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헌과 오상호
이충헌과 오상호
1890년대, 이충헌(李忠憲)은 스물다섯의 나이에 전라도 한 고을의 수령으로 부임했다.
부친 이기영의 바람대로, 오상호가 청지기로 함께 갔다. 오상호는 이미 이기영에게서 십 년 가까이 배웠고, 이충헌과도 친밀한 관계를 쌓고 있었다.
"상호, 자네가 함께 가주니 든든하네."
이충헌이 말했다.
"도련님, 이제 수령이 되셨으니 저를 도련님이라 부르시면 안 됩니다."
"하하, 그래도 내게는 자네가 도련님 시절부터 알던 상호일세."
두 사람의 관계는 주종(主從)을 넘어선 것이었다. 오상호는 이충헌의 신뢰를 한 몸에 받았다.
부임한 고을에서 이충헌은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탐욕을 부리지 않고, 백성들의 어려움을 직접 살폈다. 그 뒤에는 항상 오상호가 있었다.
"나리, 이번 봄에 흉년이 들 것 같습니다. 환곡(還穀)을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상호의 말이 옳네. 즉시 준비하도록 하게."
"나리, 저 이방(吏房)이 뇌물을 받고 백성들을 괴롭힙니다."
"즉시 파직하고 조사하도록 하게."
오상호의 포졸 출신 배경은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아버지가 물려준 인맥을 통해 고을 곳곳의 정보를 수집했고, 부정부패를 척결하는 데 앞장섰다.
이충헌이 수령으로 있던 십 년 동안, 그 고을은 전라도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소문났다.
轉 - 일제강점기의 시련
하지만 시대는 급변하고 있었다.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제 병합했다. 이충헌은 관직을 버리고 영광으로 돌아왔다. 오상호도 함께 돌아왔다.
"상호, 미안하네. 자네에게 더 이상 녹봉을 줄 수 없게 되었네."
"나리,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저는 녹봉을 받으려고 나리를 모신 것이 아닙니다."
오상호는 여전히 이충헌 집안의 청지기로 남았다. 비록 녹봉은 없었지만, 그의 충성은 변하지 않았다.
이충헌은 부친 이기영의 뒤를 이어 향교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오상호는 그 옆에서 실무를 맡아 처리했다.
"상호, 일제의 세상이 되었지만, 우리는 우리의 혼을 지켜야 하네."
"그렇습니다, 나리. 배움만은 빼앗길 수 없습니다."
그러던 중, 이기영이 칠십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임종 직전, 그는 오상호를 불렀다.
"상호야..."
"예, 선생님."
"내 아들 충헌이를... 잘 부탁하네... 그리고..."
이기영의 손이 오상호의 손을 꽉 잡았다.
"내 손자 산갑(相甲)이가 있네... 그 아이가 서당을 열 것일세... 네가... 도와주게..."
"선생님, 걱정 마십시오. 제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이 집안을 지키겠습니다."
이기영은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