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시커 외전] 현빈이 괴테를 만난 까닭은...
계단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육중한 돌계단은 현실의 시간에서 벗어나 또 다른 차원으로 이어지는 듯했다.
“여긴 도대체 몇 층까지 있는 거지…”
현빈은 습관적으로 숨을 골라야 할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숨은 차지 않았다. 아, 이곳은 현실세계가 아니었지! 순간적인 깨달음이었다. 이 도서관은 단순히 층을 쌓은 건물이 아니었다. 물질세계가 아닌, 천국의 도서관. 각 층은 하나의 세계였고, 올라갈수록 더 깊은 사유와 의식의 장으로 들어가는 듯했다.
드디어 발걸음을 멈췄을 때, 눈앞에 넓은 홀이 펼쳐졌다. 천창을 통해 눈부신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 빛은 너무나 밝았지만 신기하게도 눈이 부시지 않았다. 마음은 한없이 안온하고 포근했다. 그 신비로운 빛 속에서 한 인물이 거대한 창가에 앉아 있었다.
현빈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낯선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그를 보는 순간 그에 관한 개략적인 정보들이 현빈의 인식에 메시지처럼 내리 꽂혔다. 그렇게 그는 그 얼굴을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은빛으로 물든 머리칼, 날카로운 눈매, 책상 위에 놓인 두꺼운 원고 뭉치. 그도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 눈빛이 마주쳤다.
“괴테… 선생님입니까?”
그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대가 여기까지 왔구나.”
유동적인 에너지와 정보의 교환이라는 천국의 특성으로 인해 괴테에게도 현빈의 정보가 전해졌을 터였다.
책상 위에는 파우스트의 원고가 펼쳐져 있었고, 옆에는 새하얀 깃펜이 놓여 있었다.
현빈은 천천히 다가가 의자에 앉았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저는… 살아 있을 때, 악마와 거래를 했습니다.”
괴테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빛을 고정했다.
“이야기를 해보게.”
“그는 처음엔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제게 복권을 맞게 해 주고, 힘을 주고, 여자와 명예를 주었죠. 하지만 결국 그로 인해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마지막엔… 그는 악마임을 드러냈습니다.”
괴테는 조용히 웃었다. 그 웃음은 비웃음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익숙하게 들어온 고백을 이해하는 듯한 웃음이었다.
“네 이야기를 들으니 파우스트를 다시 보는 듯하구나. 그도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누리고 싶어 했다네. 그 순간 메피스토펠레스가 찾아왔지.”
“그때 제게는 공허만이 남았습니다. 돈도, 힘도, 사랑도… 결국 허망하더군요.”
괴테는 창밖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사람들은 악마를 머리에 뿔 달린 괴물로 상상하지. 그러나 메피스토는 그보다 훨씬 교묘하지. 그는 우리 안에 잠들어 있는 그림자야. 우리 안에 내재된 탐욕과 분노를 부추긴다네.”
현빈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러면… 저 역시 제 안의 악마와 계약한 셈이군요.”
“그렇다네. 메피스토는 밖에서 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인간이 스스로 불러내는 그림자다. 네 욕망이 그를 불러냈고 붙잡아 두었다. 결국 스스로가 만든 파멸이었지. 그렇다고 해서 실체가 없다는 뜻은 아니라네. 인간의 내면에는 커다란 창조성이 깃들어있기 때문이지. 그렇게 그 마음의 그림자가 실재적인 존재로 현시하는 거야. 그렇게 악마는 재창조되는 거라네.”
현빈은 고개를 떨구었다.
“저는 너무 늦게 깨달았습니다.”
괴테의 목소리가 더 단호해졌다.
“늦게 깨닫는 것보다 더 끔찍한 건 끝내 깨닫지 못하는 것이네. 추락은 끝이 아니라 시작일 수도 있지. 파우스트가 죽음의 순간, 천상의 힘에 의해 구원받았던 이유는, 그가 마지막까지 의미를 찾으려 했기 때문이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괴테는 원고를 덮으며 말했다.
“나는 인간을 이렇게 보았다네. 인간은 스스로 빛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다. 그러나 그 길에 반드시 어둠이 있다. 악마와 거래한다는 것은, 결국 어둠과 손을 잡는 것. 하지만 그 어둠을 마주하지 않고는 빛도 알 수 없지.”
현빈은 조용한 미소를 지으며 괴테의 눈을 응시했다.
“선생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저 또한 그런 과정을 거쳐서, 궁극의 빛과 하나 되고 지금 이곳 천국에 올 수 있었으니까요.”
괴테도 역시 조용히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천국에서 마주하는 눈빛 속에서는 크나큰 정보의 교감이 있었다. 현빈의 지난 일생, 그리고 수행의 깊이가 괴테의 영혼에 전해졌다.
“아… 자네는…”
괴테는 인간으로서의 삶이 끝날 때, 자신의 죽음의 순간에 보았던 빛을 떠올렸다. 그가 마지막에 “좀 더 빛을!”이라고 외쳤던 그 빛이 현빈의 영혼 속에 살아서 빛나고 있었다. 그 빛은 보통의 물질계의 빛이 아니었다. 영혼 깊숙한 곳으로부터 깨어난 자의 빛, 물질 우주에서 빛나는 별과 태양의 근원인 영적 태양의 빛이었다.
괴테는 그 빛과 온전히 하나가 되지 못했다. 그저 죽을 때 잠시, 그리고 천국에서 거주하게 된 이후 간간이 스치듯 만났을 뿐이었다. 그 얼마나 열망하던 근원의 빛이었던가! 그런 빛을 바로 이전 생에서 현빈이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이 영혼은 그 깊은 곳에 거룩한 빛을 품고 나타난 것이다.
괴테는 부러움과 동경의 마음을 담은 듯한 말을 이어갔다.
“자네에게 메피스토는 더 이상 의미가 없겠구먼. 그는 더 이상 자네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할 거야. 숭고한 영혼의 빛은 그 어느 곳에서도 그림자를 남기지 않으니까. 내면의 그림자인 메피스토가 자리할 곳은 없지.”
괴테는 밝아진 표정으로 말했다.
“이 세계는 수많은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네. 인간의 세계는 그 세계대로, 또 이 천국 역시도 여러 층으로 이루어져 있지. 자네와 나는 둘 다 인간계를 졸업하고 이렇게 천국의 첫 번째 세계로 들어섰지만 앞으로 올라야 할 더 많은 세계들이 있다네. 그리고 결국에는……”
괴테는 여전히 밝은 표정이었지만 마지막 말을 잇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결국에는요?”
“가다 보면 알게 될 거야. 거기에 대해서 내가 미리 말하기는 힘들지. 나 또한 끝을 본 입장은 아니니까.”
현빈은 괴테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이미 충분히 경험하고 느껴온 터였다. 세상에는 말로 전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있다는 것을. 아니, 말로 전하는 순간 왜곡되는 것들이 있음을.
두 영혼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굳은 악수를 나눴다.
둘은 같은 곳을 향해 나아가면서도 서로의 갈 길이 다름을 깊이 느끼고 있었다. 괴테는 펜을 쓰는 길이, 현빈은 깊은 명상의 길이, 그들 앞에 높여있음을 각자가 예감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악수에 천장에서 쏟아지는 빛이 더 한층 밝은 빛을 발하며 비추었다. 마치 그들의 만남을 축복이라도 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