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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진 May 07. 2024

정오, 교동


녹음의 계절이다. 파도가 너울거리는 바다를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노라면 계절은 어느새 여름인 것 같다. 점차 바람에 밀려오고 밀려가는 물결이다. 한 사람의 마음도 이렇듯 하루에도 몇 번씩 감정의 파도가 거세게 일기 시작한다.


그래서 당분간은 조용히 지내고 싶었다. 고요함도 있고 아늑한 공간도 필요했던 찰나에 가파른 계단을 따라 올라가 보니 교동에 위치한 작은 미술관이었다. 그날따라 유난히 상쾌했던 동풍이었다. 잘 자란 나무들이 미술관을 에워싸고 있어서 바람에 춤추는 나뭇가지가 마치 피리를 부는 듯했다.


그러다 시선이 낮은 건물에 닿았다. ‘봄봄봄’ 플래카드에 연두색 글씨로 적혀 있는 문구가 마음에 들었다. 날은 말 그대로 봄이었다. 정오의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찰랑찰랑 흔들거렸다. 마치 아기 머리맡에서 모빌이 흔들리는 것처럼 따스했던 찰나였다.


찰나이기 전에 순간이었고 순간이라 하기엔 너무나 선명했던 것. 봄은 짧다지만 어떤 날은 명확하고도 분명해서 영영 잊히지 않는다. 봄날에 피어나는 꽃처럼 순간이 영원하길 바랐던 날들이 있었다. 가끔은 꿈에도 나타나 내 마음을 어지럽히고 가느다란 두 눈을 간지럽히게 만들었다.


햇살 같았던 사람, 입가에 미소 짓기 바빴던 어린 시절에, 길가에 있는 민들레 홀씨 후후 불던 동심은 사라졌지만 고속버스터미널로 가기 전에 책방을 들렸다. 살아생전 삼촌은 어린이날 선물로 내게 동화책을 주셨다. 기억이 흐릿하지만 아마도 ‘늑대와 일곱 마리 아기 염소‘가 맞을 것이다.


이제는 하나의 마음에게 조차 노크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렀다. 가끔은 누구라도 봐주길 바라는 것. 하지만 치부 같은 두려움이 앞서서 누구도 믿지 못하는 지경에 처했을 때, 그때는 정말 어른이 되어있더라. 어느 시인의 말처럼 ‘때로는 길을 잃기 위해 신발을 신는다’ 때로는 돌아올 곳이 필요해서 떠나는 여행이다. 다시, 돌아와 보니 봄이 가고 있다.


강릉 시립미술관에서 바라 본 바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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