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류향(수다원)의 길
[장자39] 대종사(12) 삶도 좋고 죽음도 좋다 / 예류향(수다원)의 길
25. 갑자기 자래에게 병이 났습니다. 숨이 차서 곧 죽을 것 같아 부인과 아이들이 둘러 앉아 울었습니다. 그 때 문병 간 자려가 “자, 저리들 비키세요. 돌아가는 분을 놀라게 하지 마세요.” 하더니 문에 기대어 자래에게 말했습니다. “위대하구나. 저 조화. 자네를 어떻게 하려는 것일까? 자네를 어디로 데리고 가려는 것일까? 자네를 쥐의 간으로 만들려나? 벌레의 팔뚝으로 만들려나?”
26. 자래가 말했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동서남북 어디를 가라해도 자식은 그 명을 따르는 것. 음양과 사람의 관계는 부모 자식 간의 관계 정도가 아닐세. 음양이 나를 죽음에 가까이 가게 하는데 듣지 않는다면, 나는 고집스런 자식. 음양에 무슨 죄가 있나 대저 대지는 내게 몸을 주어 싣게 하고, 삶을 주어 힘쓰게 하고, 늙음을 주어 편안하게 하고, 죽음을 주어 쉬게 하지. 그러니 삶이 좋으면 죽음도 좋다고 여길 수밖에.
27. 이제 큰 대장장이가 쇠를 녹여 주물을 만드는데, 쇠가 튀어 나와 ‘저는 반드시 막야(鏌鎁)가 되겠습니다’ 한다면 그 대장장이는 필시 그 쇠를 상서롭지 못한 쇠라 할 것일세. 이제 내가 사람으로 나왔다고 해서 ‘사람의 모양만, 사람의 모양만’ 하고 외친다면, 조화자는 필시 나를 상서롭지 못한 인간이라고 할 것일세. 이제 하늘과 땅이 큰 용광로이고 조화가 큰 대장장이라면, 무엇이 되던 좋은 것 아니겠는가? 조용히 잠들었다가 홀연히 깨어나는 것.”
- 오강남 교수의 장자 번역본에서 발췌
자신의 죽음을 앞에 둔 자래는 순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세상에는 어쩔 수 있는 일들과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서로 혼재되어 넘쳐나고 있다. 세금을 어떻게 내고 절세를 하는, 자잘한 일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보다 근본적인 문제일수록 어쩔 수 없는 일에 가깝다. 우리는 누구도 의지 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고 의지대로 늙어가는 것이 아니며 의도를 가지고 병들지 않는다. 위 본문의 자래의 예처럼 죽음 역시 너무나 당연하게도 누구도 원치 않음에도 결국은 닥칠 수 밖에 없는 일이다. 그나마도 생로병사 중에 질병의 경우는 적절한 운동과 섭생 등 나름의 노력으로 조금은 부정적인 확률을 줄일 수 있을지 몰라도 이 또한 완전한 의지의 영역은 아니다. 결국 삶에는 순응할 수 밖에 없는 일들이 있으며 순응하지 않는다면 더 큰 괴로움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평안을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용기를
그 두 가지를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내게 허락하시옵소서...
- 라인홀트 니버, 평안의 기도(Serenity Prayer) 중에서
나 자신에게 지혜가 있을까?
지혜가 0인 사람도 100퍼센트 완전한 사람도 없고, 스스로 그 깊이가 얼마나 될지 가늠하기도 힘들다. 또한 스스로 자신이 지혜로운 이라고 여긴다면 그런 생각이 오히려 자신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증거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저 매사에 최선을 다할 수 밖에 없다. 스스로 가진 딱 그만큼의 지혜로써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할 수 없는 딱 그만큼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현재의 모습이 정확하게 자기자신의 최선과 지혜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남은 일은 단 하나.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순응하는 것일 뿐.
NLP(신경언어프로그래밍) 에서는 ‘모든 이는 최선을 다한다’ 고 한다. 옆에서 보기에 좀 답답해보여도 그것이 그의 최선인 것이다. 특히 부모가 자식을 볼 때 크게 답답한 마음을 느끼곤 한다. 그것은 자식이 못난 탓이 아니라 부모의 집착이고 욕심이 큰 탓일 뿐이다. 그 나이 때 아이들은 대체로 세계관도 삶에 대한 태도도 완전히 정립되어 있지 않다. 그런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가 예외적인 것이다. 지난 과거를 돌이켜보면 당신도 나도 우리중 누구도 혼란스러운 때였지 않은가? 물론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혼란은 완전히 가시지 않는 것이 나름의 정상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너무나 단단하게 굳어진 정신일지도......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우리는 모두 이미 최선을 다하며 산다. 그러니 자신을 책망할 필요도 좌절할 필요도 없다. 있는 그대로 괜찮다. 그러니 자신을 토닥여줘도 충분하다. 그리고 일련의 일들의 결과에 대해서, 이미 자신의 손을 떠나 결론이 나버린 일들에 대해서 욕심과 집착을 내려놓자. 이것이 쉽게 ‘진인사 대천명’ 하는 길이다.
다시 본문의 내용을 보자.
장자는 확실히 유물론자가 아니다. 우리 육신이 죽어서 썩어서 흙으로 돌아가더라도 무언가는 남아서 쥐의 간이든 벌레의 팔뚝이든,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뭔가가 될 수 있음을 가정하고 있다. 그리고 자래는 자신이 반드시 사람으로 다시 윤회하지 않아도 된다고 여긴다. 도(道)이고 근원으로서 조물주인 용광로와 대장장이가 자신을 무엇이 되게 하든 상관 없는 완전한 내맡김으로 자신을 내려놓는다.
뭔가가 되겠다고 우기면 그것으로 될 수 있을까? 천상계로 윤회할 자격요건이 갖추어지지 않았는데도 그리로 가겠다고 우기면 갈 수 있을까? 당연히 안될 것이다. 그런데 자격요건이라는 표현이 좀 인위적이다. 인과법이 훨씬 더 적절한 표현이다. 우주는 엄격한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따른다. 그러니 자신이 타고난 (생각으로는 너무나 불합리하다 여겨지는) 선천적인 조건 조차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더 나은 이 생의 미래를 원한다면 그에 걸맞는 노력을 해야한다. 더 나은 내생의 미래를 원한다면 그에 걸맞는 노력을 해야한다. 적절한 원인을 쌓으면 이 생이든 다음 생이든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오게 된다. 그것이 우리의 작은 생각을 초월한 우주의 섭리다.
흥부놀부 이야기를 잠깐 떠올려보자.
선행을 한 흥부는 부자가 되었고 악행을 하고 욕심 많은 놀부는 원래 부자였지만 결국 쪽박을 차게 되었다. 이것이 현실적으로 적절한 이야기일까? 아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동화에나 등장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선행을 많이 하면 이 생에는 잘 해봐야 상장이나 표창장 정도 받을지 모른다. 선행을 많이 한다고 이 생에 부자가 되지는 않는다. 악행을 많이 하면 감옥에 가고 신세를 망칠 수 있다. 단 그것이 법에 저촉되고 결국 법의 심판을 받게 될 경우에 말이다. 법망을 교묘히 피해가고 값비싼 변호사를 쓰거나 거액의 보석금을 내고 해결한다면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사회에는 정의가 없다고 여긴다. 적절한 생각이다.
그러나 우주에도 정의가 없을까? 우주에는 완전한 정의가 존재한다.
선행이나 악행인 원인을 짓는다고 해서 이번 생에는 반드시 그에 합당한 결과가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생에는 육도윤회의 순환 원리에 따라 반드시 원인에 합당한 결과를 받게 된다. 선업을 많이 지었는데 인간으로 돌아오면 그에 합당한 부와 명예를 받게 될 것이다. 선업을 많이 지었는데 인간 이상의 선처에 태어날 조건이면 욕계천상에서 그 선업만큼의 수명을 살고 다시 윤회할 것이다. 악업을 많이 지었는데 인간으로 돌아오면 그에 합당한 가난과 불명예를 받게 된다. 극악한 악업을 많이 지었으면 축생, 아귀, 지옥 등 악처에서 태어나 그 악업만큼의 수명 동안 살며 크나큰 괴로움을 받다가 다시 윤회한다.
육도윤회의 순환에 따르면 천상계에는 욕계천상, 색계천상, 무색계천상의 세 영역이 존재한다.
선업을 많이 지으면 욕계천상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명상을 통해 정신적 영적으로 높은 경지에 이르면 색계천상과 무색계천상의 여덟천상 중 어느 곳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또한 더 높은 천상세계일수록 그곳에서의 수명은 기하급수적으로 길어진다고 한다.
스웨덴의 영계탐험가로 알려진 스베덴보리는 살아서 영계를 거의 마음대로 드나든 영능력자로 유명하다. 원래 아주 똑똑하고 저명한 과학자였던 그는 어느날 갑자기 영계를 체험하는 경험이 시작된 후 남은 일생 동안 수시로 영계를 드나들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죽을 날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으며 그와 같은 영계 체험을 세세하게 기록으로 남기게 되었다. 그가 묘사한 영계(천국)를 보면 사람들이 흔히 상상하는 것과는 달리 아주 세밀하다. 예를 들면 영계의 도서관이 이나 시설물 등이 존재하며 우리 현실 세계의 그것들보다 유동적인 성질을 띤 것으로 묘사했다.
붓다의 본래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니까야 초기경전의 방대한 내용 중에는 종종 이런 스베덴보리의 묘사와 유사한 내용들이 등장한다. 예를 들면 천상계에도 그 세계를 다스리는 왕이 존재하는데 (사실 이는 범천 등의 등장으로 잘 알려진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외 마부라든지 하는 직업도 등장한다는 사실이 처음 접했을 때는 놀랍게 다가오는 내용이다.
결국 이런 사실들을 종합해서 이해해보면 스베덴보리는 기독교적 천상세계관을 담고 있지만 붓다의 가르침과 공통적으로 천상계를 묘사하는 부분들이 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천국(영계)에 대한 묘사가 제한적인 면인 것이 그 한계라면 붓다(혹은 불교)의 세계관은 훨씬 더 시공간적으로 방대한 세계를 묘사한다는 점이다.
결국 천국과 지옥은 존재하지만 기독교적 세계관과는 달리 그곳에서 영생하거나 영원히 갇히는 것이 아니라 육도윤회의 원리(인과법)에 따라 끝없이 순환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어떤 천상이든 완전히 안심하기에는 이르다. 조건 좋고 살기(?) 좋은 그곳에서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 결국 세월은 흐르고 천상계의 존재도 늙음과 죽음은 없더라도 죽음은 닥쳐오게 된다. 죽음이 가까워지면 그런 징조를 보이는 현상들이 일어나며 그에 따라 천신들도 두려움에 떤다고 한다. 그렇지 않겠는가? 엄청나게 오랜 세월 병고도 없는 천상계의 좋은 조건을 누리며 살다가 죽음의 징조가 가까워지면 다음 생에는 어디로 가게 될지 모르니 더더욱 두려울 수 밖에 없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사람을 살리는 의술을 펼치는 직업이든 거리의 쓰레기를 치우는 직업이든 그들의 일을 존중할 필요는 있다. 그러나 일당을 벌어서 매일 하루하루를 근근이 먹고 사는 직업과 평생의 비전을 내다보고 차근차근 미래를 준비해나가는 직업을 동일 수준에서 비교하기는 힘들 것이다. 어느쪽이 더 나은 직업인지는 두말 할 필요 없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직업도 이럴진대 개개인이 평생을 쌓아나가는 업과 여러 생에 관여된 일이라면 어떠할까?
어떤 이들은 유물론적인 사고방식으로 이 생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여기고서 자신만을 위한 기준으로 악업을 행하는 일도 서슴치 않는다. 삶을 단 한번이 아닌 긴 지평으로 내다본다면 절대로 그럴 수는 없으리라. 자신의 생활에 충실하면서도 기나긴 미래의 여러 생들을 위한 선업과 명상의 수행을 쌓아나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자래의 이야기처럼 조물주가 나를 무엇으로 재생하든 무조건 순응한다는 내맡김이 되어도 좋다. 이쯤만 되어도 가히 성자라 할 수 있을 정도의 경지이기 때문이다.
장자의 가르침대로의 길을 가든 붓다의 길을 가든 그와 같은 높은 도(道)의 길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완벽한 첫걸음이 된다.
일단 알고 이해하게 된 이상 다시 낮은 길로 되돌아 갈 수는 없다.
이제 남은 일은 천천히 가든 빨리 가든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는 일일 뿐.
이렇게 깨달음의 바른 흐름의 첫 길에 드는 것을 예류향(預流)이라 하며 이 성자의 첫단계를 성취하면 그를 예류과(預流果)를 얻었다고 부른다 ( 수다원과 수다원과 라고도 한다).
바른 깨달음을 얻는 이는 수다원-사다함-아나함의 성자의 단계를 거쳐 최종적으로 아라한이 되어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하게 된다. 수다원을 바른 깨달음의 첫 시작으로 보는 이유는 최대 일곱 생 이내에 반드시 아라한으로의 등업(?)이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성자가 되기는 당연하게도 몹시 어렵고 험난한 길이 될 것이다. 그러나 바른 길이 어떠한지를 알고 그 길의 첫 발을 내딛는 데서부터 수다원의 길은 시작된다(수다원의 성취는 아직 아니더라도).
그러니 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이것은 이제 되었을 테니) 바른 한 걸음을 시작하자.
속담에 이르는 대로,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가 아니겠는가!
- 明濟 명제 전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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