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서 캠핑> 외전 #1
80년대 초, 폭증하는 수도권 인구유입으로 인해서 서울 근교 위성도시에는 매년 새로운 초등학교가 세워지곤 했다. 수도권으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의 주거를 분담하는 기능을 하기는 했지만, 그곳에서 아이들이 성장을 하면서 서울과 비슷한 문화 / 교육적 혜택까지 받게 되는 것까지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그저, 70년 전후로 태어난 한국이 베이비붐 세대의 아이들을 잠시 떠안은 후 밀어내기 바쁜 보육소와 같은 도시 분위기가 있었다. 정부 주도의 도시 개발 덕분에 비슷비슷하게 생긴 아파트, 연립주택들이 들어섰고 그것에서 학교까지 걸어서 통학하는 데에는 대략 한 시간 정도 걸렸다. 물론 성인이 걷기에는 30분도 안 걸릴 거리였지만, 통학로 주변에 놀거리들 - 지금은 생각만 해도 위험한 논두렁, 밭두렁, 뒷산, 묘지, 공사장, 덤프트럭 등 - 깔려 있는 상황에서 일직선으로 등하교만 하는 초등학생은 없었다.
남자와 여자가 다르고, 여자 아이들이 더 이상 남자아이들처럼 코를 흘리지 않고 얼굴 버짐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무렵, 그리고 남자아이들을 따돌리면서 자기들끼리 (어른 흉내를 내면서) 속 깊은 대화를 나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즈음, 그리고 그녀들의 등짝 스매싱이 엄마의 그것과 비슷한 대미지를 입힌다는 걸 알게 되었을 즈음, 남자아이들끼리 분연히 일어나 여자 아이들에게 대항할 특공대를 만들었다. 이름하여 <송충이 특공대>
당시 신도시 계획이란 그냥 수도권 인구를 수용하고 아이들을 보육하는 것 외에는 없어서, 초등학교 (당시 이름은 '국민학교') 주변에는 정말 아아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사실 초등학교 내에도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월요일 조회를 마치면 운동장에 돌 줍는 일을 했고, 체육시간에도 돌을 주웠다. 농땡이를 부려 옆 분단에 비해 돌 채집량이 떨어지면 단체로 (깍지 끼고) 엎드려뻗쳐를 한다든지 심하면 '원산폭격'의 벌을 받기도 했다 (초동학교 2학년 생에게!!). 신축학교는 대개 논밭을 매입해서 그 위에 덜렁 지어 놓은 것이어서, 주변엔 여전히 논이나 밭이 가득했다. 아이들은 개구리와 올챙이, 방아깨비를 던지며 놀았고 여름날에는 종종 (논으로부터 습기가 올라 와) 심한 안개 때문에 학교가 완전히 사라지는 경험을 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당연한 것처럼 뒷산이 있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모든 학교의 교가에는 "**산 정기받아~"라는 구절이 있지 않은가? '송충이 특공대'가 활동했던 뒷산은 무슨 '정기'가 흘러나올 정도로 멋진 정경은 아니었지만, 산 입구부터 저어어 위까지 - 적어도 초등학생들이 올라갈 수 있는 곳 까지는 아까시나무 (실제 '아카시아 나무'는 완전 다른 종입니다)로 가득 차 있었다.
지금이야 '송충이'라는 게 '솔나방'의 유충이라는 걸 알고, "송충이는 솔잎만 먹어야지~"라는 속담이 존재한다는 것도 알지만, 그 당시에는 털이 나고 길게 꿈틀대며 기어 다니는 유충을 죄다 '송충이'라고 불렀었다 (이 글에서도 이후에 털 많은 애벌레를 그냥 송충이라 부르겠습니다). 초등학생뿐만 아니라 교사들도 모두 그렇게 알고 있었고, 당연히 아까시나무 잎을 뜯어먹고 사는 벌레 역시 '송충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다. 당시에는 소나무 보호를 위해 '송충이 채집 운동'이라는 걸 하기도 했었기에, 장난꾸러기 초등학생 남자아이들에게 송충이를 맨손으로 잡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걸 잡아서 어쨌냐고? 당연히 친구들에게 던지고, 친구 책상 서랍에 넣어두고 그랬지 뭐 (당시 송충이는 남녀 따질 것 없이 모든 이들의 장난감이었던 상황이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에이~ 친구끼리~'와 '그냥 장난한 거 가지고~'라는 문장은 언제나 가해자들의 전유물이다).
송충이를 만지기 싫어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송충이를 이용해서 장난을 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사람들이 나무 밑으로 지나갈 타이밍을 맞춰 얼른 나무를 발로 찬 후 도망가는 것이었다. 그럼, 뭐, 예상대로 그 나무에선 송충이 비가 쏟아지는 동시에 그 아래로 지나가던 사람들의 욕지기가 터져 나올 즈음엔 이미 범인들은 저 멀리로 줄행랑을 치고 있었다. 특공대 중에서 <결사대>라는 조직이 따로 존재했는데, 말하자면 자살폭탄 테러를 감행하는 아이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송충이를 손에 들고 여자 아이들의 얼굴에 던지거나 목덜미에 던지거나, 등에 집어넣거나, 음식 위에 떨어뜨리거나 하는 일을 했는데, 대부분 현장에서 붙잡혀 숨이 끊어지도록 얻어맞곤 했다. 아니면 두세 배의 송충이 무리를 셔츠 안으로 집어넣은 채 등짝 스매시를 맞는 피의 보복을 받기도 했다. 그 때문인지 결사대 아이들의 티셔츠는 노란색, 초록색 얼룩이 흥건하곤 했었다. 그렇게 얻어맞고 돌아오는 결사대 아이들에게, 특공대에서는 훈장을 수여했다. 손만 뻗으면 누구나 딸 수 있었던 아까시나무 꿀이었지만......
2022년 BC-Day (BC주 기념일) 연휴는 골든이어즈 주립공원에서 캠핑을 하면 보냈다. 이전에는 장애인용 사이트라고 해서 일반인이 예약할 수 없었던 곳으로 알고 있었는데, 지난번 주립공원 캠핑 예약 사이트를 바꾸면서 주립공원 정책이 바뀐 것인지는 몰라도, 2개월 전 캠핑 예약을 할 때 이 사이트로 예약이 되어버린 것이다. 올 6월 초 골든이어즈로 캠핑을 왔을 때 지나가면서 슬쩍 구경을 왔을 때에도 장애인 마크가 달려있지 않은 차량이 세워져 있던 걸로 봐서, 전산오류로 예약이 된 것이 아니라 주립공원 정책이 바뀐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고 보니, 캠핑 예약을 할 때에도 아예 장애인 전용 사이트를 고르는 옵션이 사라졌다. 단지 예약 결제 시에 장애인 할인 옵션은 경로할인, 국가유공자 할인과 함께 여전히 존재한다.
장애인 사이트의 특징은 화장실, 샤워실이나 수도와 같은 편의시설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는 점, 그리고 (휠체어 사용이 쉽도록) 바닥이 흙이나 자갈이 아니라 아스팔트 포장 바닥이라는 점이다. 텐트 캠퍼들을 위한 육각형 모양의 고리가 아스팔트 바닥 위에 있기는 하지만, 육각형 모양 (Hexadome)이 아닌 텐트를 쓸 때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처음에 우리가 예약한 캠프 사이트가 장애인용 사이트라는 사실을 알고는 처음 들었던 걱정은 '텐트를 어떻게 쳐야 하나...'였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정말이지 귀여운 투정이었다고 생각된다. 사실 아스팔트 바닥의 진정한 문제점은 새들이 벌레를 쪼아 먹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8월 초, 전나무에 둥지를 틀고 있는 나방의 송충이들이 쏟아져 나올 시기. 결국 우리가 머물렀던 사이트는, 새들의 도움 하나도 없이 송충이들의 융단 폭격을 꼼짝없이 감내해야 했다. 몇몇 가벼운 놈들은 거미줄과 같은 얇은 실에 매달려서 바람을 타고 날아다니기도 했고, 큼직한 놈들은 천막 위를 타고 올라가다가 어깨나 머리 위로 툭 하고 떨어지곤 했다.
처음에는 "우와, 오랜 만이네!! 어릴 적에 송충이 들고 장난 많이 했는데!!" 하며 낄낄대고 웃기도 하고, "에이... 그래도 다 생명인데, 얘들도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원래 얘네들이 살던 땅인데 우리가 침략해서 캠핑하는 거잖아. 우리가 참아야지.." 등등 환경주의자 코스프레를 하면서 팔 위로 올라가는 벌레는 살며시 밀어내기도 했다. 같이 캠핑을 하던 멤버 중에는 아주 질겁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쩔? 갑자기 왠 약한 척?" 하면서 살살 털어내주었다. 꼬물꼬물 거리면서 기어 다니는 걸 보고 있자니 귀엽기도 해서 굳이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나자 처음에는 질색하던 사람들도 "이게... 우 쒸..." 하면서 대담한 손놀림으로 툭툭 털어내게 되었다.
하지만, 이건 많아도 많아도 너무 많았다. 다른 사이트들은 우리처럼 벌레퇴치에 열중인 사람들이 없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를 보면, 곤충끼리는 집단적 텔레파시를 통해서 커뮤니케이션을 한다고 했는데, 아마도 우리 사이트에 천적이 없다는 것이 소문났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시면서 떠들다가, 10분마다 일어나서 서로의 의자와 어깨, 머리 등에 송충이가 없는지 검사해 주는 운동을 했다. 그러다 보니 이번 캠핑을 마치고는 고질적인 좌골신경통이 없었다. “어이구… 우리 송충이 덕택에 이렇게 캠핑 와서도 꾸준히 운동을 다 하네…” 하면서, 이때까지만 해도 희희낙락하는 캠핑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술을 마시고 노닥거리고 있는데, 사람들이 여기저기를 슬슬 긁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이곳저곳에 붉은 반점이 생기고 있었다. 멤버 중 한 명은 송충이를 털어내다가 목 부위에 두드러기가 돋았다. 송충이가 등에 있는지 모르고 의자에 앉다가 짓눌러 터뜨린 아내 역시 등에 심한 두드러기가 돋았다. "이게 뭐지? '에일리언'처럼 체액이 산성인가?" 가려움증이 점점 심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송충이가 원흉으로 지목되었고, 조금 전까지 박애주의 철철 넘치던 자연사랑 캠퍼들은 이제 눈에 불을 뿜으면서 송충이가 보이는 대로 족족 잡아 죽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살육이 시작되고 얼마 안 되어서 송충이들의 접근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아... 역시... 이것들이 텔레파시를 통해서 지들끼리 소문을 내고 있는 게 맞는구나' 싶었다.
손으로 털어낸 후 발로 짓밟는, 녹색 피가 넘쳐나는 참극이 계속되는 가운데에도 가려움증은 멈추질 않았다. 아니 그보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나는 무척 힘이 빠지고 졸리기 시작했다. 심장이 두근대고 팔이 덜덜 떨렸다. 푹 자고 일어난 다음 날 아침에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목 디스크가 온 것처럼 팔을 들어 올리기 힘들었다. 마침, 올해 들어 가장 더운 날이어서, 이게 알러지 쇼크 때문일 거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냥 더위 먹은 거겠지 생각했다. 틈만 나면 셔츠를 물에 푹 적셔 입어서 몸의 열기를 빨아들였다. 그러고 나면 어지러움증도 간지러움도 잠시 나아지는 듯했지만, 옷이 마르고 나면 곧바로 또 어질어질해지곤 했다. 그래서 돌아오는 날에는 운전을 위해 낮잠도 알아서 자고, 밥도 알아서 챙겨 먹는 등 몸 관리를 주도적으로 해야 했다.
나중에 집에 돌아와서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그 털 애벌레의 정체는 'Douglas Fir Tussock Moth'의 유충이었다. 한국말로 번역해 보면 '더글라스 전나무 독나방 애벌레 (쿠궁!!)'. "독(!) 나방'이라니! 아니, 이보시오 독이라니요!" 알고 보니, 북미에서는 해마다 산을 찾는 많은 사람들이 알러지 피해를 입는 애벌레였다. Tussockosis라는 알러지 병명도 존재했다 (https://www2.gov.bc.ca/assets/gov/farming-natural-resources-and-industry/forestry/forest-health/douglas-fir-tussock-moth/douglas-fir_tussock_moth_tussockosis_pamphlet.pdf). 전체 인구의 20% 정도가 이 애벌레 털에 알러지를 가지고 있는데, 가려움증과 같은 단순 증세부터, 피부발진, 소화불량, 복통, 현기증, 호흡곤란, 저혈압, 의식저하까지 갈 수 있는 무서운 놈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애벌레의 체액이 문제가 아니라 털 때문에 알러지가 오는 것이어서, 아무리 송충이를 발로 밟아 죽인다고 하더라도, 그 송충이를 손으로 털어내고 그 손으로 다른 피부를 만지면 얼마든지 발진이나 다른 알러지 쇼크가 일어날 수 있다는 얘기였다. 둘째 날 화장실에 들락날락해야 했던 건 맥주와 과민성 대장 증상 때문이 아니었단 말인가??!! 내가, 왕년에 특공대 출신인 내가, 송충이 알러지라니!!!
몇 년 전, 피스타치오를 안주로 해서 맥주를 마시는 것에 재미 들린 적이 있었는데, 이상하게 그러고 나면 꼭 목이 간질간질하고 몸이 나른한 것이 감기에 걸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처음에는, '음... 감기 기운이 있는 줄 모르고 맥주를 너무 마셨나??' 싶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피스타치오에 알러지가 있었던 것이다. 늙어가면서 몸도 성격처럼 점점 더 강퍅해지는 현상은 받아들이기 싫었지만, 뭐 아무래도 면역력이 약해지는 거겠지 싶었다. 그런 것처럼, 아무리 어릴 적에 송충이를 한 움큼씩 들고 다녔다고 할지라도,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서 면역성이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구나.
아무튼, 은미야, 선영아, 희숙아, 춘옥아. 2학년 8반 아이들아. 내가 미안해. 사실 나도 송충이가 징그러웠지만 괜히 쎈 척하고 싶었어. 그래서 얻어맞아 가면서도 내 용기를 전해주고 싶었어. 너희들이 싫어하던 일을 한 것에 대해 무척 창피하고 후회하고 있어. 이제 나는 송충이 알러지도 생기고 대머리도 되었어. 인과응보라고 생각할게.
8월 21일 추가 : 3주가 지나서야 캠핑장에서도 상황을 인지했다. 그때 이 정보를 미리 알고만 있었어도 오랫동안 피부질환으로 고생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여윽시 캐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