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텝의 예술
예술
예술의 사전적 정의는 '①아름답고 높은 경지에 이른 숙련된 기술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또는 '②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인간의 활동 및 그 작품'이다. ①의 경우는 육체로 이루어지는 대게의 스포츠들에서 언급된다.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3점 슛, 엄청난 체공시간에서 이루어지는 더블클러치, 예술이라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지단의 퍼스트터치, 호날두의 감각적인 시저스 킥, 피겨선수의 트리플악셀, 기계체조선수의 공중회전, 태권도의 뒷차기, 복서의 놀라운 회피 등, 이것은 모두 숙련된 기술이 만들어 낸 예술이다. 그렇기에 상대적으로 난이도가 높고 쉬이 드러나지 않으며, 때문에 예술이라 불리며 회자된다.
②의 경우 역시 스포츠에서 언급되지만, ①의 경우와 달리 주로 미를 추구하는 것 자체가 목적인 스포츠에서 언급된다. 바디빌더의 프런트 더블 바이셉스, 피겨선수의 비엘만스핀, 리듬체조, 태권도 품새, 우슈 투로, 카포에라 등이 그것이다. 물론 미가 목적이 아닌 스포츠에서도 예외적으로 언급될 수 있으며, 대표적인 예로 택견과 태권도, 복싱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스포츠들은 스텝이 현란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물론 택견의 경우 태권도나 복싱처럼 뒤꿈치를 들고 통통 뛰는 것이 아닌 한 발을 바닥에 붙이는 스텝을 사용하지만, 움직임 자체가 뻣뻣하지 않고 부드러운 춤처럼 아름답다.
얼굴이나 몸매가 예술이라는 말이 있듯이, 예술이나 아름다움은 간단히 말하면 '보기 좋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지금 말하는 예술은 육체의 예술을 뜻하기에, 추상주의 그림같이 직관과 본능의 시선을 벗어나는 독특한 예술의 경우는 제외한다). 춤이나 스포츠 등을 수련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사람들의 눈에 '보기 좋게' 움직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춤 하나를 추더라도, 내 생각보다 동작을 매우 크게 해야 하며 또 그것을 연속적으로 소화해 내는 일은 체력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꽤나 부담이 되는 일이다. 태권도를 할 때도, 옆차기를 하든 내려 차기(들어 찍기)를 하든 다리를 쭉 뻗어 좋은 각도를 만들어 내는 일은 유연성 측면에서 고난이도에 가깝다. 복싱을 할 때도, 잽이나 스트레이트를 쭉 뻗는 일은(특히나 그것이 실전에서 습관적으로 행해지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 몸의 회전을 잘 이용하는 것은 물론 팔에 힘을 빼고 어깨를 깊게 집어넣어 타격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스포츠는 자세가 제일 중요하다는 말이 있다. 정확하고 보기 좋은 자세에서 유연한 움직임과 강한 임팩트가 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춤과 태권도, 복싱은 크고 쭉 뻗은 동작들이 아름답다는 공통점이 있다.
스텝의 예술
택견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알겠지만, 팔은 흐느적거리듯이 날리고(활개짓) 다리와 골반은 우스꽝스레 뒤뚱거린다. 전통 춤을 연상케 하는 이 동작은 태견의 보법(스텝)인 품밟기다. 복싱 역시 마찬가지다(태권도는 복싱과 스텝이 상당히 유사하므로 생략하도록 하겠다). 콩콩이 혹은 펜듈럼이라 불리는 스텝을 많이 뛰는 아마추어 복서의 움직임을 보면 앞손은 죽 내밀어 힘 없이 흐느적거리고, 두 발은 앞뒤 혹은 위아래로 통통거리며 마치 춤을 추듯 움직인다(전직 러시아복서 알렉세이 티쉬첸코가 그 대표적인 예시). 택견의 품밟기와 복싱의 스텝은 우스꽝스레 보일지언정 사실상 두 스포츠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복서의 스텝은 풋워크라고 불리지만, 필자가 말하는 스텝의 경우는 걷는 것이 아닌 점핑스텝이기에 풋워크라는 말이 사용에 적절치 않다고 판단되었다). 품밟기는 보법은 당연하거니와 힘의 쓰임과 자연스레 이어지는 움직임의 모든 것이 담겨있는 기본 중의 기본이며, 복싱 스텝 역시 체중이동을 하는 법과 이동한 체중을 실어 때리는 법 및 페인팅과 인 앤 아웃 등 모든 것이 담겨있는 핵심중의 핵심이다. 물론 품밟기와 스텝은 금방이라도 급히 부딪힘이 일어날 것 같은 초근접에서 쓰는 발기술이 아니라, 중장거리에서 기회를 보고 리듬을 잡으며 유연한 대처 및 공격을 하기 위한 준비 동작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근접전이나 긴 라운드를 보내야 하는 프로복싱 같은 곳에서는 난투 및 체력소모를 고려해 현란한 스텝을 쉬이 밟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기에 프로에서 현란한 스텝을 보여주는 선수들은 최고의 자리에 군림한다. 이노우에 나오야, 파퀴아오, 로마첸코, 무하마드 알리가 그 대표적인 예시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쏴라'던 알리의 말은 '춤추듯 스텝을 뛰다가 한순간에 뛰어들어 빛처럼 타격하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스텝이란 '발과 발목의 움직임으로 체중을 옮기는 동작, 즉 뛰고 걷는 모든 움직임'을 뜻하며 이는 마치 춤처럼 아름답고 예술적이다. 재밌게도 춤과 스포츠로 이어지게 되는 모든 움직임은 생존을 위한 인간의 몸부림에서 시작되었다. 부족의 안녕을 위해 또는 기우제 등 자연현상에 대한 그들의 바램을 위해 제사의식을 지내며 시작된 것이 춤이며, 동물이나 타부족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고 반격하기 위해 시작한 행동들이 지금의 스포츠가 되었다. 목숨을 건 투쟁,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 이토록 아름다운 예술로 승화될 수 있었던 이유는, 생존만큼 인간의 육체 행위에 있어 순수하고 확실한 동기와 몰입이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목숨을 내걸었던 그 행위들이 지금의 춤이나 스포츠로 불리며, 어느 수준에서는 예술이라고 불린다 생각한다.
복싱과 같은 격투기는 현재에도 남아있는 인간의 생존 행위와 가장 가까운 스포츠라고 할 수 있다. 말이 좋아 스포츠이긴 하지만, 서로 죽일 듯 맞고 때려야 하며 심각할 경우 죽거나 중태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복싱은 정말 예술적인 스포츠라고 생각한다. 복서의 스텝, 그중에서도 통통 튀는 콩콩이 스텝 혹은 시계추처럼 움직이는 펜듈럼 스텝을 보면 춤추듯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며 공수가 물 흐르듯 한 타이밍에 이루어진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이러한 스텝은 엄청난 체력을 요구한다. 아웃복싱 혹은 인 앤 아웃을 강점으로 삼은 복서들은 스텝이 살아있는 동안은 원하는 타이밍에 때리고 덜 맞는 복싱을 구사할 수 있지만, 스텝이 죽는 순간은 상대적으로 흠씬 두들겨 맞게 되는 것이 숙명이다. 복서에게 스텝이란, 정말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과도 같은 것이다. 그렇기에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