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파타고니아를 가다
빙하와 마블 케이브(marble cave)가 있는 프에르토 리오 트란쿠일로(Puerto Rio Tranquilo)를 가기 위해 뽀르토몬트에서 출발, 발마세다 (Balmaceda)라는 시골 공항에 내렸다. 사전 조사에 의하면 트란쿠일로를 찾아 갈려면 공항에서 버스로 40분 거리에 있는 코이하이께(Coyhaique) 정류장으로 이동후 거기서 트란쿠일로로 가는 버스를 갈아타야 한다고 돼있다. 버스터미널로 가는 도중에 옆에 앉아있는 손님이 영어가 서투르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의사소통이 되어 지금 버스터미널에 가면 트란쿠일로행 버스를 탈 수 있겠느냐고 물었더니 이미 떠나버렸을 거란다. 염려했던 것이 현실이 된 것 아닌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이는 버스가 없으면 터미널 근처에서 하룻밤 자고 내일 가던지 아니면 터미널 근처에서 트란쿠일로로 가는 합승버스를 찾아보란다. 일행이 4명인데 숙소를 찾는 것도 쉽지 않을 테고 차를 찾는다고 길거리를 헤매는 것 또한 체면이 말이 아니다. 어렵게 어렵게 예약해 놓은 호텔 또한 오늘 체크인을 하지 않으면 어찌 될는지? 그것뿐인가? 호텔 주인도 영어가 안되어 자초지종을 알릴 수도 없고 도움을 받아야 할 주위 사람들도 영어가 안되니 이를 일컬어 "고립무언"이라고 해야 하나?
오후 4시 30분경 코이하이께에 있는 시골 버스터미널 안은 마치 영업을 마친 것 마냥 손님도, 일하는 종업원도 없이 텅 비어있다. 터미널 안에서 주인 잃은 강아지 새끼처럼 멍하니 먼 곳을 쳐다보고 있노라니 손에 서류를 들고 어떤 이가 지나간다. 그이를 쫓아가 "당신 여기서 일하는 사람이냐"고 물으니 무슨 일이냐고 응답하기에 "어쩌면 당신이 내가 찾고 있는 천사"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이도 영어가 안돼 전화 번역기로 대화를 했다.
공항버스에서 만난 옆자리 손님이 말했듯이 버스는 하루에 한편 있는데 떠났기에 택시를 타고 가던지 아니면 여기서 하룻밤 자고 가란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인가 하고 (머리) 컴퓨터를 돌려본다. 먼저 호텔전화번호를 건네어주면서 호텔 주인에게 이곳 버스터미널로 차를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오는데 3시간 가는데 3시간 저녁 11시가 된다는 것인데 이 또한 쉽지가 않을 테고 호텔 주인 전화를 마냥 기다릴 수만도 없어 다시금 택시가 어디에 있냐고 물으니 터미널 밖으로 안내한다. 착하기도 하셔라.
도로변에 3-4대의 승용차가 있는데 영업용이라는 표시도 없다, 그중 한 기사분이 데려다주겠다고 하면서 20만 페소를(US 215.00 상당) 지불하란다. 가격 흥정을 시도했다.
"15만 페소에 갑시다.
3시간 운전거리인데 20만 페소는 줘야 합니다
그러면 17만 페소 어떻소?
18만 페소. 이제는 당신이 마지막 선택을 해야 할 것이요
좋소, 갑시다."
40분가량 달리니 비포장 도로가 나와 일부구간 공사 중 이러니 했는데 남은 2시간 30분이 모두 비포장 도로다. 그러나 기분은 좋다. 금일 중으로 숙소에 당도할 수 있다니 ------ 거기에다 나 혼자 18만 페소면 부담이 크겠지만 네 사람이 분담하면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 마음을 다잡아 먹으니 아름다운 주변 경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지금껏 보지 못했던 새로운 풍경들. 산 비탈길에 잘 다듬어진 목장에서 한가하게 풀을 뜯고 있는 소와 말, 그리고 양 떼들. 비록 스위스는 다녀온 적이 없지만 바로 저런 것이 아닌가 싶다. 한 세상 태어나서 수십, 수백 마리가 좁은 우리에 갇혀 하루 세 끼니를 기다리는 인생이 있는가 하면 공기 좋고 물 맑은 곳에서 시기나 질투도 없는, 경쟁이 없는 목장에서 풀을 뜯고 있는 저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나도 일 년 전만 해도 우리에 갇힌 양 떼와 같이 "당신은 손에 두 개나 쥐고 있는데 내 손에는 왜 하나뿐" 이냐고 눈을 부릅뜨고 살았으나 지금은 이곳에서 만난 양들과 같이 살고 있지는 않은지? 너나 나나 우리는 운이 좋은 게야.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을 헤아리기가 쉽지는 않을 터인데 오늘 아름다운 목장에 저들이 나를 일깨주다니.
이번에는 계곡을 넘고 있다. 숲이 울창하게 우거진 산속에서 만난 눈은 한국에서 보았던 그런 설경과는 다르다. 금방이라도 바위돌이 굴러 내릴 것만 같은 가파른 산 정상은 눈을 뒤집어쓰고 있으나 차가 달리고 있는 이 밑에는 여름 이라니 말이다. 계곡물은 비가 온 뒤에 폭포수처럼 힘차다. 그런데 차는 언덕을 내려가고 있는데 계곡물은 산 위로 올라가고 있는 착시현상에 나는 눈을 비벼본다. 내가 무엇을 본 것이지? "자기야, 저 계곡물 좀 봐 물이 산으로 올라가고 있잖아---" 그녀는 말이 없다.
승용차가 비포장 도로를 달리니 자갈이 차 밑바닥을 세차게 때리는 소리에 마음이 불편하다. 오늘 3시간 반동안 자갈로 망가진 당신 차 수리비가 오늘 우리가 지불한 18만 페소 이상 들겠소. 이분은 오늘 찾아가는 트란쿠일로길이 처음일까? 우리를 목적지에 내려주고 당신 집으로 돌아가면 밤 10시가 훌쩍 넘을 것 같은데 이를 어쩌나? 연세도 줄잡아 70은 넘어 보이는데 얼마나 피곤하실까? 오늘 수입이 괜찮았으니 2-3일간은 푹 쉬는 게 좋겠다. 이제 기사분 걱정까지 하고 있으니 제법 여유를 되찾은 모양이다.
바다와 같은 호수가 눈앞에 나타나고 길가에는 야생화가 만발하여 목적지에 이르렀나 생각했으나 호수가를 30분 이상 달려도 사람 사는 곳은 보이지 않는다. 혹여 저 모퉁이를 돌아가면 마을이 나오겠지? 3-4번을 반복하니 빼곡히 우거진 야생화 초초(꽃 이름) 꽃길과 더불어 숙소가 있는 마을이 나온다. 광관지로 알고 찾아왔는데 아담한 시골 마을이다.
우리가 찾아온 호텔 파타고니아(Hostal Patagonia) 라는 간판이 어느 가정집 유리창가에 쓰여있다. 3시간 이상 달려 찾아온 호텔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담장 너머 주인장 이름을 부르니 길 건너편에서 아주머니 한 분이 와 문을 열어준다. 당신이 제니퍼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대답한다. 집안이 썰렁하다. 스토브에 장작을 넣고 불을 붇혀주곤 가버린다. 손님이 투숙하자마자 숙박비룰 받아야 하는데 그냥 가버리다니------ 인심도 좋고, 마음도 착하셔라. 나중에서야 알고 보니 그녀는 주인이 아니라 이웃집 아주머니였다. 아마 주인장의 부탁을 받고 우리를 대신 맞이해 준 것이다.
저녁을 위해 주변에 식당을 찾았는데 역시 가정집 같은 식당이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는 이집저집에서 장작을 태워 온돌을 하느라 굴뚝에서 연기들이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 우리네 시골에서 저녁 지을 시간에 보았던 모습과 같았다. 그뿐인가 모든 가정집 앞마당, 뒷마당에는 장작들이 수북이 쌓여있다. 여름에도 장작을 피워 온돌을 하는 걸 보니 일 년 내내 불을 지펴야만 하는 듯싶다. 미국 에서와 같이 가족들이 모여 담소를 즐길 수 있도록 리빙룸에 만들어 놓은 장식과 실용을 겸한 벽난로가 아니라 집안 온방을 하는 장작스토브다. 나름 그 옛날의 운치를 불러오기에 나쁘지는 않다.
긴 하루였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 내 허둥거렸던 하루. 물어물어 찾아온 이 시골 마을에서 우리 일행은 일주일간 머물면서 빙하와 대리석동굴도 찾을 계획이다. 인구는 400여 명의 아담한 관광지이며 상수도 시설이 안돼 있는지 부엌이나 샤워기에 수압이 낮아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앞문과 뒷문 밑으로는 찬바람이 들어와 이를 막아 보겠다고 수건을 꺼내 틀어막기도 했다. 잠자리를 위해 스토브에 불을 지피려고 애를 써봐도 훨훨 타오르지 않아 방안에 공기가 좀처럼 데워지지가 않는다. 하는 수 없어 옷을 두세 겹 주어 입고 잠을 청할 수밖에.
5번을 이동하면서 온탕과 냉탕을 들락 거리고 있다. 화려한 도시 산티아고 그다음에는 아타카마 사막의 토담집 생활, 다시금 부산 해운대를 연상케 하는 뽀르또 몬트. 이제는 찬 바람이 문틈새로 솔솔 들어오고 상수도 시설도 제대로 갖추어 있지 않는 투란쿠일로 시골생활. 옛것을 버리고 문명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는 조금만 불편해도 짜증이 나고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그동안 자연 그대로의 것에서 너무 멀리 와버리지는 않았나 싶다. 30-40년 전으로 되돌아온듯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이곳에서 일주일간 흙냄새를 실컷 맡으면서 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