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관 아래의 그림자
진주관 아래의 그림자
조병수의 발걸음
2층 작은 방에는 마른 먼지 냄새와 오래된 기름종이 창호의 숨결이 어른거렸다.
서늘한 바람은 누구의 편도 아닌 듯 문틈을 스쳐 지나며 방 안을 묵직하게 감쌌다.
조병수는 잠시 말없이 방 한 구석에 놓인 난로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동작은 한 치의 여유도 없는 사람이 흔히 보이는, 습관화된 침착함을 품고 있었다.
“그럼 나는 가보겠네.”
그는 외투의 먼지를 털고 모자를 집어 들었다.
“오늘은 법성포 조창(漕倉)에 가봐야 하니까. 정보는… 일주일 후에 전달하겠네.”
박성표가 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확실하게 해주게.”
조병수는 비웃듯 입꼬리만 살짝 올렸다.
“성표 자네, 내 일을 얼마나 함께 했나. 나는 프로니까.”
그리고 문 밖을 힐끗 바라보며 덧붙였다.
“이산갑 도련님 학당 주변에 눈을 붙여놓지. 그 사람과 학당… 요즘 시끄럽더군.”
백정치가 주먹을 쥐며 속삭였다.
“감시만으로 될까요? 저 사람들, 뭔가 꾸미고 있는 것 같던데.”
하지만 조병수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의 그림자는 기름등잔 불빛에 길게 늘어져 문밖으로 미끄러져 나갔다.
그의 발걸음이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
또각, 또각.
그 소리가 멈출 때마다, 방 안의 공기는 조금씩 차갑게 식어갔다.
변성자의 눈빛
1층에 도착한 조병수는 마치 방금까지 독한 음모를 이야기한 사람이 아니라는 듯,
평범한 손님처럼 자연스럽게 모자를 벗고 주변을 스윽 훑었다.
그때, 주방 쪽에서 조심스레 나오는 한 여인이 있었다.
조용히 엎드린 달빛처럼 부드러운 얼굴.
그러나 그 눈동자는 사금파리처럼 단단하게 빛났다.
변성자.
찻집 ‘진주관’을 운영하는 여인.
과부가 된 뒤 혼자 살아남기 위해 이곳을 꾸려왔지만,
그녀의 삶은 단순한 생계가 아니었다.
그녀는 조병수를 보자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조 선생님, 또 오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그 속에는 보이지 않는 바늘처럼 날카로운 긴장이 숨어 있었다.
조병수는 멀쩡한 얼굴로 말하며 손에 들고 있던 차 잔을 살짝 흔들었다.
“그래, 차가 맛있더군. 다음에도 들르지.”
그러나 변성자는 그의 눈빛을 정확히 읽을 수 있었다.
사람을 관찰하는 능력은 굳이 독립운동가가 되기 이전부터 그녀의 생존 방식이었다.
조병수가 문을 밀고 나가자, 문 위에 달린 작은 종이 ‘링—’ 하고 울렸다.
그 여운이 남아 있을 때쯤, 조용한 발걸음이 다시 내려왔다.
박성표와 백정치였다.
그들은 늘 그렇듯 위선적인 미소를 지으며 카운터로 다가왔다.
“변 사장, 계산하지.”
변성자가 잔잔한 미소로 대답했다.
“30전입니다.”
박성표가 동전을 무겁게 내려놓는 순간—
변성자의 시선은 잠시 그의 손을 스쳐 지나갔다.
그 손등 위에 보이는 얇은 화염 자국, 오래도록 지우지 못한 죄의 그림자.
그녀는 그 손에 얽힌 피비린내를 알고 있었다.
남편을 고문하던 헌병대의 심부름꾼이기도 했던 그 손.
박성표는 그것을 알 리 없었다.
그녀의 미소가 얼마나 차갑고 날 선 것인지.
“잘 가십시오.”
변성자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박성표와 백정치의 발걸음이 문 밖으로 사라졌다.
그 순간—
변성자의 얼굴에서 모든 미소가 사라졌다.
그녀는 날카로운 칼날 같은 눈빛으로 그들의 그림자가 사라지는 방향을 응시했다.
그리고 아주 낮은, 그러나 독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혁제 선생님께 알려야겠군.”
진주관 아래의 은밀한 통로
손님이 모두 빠져나간 늦은 저녁, 진주관은 조용히 숨을 죽인 듯했다.
연한 연기와 차 향이 남아 있었고, 벽에 걸린 등은 바람에 흔들리며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변성자는 주방으로 돌아가 찻잔을 씻는 척했다.
개수대 아래의 작은 서랍이 살짝 들떠 있는 것을 확인하며 마음속으로 시간을 재기 시작했다.
박성표가 문밖으로 나간 지 정확히 4분.
그들이 골목을 돌아 저잣거리 큰길로 나가는 데 걸리는 거리.
이제 안전하다.
그녀는 찻잔을 내려놓고 조용히 무릎을 굽혔다.
주방 바닥 한쪽에 작은 칸이 있었다.
오래된 목재를 눌러 밀자, 바닥이 미세하게 흔들리며 작은 틈이 열렸다.
그 속에는 짐승처럼 웅크린 통로가 있었고,
그녀는 몸을 낮추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땅 아래에 숨어 있는 조용한 길.
독립운동가들이 은밀하게 출입하던 통로이자,
헨병의 추적을 피하기 위한 작은 은신처.
석등 하나 없는 어둠 속에서 그녀의 발걸음 소리만 또렷했다.
그녀는 허리에 매달린 작은 수첩을 손으로 꼭 쥐었다.
—박성표, 백정치.
—이산갑 감시 지시.
—조병수 법성포 조창 이동.
—정보 전달 예정, 7일 후.
수첩은 조심스레 덮였지만,
그녀의 심장만큼은 잠시도 닫힐 수 없었다.
그림자가 모이는 곳
통로의 끝에서 그녀는 작은 문을 두드렸다.
세 번, 쉬고… 한 번.
문이 열리자, 정혁제가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거칠어진 손, 피로한 눈빛.
그러나 그 눈은 언제나처럼 날카롭고 뜨거웠다.
“변 사장님, 무슨 일이오?”
변성자는 숨을 골라가며 말했다.
“조병수… 박성표… 오늘 중요한 얘기를 했습니다.
이산갑 도련님을 감시하라고 명령 내렸습니다.”
정혁제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산갑 도련님이 위험하단 말입니까?”
“예.”
변성자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단단했다.
“조병수는 일주일 후 다시 이곳으로 돌아옵니다.
법성포 조창에서 일본인 관리들과 접촉합니다.
그 자리에서 더 큰 계획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정혁제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 복잡한 계산이 이뤄지고 있었다.
“이 정보를 알려줘서 고맙소.”
그가 낮지만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산갑 도련님을 지켜야겠소. 이제부터 우리가 한걸음 앞서 움직여야 합니다.”
변성자는 조심스레 고개를 숙였다.
“저는… 더 많은 걸 들을 기회가 있을 겁니다.
박성표는… 이곳을 자주 이용하니까요.”
정혁제는 그녀의 어깨에 잠시 손을 얹었다.
그 손길에는 위로도, 동료애도, 결심도 담겨 있었다.
“무리하지 마시오.
당신까지 잃을 수는 없으니.”
그 말에 변성자는 미묘하게 웃었다.
“전 이미 잃을 것을 잃었습니다.”
그녀의 눈은 밤처럼 깊고 고요했지만, 그 속에는 타는 불씨가 있었다.
“그러니… 끝까지 가볼 생각입니다.”
정혁제는 그 눈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녀의 결정,
그리고 그 결심이 어떤 끝으로 향하는지 누구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영광의 어둠 속에서,
새로운 폭풍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