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질 무렵의 베놀림 비치는 오전의 평화로웠던 콜라 비치와는 전혀 다른 뷰를 보였다. 베놀림 비치의 해변가에는 수많은 어선들이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올라와 있었고 해가 지기 전 잡아온 물고기들을 팔기 위해 어부들은 부지런히 그물을 털어내고 버킷에 한가득씩 담아 팔고 있었다. 갈매기 떼들은 이 때다 싶어 저공비행을 하며 호시탐탐 어부들의 생선들을 노렸다. 갓 잡은 신선한 생선들을 사기 위해 나온 마을 주민들의 흥정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묵직한 손으로 돌아가 가족을 위해 맛있는 저녁을 준비하겠지? 활기가 넘치는 저녁이었다.
우리는 한동안 모래사장을 걷다가 해변가에 있는 식당의 테이블에 앉기로 했다. 식당가들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가게 별로 호객꾼들이 한 명씩 나타나 우리에게 말을 걸었는데 그중 한 명이 남편에게 마이 프렌드라며 엄청 살갑게 굴어 못 이기는 척 앉았다. 그리곤 코코넛 워터와 라임 소다를 하나씩 시켰다.
음료를 홀짝홀짝 마시며 남편과 얘기를 하고 있는데 이 식당 주인 아들내미 같은 5,6살 되어 보이는 꼬마가 모래가 들어있는 플라스틱 물병을 차며 혼자 계속 축구 놀이를 하고 있었다. 씩씩하게 잘 놀고 있었지만 제대로 된 공도 없이 노는 게 안쓰럽기도 했고 외로워 보여 얘기를 하면서도 눈길이 갔다. 근데 이 친구가 놀아달라는 건지 계속 우리 테이블 쪽으로도 물병을 차는 것이다. 불편하기도 하고 성가신 마음이 들었는데 얼마나 심심하면 저럴까 싶어 우리도 그냥 놔두긴 했다. 우리가 반응이 없자 아이는 다시 방향을 틀어 해변 쪽으로 계속 물병을 차면서 관광객들에게 토스 한 번 하고 호객꾼 삼촌에게도 토스해 봤지만 물병이 돌아오는 횟수는 지극히 적었다. 아이는 한 시간가량을 쉬지도 않고 계속 물병을 찼다.
해는 금방 저물어 깜깜한 밤이 되었다. 그 사이 손님은 한 명 정도만 더 추가되었지만 호객행위는 번번이 실패했다. 도대체 어떻게 이 사업을 유지해 나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사람이 없었다. 손님인 나조차 매상이 걱정되어 저녁 식사라도 시키고 싶었지만 곧바로 예약해둔 저녁 장소로 이동을 해야 했기에 뭘 더 시킬 수가 없었다. 우리는 내내 신경이 쓰였던 꼬마에게 용돈이라도 쥐여줄까 팁을 남길까 하다 먹은 것보다 더 많은 돈을 그냥 주기는 그래서 가격이 좀 나가는 칵테일을 한 잔 추가로 시켜 벌컥벌컥 마시고 나왔다.
이런 순간들이 우리나라에서 살 때는 느껴보지 못한 감정들인 것 같다. 나에겐 당연했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은 곳이 인도이다. 인도에 뭔가 대단한 영적 기운이 있어서라기 보다 너무나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공존하며 사니 사람을 겸허하게 만드는 게 있다. 내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엄청 큰 복이구나 싶어지고 더 감사하며 살아야겠다 다짐하게 만드는 것들이 있다. 그래서 한국에 있을 때보다는 물욕이 줄어든 것도 있고 남들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는 마음도 줄었다. 다시 한국에 돌아가서도 이 마음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우리는 예약한 저녁시간에 맞춰 카바티나(Cavatina)에 도착했다. 이곳은 애초에 고아 음식들을 모던하고 창의적으로 풀어내는 파인다이닝으로 유명하다고 해서 기대를 품고 갔던 곳이다.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아늑한 분위기가 좋았고, 직원들의 서비스와 멘트가 완벽한 파인다이닝 각이었다. 우리는 코스 메뉴를 시킬까 먹고 싶었던 단품 메뉴들을 시킬까 치열하게 고민했다. 난 뭘 먹든 최대한 다양하게 맛있는 것들로만 골라 먹고 싶다는 욕심이 늘 앞서는 사람이라 메뉴 결정은 늘 시간이 오래 걸리는 심사숙고의 일이다.
결국 우리가 시킨 음식들은 한 입 크기의 에피타이저 5가지, 메인 2가지, 6종류의 디저트가 한 플레이트에 나오는 어소티드 플레이트였다. 물론 화이트와인도 한 병 시켰다.
식전빵이 나왔는데 클래식 조합인 버터는 없고 고아 음식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세 가지 소스들을 함께 주었다. 빵에 큰 기대는 없었지만 소스와 함께 맛을 보는 순간 아 여기 맛집 맞네! 제대로네! 확신했다. 남편도 동감이었는지 둘의 눈이 마주쳤을 때 우린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참 이럴 때 맛집에 온 보람을 느낀다.
이미 기분이 좋아진 우리는 시원하게 칠링 된 샤르도네를 홀짝홀짝 마셨고 곧 스몰 디쉬가 나오기 시작했다. 에피타이저들은 인도 내에서 접하기 힘든 비프와 포크 요리부터 훈제한 고등어, 스트릿 푸드에서 영감받은 계란 요리들이 화려한 플레이팅과 함께 서브되었는데 보는 즐거움까지 배가 되었다. 맛은 두말할 것 없이 만족스러웠다.
메인으로 주문한 대구 요리와, 캐슈넛으로 만든 고아 전통술 페니(Feni)가 들어가는 새우 커리 요리가 나왔다. 고아의 새우 커리는 전주의 비빔밥 같은 존재로 워낙 클래식한 요리이다. 일반 커리들에 비하면 새콤한 맛이 있는 게 특징인데 여기에선 페니에 불을 붙여 커리 안에 부어줘서 특별한 향을 추가했다. 플러스알파로 대나무 통밥이 같이 서브되었는데 (여기도 대나무 밥 요리가 있다니!) 대신 여긴 찰밥이 아니라 포슬포슬한 찰기 없는 밥이긴 했다.
고아의 식재료와 전통 디저트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달달한 디저트 플레이트까지 비우니 거의 3시간에 걸 긴 식사가 끝났다. 우린 오늘도 기분 좋게 여한 없이 먹었다며 가득 찬 배를 두드리며 식당을 나왔다. 다음에 고아에 온다면 여긴 필수 코스라며 기약 없는 다음을 외쳐대는 둘이었다.
파인다이닝이 좋은 이유 중에 하나는 창의성과 맛에 집중하게 되어 음식에 관한 얘기를 더 많이 할 수 있고 천천히 먹게 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론 먹으면서 먹는 얘기하는 걸 좋아해서 더 그런 것일 수도 있다. 다른 식당에 가서도 똑같이 하면 되지 않겠냐만 남편과 나는 식사 속도가 빠른 편이라 한 번에 다 가져다주면 얘기에 집중하기 보단 음식이 비워질 때까지 수저를 내려놓지 않는 타입이다. 어딜 가나 빨리 먹고 많이 먹고 술 마시면 더 많이 먹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남편은 우스갯소리로 가끔 넌 먹방하면 딱이겠다 이런 얘기를 한다.
아무튼 카바티나는 고아 최고의 디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