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집아래의 두 얼굴
연기의 향, 숨겨진 귀
영광 시장의 한복판, 사람들이 가장 붐비는 골목 끝에 자리한 작은 찻집 ‘진주관’. 겉보기에는 그저 고된 하루를 달래려는 장정들이 모여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는 평범한 곳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몰랐다. 이곳이 독립운동의 가장 깊숙한 심장부라는 것을.
저녁연기와 함께 한약 냄새가 스며든 주방 한편.
그곳에서 **변성자(卞成子)**는 식은 찻잔을 조심스레 헹구고 있었다.
사십 대 초반의 여인.
고요한 눈빛 속에는 세월보다 깊은 상처가 숨겨져 있었다.
남편이 일본 헌병에게 고문당해 죽은 날, 성자는 울지 않았다. 대신, 가슴속에서 차갑고 단단한 무언가가 자리 잡았다. 복수 같은 뜨거움이 아니라, 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냉정한 의지였다.
그녀는 찻집을 운영하며 자연스럽게 흘러드는 친일파들의 정보를 모았고, 그것을 정혁제—이 지역에 숨어 지내는 독립군 연락책—에게 전해왔다.
그리고 오늘, 2층에서는 위험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성자는 찻잔을 헹구는 손을 멈추었다.
2층에서 내려오는 발소리, 술잔 부딪히는 소리, 낮게 억눌린 조선어, 그리고 그 사이에 섞인 일본어의 거친 울림.
그녀는 주방 천장 틈으로 스며드는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들었다.
"이산갑 도련님을 감시하라고? 박성표… 이 자식…"
변성자의 속에서 오래된 얼음 같은 분노가 끓어올랐다.
이산갑.
조용한 성품으로 학당을 운영하며 마을 아이들을 가르치던 청년.
성자의 남편이 죽고 나서도 누구보다 먼저 찾아와 위로의 말을 건넨 사람이었다.
그를 노린다는 건…
또다시 누군가의 가정이 파괴되는 것을 가만히 보라는 것과 같았다.
성자는 찻잔을 내려놓고 앞치마 속에서 작은 가죽 수첩을 꺼냈다.
그림자 손님, 숨어 흐르는 정보
찻집 아래층에서는 밤이 깊어가는데도 손님들이 끊이지 않았다. 시장 상인, 노동자, 그리고 어디선가 모여든 수상한 얼굴들까지.
하지만 성자의 눈에는 모두가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사람들처럼 보였다.
손님들은 차를 마시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라며 아무 말이나 쏟아냈지만, 성자는 그중 필요한 말만 골라 마음속에서 가려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기다리던 사람이 들어왔다.
그는 평범한 손님처럼 차를 시키고, 아무렇지 않게 한 모금 마신 뒤 주머니에서 끊어진 옷자락 조각을 꺼내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것은 정혁제와 연락하는 암호 신호였다.
성자는 자연스럽게 다가갔다.
“손님, 무슨 차를 더 드릴까요?”
그녀의 말에 손님은 낮게 중얼거렸다.
“박성표가… 움직입니다.”
그 짧은 한 문장에 성자의 심장이 얼어붙었다.
박성표.
일본 경찰과 헌병 사이에서 정보를 흘려 받아먹고살던 마을의 이간자.
남편을 죽게 한 고문에 관여한 인물이기도 했다.
손님은 말을 이었다.
“그가 일본 헌병대와 접촉했습니다. 목표는… 이산갑 선생입니다.”
성자의 눈에 번개처럼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 남편의 피범벅 된 얼굴.
— 헌병들이 남긴 조롱.
— 박성표의 비웃음.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수첩을 펼쳤다.
“혁제 선생에게 전달해야겠군요.”
그러자 손님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정혁제 선생은 오늘 밤 움직일 수 없습니다. 체포망을 피하느라 서쪽 산지로 숨었습니다. 대신…”
그는 성자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 오늘 밤은 성자님이 움직여야 합니다.”
그 말은 마치 칼처럼 심장을 베었다.
성자는 느리고 단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제가 합니다.”
밤의 그림자, 움직이는 복수
밤이 되자 진주관의 불은 하나둘 꺼졌다.
하지만 성자에게 오늘은 결코 잠들 수 없는 밤이었다.
그녀는 주방 뒤편의 비밀문을 열었다.
벽장처럼 보이는 그 뒤에는 좁은 통로가 있었다.
이 길은 오직 성자와 정혁제만 알고 있었다.
어둠 속을 걸으며 성자는 작은 가죽 수첩을 가슴에 꼭 눌러 쥐었다.
지난 몇 년간 모아 온 정보들, 헌병대의 동향, 친일파들의 거래, 그리고 오늘 새로 얻은 박성표의 움직임까지.
그 모든 것이 이제 이산갑을 살릴 유일한 무기였다.
통로를 빠져나온 성자는 검은 한복 위에 얇은 겉옷을 둘러쓰고 시장 뒤 골목으로 향했다.
바람이 차가웠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 대신 죽음을 각오한 결심이 서려 있었다.
골목 끝, 오래된 벽돌 건물 앞에서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성자 아씨…”
그는 정혁제의 부하 중 한 명인 최상도였다.
“이산갑 선생이 위험합니다. 박성표가 헌병들에게 넘기기로 했습니다. 장소는—”
“알아요.”
성자는 말을 끊었다.
“2층 방에서 다 들었습니다.”
상도는 놀라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럼…”
“지금 당장 움직입시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갑고 흔들림이 없었다.
새벽, 결정의 순간
새벽안개가 깔린 영광 학당 앞.
이산갑은 창가에 서서 밤새 잠들지 못한 눈으로 어둠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 자신을 노린다는 미묘한 기운을 이미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도련님!”
성자의 낮고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산갑이 문을 열자, 성자와 최상도가 숨을 몰아쉬며 서 있었다.
“지금 당장 떠나셔야 합니다.”
“무슨 일입니까?”
“박성표가 헌병대를 불렀습니다. 새벽 순찰로 위장해서 들이닥칠 겁니다.”
이산갑의 얼굴이 굳어졌다.
“마을 사람들은…?”
“지금은 도련님을 지키는 게 먼저입니다. 일본에게 잡히면 독립군 연락망 전체가 노출됩니다.”
잠시 침묵.
이산갑은 성자의 흔들리지 않는 눈을 바라보았다.
“… 성자 아씨, 위험한 일에 왜…”
“남편이 죽은 날부터, 저는 이미 위험 속에 살고 있습니다.”
성자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그 안에 담긴 상처와 결의는 누구보다 단단했다.
“지금은 시간이 없습니다. 여기서 서쪽 언덕으로 빠지세요. 상도가 길 안내를 할 겁니다. 전…”
그녀는 뒤를 돌아 학당 뒤쪽 숲을 바라보았다.
“저는 시간을 벌겠습니다.”
“안됩니다!”
이산갑이 성자의 손을 잡았다.
“아씨까지 위험해질 수 있어요!”
성자는 살짝 미소 지었다.
“도련님이 잡히면… 더 많은 사람이 죽습니다. 저는 그저 제 역할을 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산갑의 손을 부드럽게 놓았다.
“어서 가세요. 이건… 남편에게도 지키지 못했던 약속입니다.”
최상도가 이산갑을 이끌며 얼른 골목 속으로 사라졌다.
성자는 혼자 남았다.
그리고 조용히 숨을 고르며 찻집에서 가져온 작은 호신용 단검을 꺼냈다.
멀리서 부츠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헌병대의 군홧발.
성자는 바람 속에서, 남편의 마지막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성자야… 살아남아라…”
그녀는 단검을 감싸 쥐고,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여기서 이야기는 멈춘다.
그날 새벽, 영광 학당을 덮친 일본 헌병대는 텅 빈 건물만을 발견했다.
이산갑은 탈출했고, 정혁제의 조직은 무사히 움직였다.
하지만 변성자는…
그녀의 행방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다만 사람들은 후에 이렇게 말했다.
“그날, 안갯속에서 한 여인이 헌병들을 홀로 붙들고 있었다더라.
그녀가 아니었으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거야.”
그리고 진주관의 주방 벽 너머,
성자의 작은 가죽 수첩은 지금도 남아 있다.
마치 그녀가 다시 돌아와
이어 쓰기라도 하려는 듯이 그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