근처에 맛집 있잖아.”
세상은 아무도 그의 결정을 탓하지 않았다.
아무런 비난도, 짜증도 없었다.
도윤은 그 사실에 놀라며 조용히 웃었다.
식당에서 따끈한 국물 향이 올라올 때, 그는 그릇을 앞에 두고 뜨거운 공기를 천천히 들이켰다.
국물은 단순히 맛있는 음식이 아니라, 그에게 ‘스스로 선택한 결과’로 다가왔다.
숟가락을 들며 그는 생각했다.
내가 나에게 묻고, 내가 대답하는 일.
그것이 무너져 있던 그의 중심에 아주 작은 돌 하나를 다시 놓는 듯한 기분을 줬다.
점심 이후, 회의에서 그는 어제 완성한 디자인 의견을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A 사례가 더 직관적이고 사용자에게 더 명확할 것 같습니다.”
김 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 방향으로 갑시다.”
그 순간 도윤은 희미하게 숨을 내쉬었다.
세상은 생각보다 그에게서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그 자신이 스스로 한 발 내딛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날 저녁, 도윤은 퇴근길에 작은 메시지를 적어 휴대폰 메모장 상단에 고정시켰다.
“내 삶의 첫 번째 승인자는 나다.”
“오늘 점심처럼, 작은 선택부터 시작한다.”
겨울의 차가운 바람이 불었지만, 그의 걸음은 전보다 확실히 가벼워져 있었다.
작고 사소한 결심 하나가, 그의 세계 전체에 미세하지만 분명한 균열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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