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숨 푹 자고 난 다음날 아침 몸이 훨씬 개운했다. 다만 어제 저녁으로 사우스 고아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마틴스 코너(Martin’s Corner) 레스토랑에 가서 그동안 먹고 싶었던 해산물 요리들과 돼지고기를 맥주와 함께 실컷 시켜 먹었더니 거울 앞에 달덩이같이 부은 나의 얼굴이 안녕하며 아침 인사를 대신했다. 여행을 가면 평소보다 곱절은 더 먹고 거의 매일 술을 마시니 붓기와 증량은 피해갈 수 없었다. 이미 수차례의 경험으로 익숙해진 이 패턴에 ‘이제부터 시작이군, 어디 한번 원 없이 먹어볼까?’ 하며 바로 호텔 조식을 먹으러 방을 나섰다.
어제 체크인했을 때는 너무 피곤한 나머지 오로지 침대에 대자로 눕고 싶다는 욕구밖에 없어서 건물을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아침 햇살에 온전히 드러난 이 호텔은 고요하고 아름다웠다. 이 숙소는 무려 350년이나 된 포르투갈과 인도의 혼합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헤리지티 건물이었는데 사진을 보고 고아 스타일의 외관과, 중정, 앤틱한 객실 그리고 합리적인 가격에 반해 예약하게 되었다.
높은 야자나무들로 둘러싸인 이 흰색 건물은 민트색의 창문들과 장식들로 화려함을 더했고 오래되어 보이는 원목 가구들이 고즈넉한 느낌을 주었다. 참 이런 별장 하나 있으면 행복하겠다 싶었다. (하지만 결론적으론 숲속에 둘러싸여 있다보니 꾸준한 벌레들의 침실 침입으로 기겁을 하곤 이 꿈같은 생각은 바로 사라졌다.)
우리는 발코니 쪽 테이블에 앉아 8시의 아침 햇살에 역광으로 비춰진 야자나무들을 바라보며 온전히 고아의 첫 아침을 누렸다. 난 야자나무 멍을 때리며 조식으로 시킨 치즈 마살라 오믈렛과 과일을 오물거렸고 남편은 인도식 아침으로 시킨 푸리를 삼발과 이름 모를 커리 같은 소스에 푹 담가 맛있게 먹었다.
난 커피를 두 잔이나 시켜 카페인 용량을 풀 파워로 충전한 뒤 남편과 오늘의 일정을 상의했다. 첫날부터 일정 하나가 뒤로 밀렸더니 줄줄이 동선 수정이 좀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어제 너무 피곤하게 일정을 소화했던지라 뒤의 일정을 좀 포기하더라도 오늘은 무조건 여유 있게 움직이자로 결정했다. 우리는 여행 플랜을 꼭 가고 싶은 곳들로 추려서 짜긴 하지만 뭔가 촉박하게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 무리하게 소화하지 않고 과감하게 스케줄을 조정한다.
이렇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난 원래 여행을 가도 여기저기 랜덤하게 들어가 둘러보는 걸 좋아해서 유연하게 일정을 조정하는 편이고 잠도 어느 정도는 자야 해서 늘 느슨하게 스케줄을 짜는 편이었다. 반면 남편은 부지런하게 아침 일찍 일어나서 최대한 많이 보고 경험하는 것을 선호하는 타입이었던지라 여행 계획을 짤 때마다 늘 사소한 트러블들이 생겼다. 그래도 국내여행은 언제든 갈 수 있으니 연애할 때는 최대한 나에게 맞춰주었다.
그러다 한 번은 유럽으로 여행을 가기로 했다. 내가 런던으로 유학을 가는 첫해가 시작되는 시기였는데 구남친(현남편)은 그전까지 유럽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서 이참에 같이 바르셀로나와 파리를 여행한 뒤 내가 런던에서 정착하는 일을 도와주기로 했다. 그 마음이 너무 고맙기도 해서 이미 유럽을 다녀온 나는 그를 위해 최대한 맞춤형 코스를 짜기로 했고 그 결과, 마치 패키지 투어 같은 10일의 타이트한 관광 코스가 나왔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둘의 설레는 해외여행이 시작되었는데 결론적으론 완전 삐그덕삐그덕 그 자체였다.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우리는 매일 6시쯤 눈을 떠야 했고 하루 종일 밖에서 돌아다니다가 12시쯤 파김치가 되어 잠을 잤다. 둘 다 예민해져서 툭하면 시비가 붙었다. 뭘 먹어도, 뭘 봐도 별로라고 하는 남친 때문에 열심히 준비한 난 속이 상했고 체력이 너무 떨어진 난 말꼬리를 잡기 시작했다. 결국엔 마지막 일정이었던 런던의 펍에서 둘이 맥주를 한 잔 마시곤 감정이 터져버렸다. 이날 태어나서 처음으로 길바닥에서 노발대발 싸워봤다.
이 여행 이후로는 절대 타이트한 여행을 하지 않았다. 이 다음 해엔 과거의 쓰라린 경험을 반영해 이탈리아 남부에서만 머물며 여행을 했는데 둘의 접점을 찾은 시기였다. 이제 남편은 어딜 가나 여유 없는 여행은 싫다고 얘기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결정한 오늘 고아 여행 일정은 콜라 비치로 가서 바로 옆에 있는 라군에서 카약을 타고 해가 기울 때쯤 베놀림 비치로 갔다가 예약한 저녁 장소로 가는 것이었다. 카약 타는 거 빼고는 일정이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여유 가득한 일정을 짰다.
콜라 비치는 숙소에서 편도로만 한 시간 반 정도가 걸리는 거리였는데 왕복 시간과 머무는 시간까지 넉넉하게 생각해서 택시를 8시간 이용 서비스로 예약했다. 고아의 우버 같은 택시 앱인 고안 마일즈가 잘 되어있긴 하지만, 장소에 따라 택시가 잘 잡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첫날 깨닫고는 우리는 고아에 있는 동안 종종 4시간 8시간의 장시간 서비스를 이용하게 되었다.
택시는 우리를 바닷가가 아닌 어떤 산속의 외진 곳에 내려줬는데 여기서부턴 길이 가파르기 때문에 자기 차로는 갈 수 없다며 지프차를 타고 언덕을 내려가야 한다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지프차 드라이버들이 접근해 콜라 비치로 갈 거냐고 물어봤다. 이것 때문에 걸어 내려가는 사람도 있었지만 슬리퍼를 신고 와서 그 비포장 산길을 걷고 싶진 않았다. 우린 결국 추가로 돈을 내고 지프차를 타고 내려갔는데 얼마나 길이 거친지 거의 디스코 팡팡 타는 것 같은 바운스를 느낄 수 있었다.
10분 정도 내려가니 드디어 숨겨져 있던 바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백사장을 밟으며 파도가 시원하게 몰아치며 부서지는 광경을 감상했다. 몰디브처럼 파란 에메랄드빛 바다보단 우리나라 서해안의 모습에 가까웠고 작은 규모의 아늑한 프라이빗 비치 같은 곳이었다. 물보단 흙의 색이 더 진한 바다였다. 바닷가에서 몸을 반대로 돌려 보면 우리나라 쇠소깍 같은 곳이 있다. 백사장을 경계로 바닷물과 담수로 나눠졌는데 담수 쪽을 콜라 백워터(Cola backwater)라고 부르고 이곳에서 카약을 타는 영상을 SNS에서 보곤 바로 여행 코스에 끼워놓은 곳이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저마다 알록달록한 카약을 타며 이곳의 푸르른 정취를 즐기고 있었다.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다들 밝은 표정으로 유유히 노를 저으며 가는 모습들이 마치 평화로운 야외 놀이공원 같은 경관이었다.
우리도 카약 렌트해 주는 사람과 흥정을 한 뒤 빨간 2인 카약 한 대를 빌려탔다. 나는 신이 나서 남편이 뒤에서 교관처럼 “오른쪽!, 왼쪽!” 구령을 외치면 그 방향대로 노를 저었다. 처음에는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도 않고 물만 계속 내 쪽으로 튀어 애를 먹었는데 이것도 몇 번 하다 보니 금방 익숙해져 요령이 생겼다.
백워터는 생각했던 것보다 규모가 작고 수면이 얕았다. 카약을 빌리는 조건은 두 시간이었는데 백워터의 끝에서 끝까지 천천히 왔다 갔다 왕복하는데 십분 정도 밖에 안 걸렸다. 하물며 백워터의 끝자락은 물이 종아리 중간 정도만 오는 깊이라 내려서 카약을 미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순간 이거 보려고 차 타고 한 시간 반을 온 게 맞는 선택이었을까 싶은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이 자연과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경관에 그 생각은 어느새 잊혀졌다. 우린 기왕 돈 낸 거 좀 더 즐겨보자 해서 다섯 번을 왕복했다. 왕복하면서 모르는 사람들과 인사도 하고 쭉쭉 뻗은 야자수 나무들도 감상하며 이 곳을 한참이나 즐겼다.
카약에서 내린 우리는 가볍게 커피든 맥주든 한잔하자며 바닷가를 마주하고 있는 한 식당을 찾았다. 이곳은 앞, 옆 막힌 곳 하나 없이 지붕과 기둥만 있어 전 좌석에서 시원하게 바닷가를 바라볼 수 있었다. 우리도 가장 앞쪽에 자리를 잡은 뒤 맥주와 진토닉 그리고 매콤한 고아 새우볶음 요리를 시켰다. 바다를 보며 파도 멍을 때렸다가 중간중간 남편과 담소를 나눴다가 다시 멍을 때리고 하는 게 어찌나 힐링이 되던지…
테이블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귀여운 새끼 고양이가 있었는데 여유를 찾아온 관광객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사람들이 익숙한 듯 겁내지도 않고 오히려 옆에 앉아서 대화를 걸듯 야옹야옹 하는데 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내가 더 아쉬울 정도였다. 대신 나도 (물론 상대방은 못 알아들었겠지만) 야옹야옹 소리를 내며 대답을 몇 번 하긴 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남편은 “너 뭐 하냐?”라며 비웃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