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갈장군
난 머리가 큰 편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안면(顔面)은 보통 크기인데, 두상(頭上)이 크다.
미용실 선생님 말을 빌려서 얘기하자면 '장두형'인데, 남들보다 좀 더 큰 장두형.
머리가 커서 뭐 나쁜 점은 딱히 없다. 지금은.
(건방진 얘기지만) 키도 우리나라 남자 평균 키보다 훨씬 크고(;;;), 나름 운동을 해서인지, 아니면 타고나서인지(!?) 어깨도 평균보다 (쬐금 더) 넓은 편이다.
그래서 머리가 '달랑달랑' 흔들리는 그런 느낌은 전혀 없다. 외형적으로 매우 안정적인 편이다.
그래도 큰 머리와 관련된 에피소드는 나름 있다.
대표적인 에피소드가 '전투모' 에피소드다.
지금은 잘 모르지만 2008년 당시만 해도 훈련소에서 보급되던 전투모는 일명 '빵모자'라고 해서 멋이 없는 펑퍼짐한 모자였다. 그래서 모자를 쓸 때면 '빙구'처럼 보였는데, 다행히 내가 간 자대에는 맞선임이 자대 배치 선물로 '사제 전투모'를 사주는 문화가 있었다.
(생각해 보면 애초에 좋은 전투모를 주지. 왜 빙구 같은 전투모를 줘서 병사들이 사비를 쓰게 했는지. 군대란 정말 이상하다)
주말에 외출을 나가던 맞선임이 묻더라.
"야 니 머리 사이즈 얼마냐?"
"이-병 O-O-O. 62호입니다!"
"O.O : ???"
내가 속해 있던 소대가 발칵 뒤집혔다. 전대미문의 사이즈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듣기로는 사제 전투모를 파는 곳에 62호 사이즈가 없다고 하더라. 최대 60호.
선임들은 당시 내가 쓰고 있던 빵모자 사이즈(챙에 적혀 있었다)를 확인하기도 하고, 줄자를 갖고 와 머리 사이즈를 재기도 했다.
다행히(?) 내 머리 사이즈가 62호 사이즈인 게 확인됐지만 위에서 말한 것처럼 판매처엔 62호 사이즈가 없어 60호 사이즈 전투모를 머리에 욱여넣다시피 해서 쓰고 다녔다. 시간이 지나니 머리가 작아졌는지, 전투모가 늘어났는지 모르겠지만 전투모가 딱 맞아져 편하게 쓰고 다녔다.
(방탄 헬멧은 애초에 워낙 커서 그런지 사이즈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오히려 큰 머리 덕분에 중심이 잘 잡혀(?) 안정적으로 쓰고 다녔다)
미용실을 갈 때면 정말 죄송하면서도, 속으로 웃는다.
두상이 크니 자를 면적도 넓을 것이다. 그러니 미용사 분이 얼마나 힘들겠는가. 숱도 적지는 않은 편인데.
하이라이트는 머리를 감을 때다.
머리를 감을 땐 보통 여성 직원 분이 감겨주시는데, 손이 작으시다 보니 애를 쓰신다. 트랙터가 아닌 괭이로 밭을 일구는 농부처럼 정말 애쓰신다.
두피 마사지를 해주신다며 두 손으로 지압을 해주실 때면 더 죄송스럽다.
그러면서 '내 큰 머리 때문에 얼마나 힘들까. 난 왜 이렇게 머리가 크지'라고 생각하면서 속으로 웃는다.
한 번은 그 속웃음이 미소로까지 나와 변태로 오해를 살 뻔도 했다.
나쁜 기억도 있다. 사실 당시에는 나쁜 기억이 아니었지만 어른이 돼서 생각해 보니 매우 나쁜 기억이다.
초등학생 때 친한 친구의 어머니가 나한테 갑자기 머리가 진짜 크다면서 '대갈장군'이라고 하더라.
그 뒤로 학교에서의 내 별명은 대갈장군, 대두가 됐다.
순진했던 당시의 나는 이 얘기를 웃으면서 부모님에게 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자 어머니가 노발대발하셨다. 어디 남의 집 귀한 아들에게 그런 말을 함부로 하냐고. 그게 애정 표현이겠냐고. 어른이라는 사람이 어찌 그리 무식하냐고. 그러면서 다음에 누가 또 그런 얘기를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
당시에는 어머니를 이해 못했다. 친한 친구 엄마가 한 말이니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오히려 친구와 더 친해진 계기가 된 걸로 생각했다. 진짜 멍청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친구의 엄마는 진짜 못난 어른이었다. 어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11살에 불과했던 어린이에게 '막말'을 한 것이니.
그때의 나는 멍청해서 대꾸할 생각조차 못했지만 지금이라면 정말 논리적으로 요목조목 따졌을 것이다. 한 10년만 늦게 만나지 정말 아깝다.
아무튼 어른이라는 이유로 말을 아무렇게 해서는 안 된다.
그 말이 상대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상대가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막말을 안 하려고 노력한다. 운전을 할 땐 상대의 이상한 운전에 (차 안에서 나 혼자) 욕을 아주 찰지게 하는 경우가 있지만 상대에게 '인신공격' 등의 막말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와이프한테는 종종 말실수를 할 때가 있다. 근데 분명한 건 막말은 아니다. 내 생각엔)
그런데 사회생활을 할 때면 어른이라는 이유로, 상사라는 이유로 막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사람을 종종 볼 수 있다. 어른이 어른에게 그렇게 막말을 하는데, 그 사람들은 애들한테도 막말을 할 것이다.
문제는 자신이 막말을 한다는 걸 모른다는 것이다. 그들은 '네가 잘못했으니 내가 따끔하게 혼내는 거야'라고 합리화하는데 혼내는 게 아니라 분명 막말이다.
이런 유형은 나이 불문하고 다양한 세대에서 볼 수 있더라. 안타깝다.
사실 꿀밤을 한 대 때려주고 싶지만 때리면 경찰서를 가니 그런 사람을 볼 때면 속으로 다짐한다. 나는 절대 막말은 하지 말아야지.
다행히 친구들과 싸운 적은 있어도, 팀원들을 혼낸 적은 있어도 막말을 한 적은 없다. 하늘에 맹세코 한 적이 없다. 내가 사회생활과 프렌드십, 그리고 결혼 생활에 자부심이 넘치는 이유다.
바른말은 우리가 바르게 살아가는 원동력이 된다. 물론 내가 바른 삶을 산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막말은 하지 않으니 나쁜 삶을 살지는 않는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우리 모두가 그런 삶을 살 것이다.
지성인, 특히 우리 어른들은 상대에게 막말을 해서는 안 된다. 어른이 어른에게, 어른이 청년에게, 어른이 어린이에게 등 그 어떤 상대든.
막말식으로 표현하자면 '지가 뭔데' 상대에게 말을 함부로 하는가. 어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막말은 우리 가슴을 멍들게 하고, 의기소침하게 만든다. 오죽하면 '어른들의 명절 막말을 피하는 방법', '갑질하는 막말 상사 대처법' 등이 있겠는가.
말은 조심히 해야 한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는 속담이 있지 않은가.
목 위에 달린 '머리'를 통해 생각을 한 번 하고 말을 하는 것이 필요하겠다. 나도 항상 말을 내뱉기 전에 생각을 한 번은 하고 말을 내뱉는다. 그러니 말실수가 확연히 줄어들더라. 우리 모두가 이 과정이 필요하겠다.
참고로 내 군대 선임들은 62호 논란 이후 내 머리 크기 가지고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소위 말하는 갈굴 때도 막말은 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20살, 21살, 22살 이런 나이였는데...
어른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