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첫 캠핑 1 - 앨리스 호수 주립공원
슬램덩크 세대라고 자신 있게 말하긴 좀 애매한 부분이 있다. 슬램덩크가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기 시작한 시점이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강백호의 활약이 눈길을 끌던 지역대회 4강전부터였고 그게 한국 만화잡지에 연재될 무렵이 92-93년 즈음. 당시 과외 알바를 하던 친구들이 자기가 가르치던 학생들로부터 권유를 받는 경로로 대학가에도 팬덤을 형성하게 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슬램덩크와 농구대잔치와 드라마 <마지막 승부> 덕분에 전국에 농구열기가 끓어오르던 시대 이전인 80년대 후반의 고등학생들에게도 농구는 무척 인기가 있었다. 왜 갑자기 농구가 인기를 모으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언제부턴가 각 학교의 운동장마다 농구대가 설치되기 시작했었고, 국내 유명 스포츠 브랜드에서도 BB화라는 이름의 (Converse 브랜드 신발을 카피한) 캔버스 농구화를 출시하기도 했으며, 공 하나 가지고 스무 명이 몰려다니는 축구에 비해 보다 어른스러운 운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모든 취미생활이 그렇듯이 - 당구에 빠지면 침대에 누었을 때 천장이 당구대로 보이고, 낚시에 빠지면 스쳐 지나가는 호수에서도 물고기 냄새를 맡듯이 - 그 시절 고등학교에서도 만사를 제쳐두고 농구에만 매달리던 친구들이 있었다.
보통 2교시 쉬는 시간에 약속한 듯이 도시락을 다 까먹고 점심시간 종이 울리면 신나게 농구장으로 뛰쳐나가 하프코트에서 한 시간 동안 땀을 빼고 들어왔다. 어떠다가 반 대항 풀코트 경기라도 열리면 응원단까지 대동되었다. 그중 기억나는 한 장면은 폭설주의보가 내린 어느 겨울날이었는데, 아예 새벽같이 학교에 와서 묵묵히 농구장 눈을 치우던 친구 석희(가명, 17세)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쉬는 시간마다 나와 눈을 치우더니 결국 점심시간 종이 울리자마자 마치 별일 없었다는 듯이 눈을 맞으며 친구들과 농구를 즐겼다. 그 정도면 석희(가명, 17세)의 열의를 친구들이 존경하거나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의 노력에 감사해야 마땅했지만, 우리는 그 친구를 '농구에 미친 석희(가명, 17세) 새끼'라고 놀렸었는데 지금 이렇게 호우주의보가 내렸고 강풍을 동반한 눈까지 내릴 수도 있는 상황에서 우중캠핑을 즐길 계획을 세우는 내 모습을 누군가가 목격한다면, 나 역시 '캠핑에 미친 동선(필명, 50대) 새끼'라고 불린다고 해도 뭐라 변명할 여지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이번에도 출발 전부터 (당연한 것처럼) 소소한 사건이 있었다. 출발 전 날, 차에 기름 넣고, 프로판 가스 채우고, 마지막 먹거리 쇼핑을 하러 나서면서, 저녁 준비하기 번잡스러우니 비도 오는데 뜨끈하게 베트남 국수를 사 먹고 가자고 했다. 한국에서 삼성페이가 보편적이라 굳이 지갑을 들고나가지 않아도 웬만한 결제는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캐나다에서도 애플페이나 NFC 방식의 삼성페이로 결제를 할 수 있어서 지갑은 집에 둔 채 운전면허증과 휴대폰만 들고 나섰는데, 근사한 쌀국수를 다 먹고 일어섰더니 식당에서 인터넷이 안되어 현금 결제밖에 안 된단다. 몇 번 시도해 봤지만 어림도 없다. 그러더니 길 건너에 은행이 있으니 거기서 현금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이럴 거면 테이블에 앉기 전에 미리 알려줬어야 하는 것 아닌가? 조금 화가 났지만, 뭐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는 법이어서 그냥 은행으로 나섰다. 그 와중에도 타 은행에서 현금을 찾으면 수수료가 나갈 것 같아 차를 끌고 주거래 은행으로 향했는데, 은행 주차장까지 거의 다 와서 생각이 났다. 아. 맞다. 지갑을 안 가지고 왔지 (깊은 빡침). 별 수 없이 집으로 향한다. 그러다가 실소가 새어 나왔다. 아니 지금 우리 캠핑 가려고 준비하는 것 아니었나? 편한 집 놔두고 돈 내고 노숙하려고 하는데, 장작 때서 난방하려고 도끼 챙기고, 혹시 비 와서 장작 못 땔까 봐 프로판 가스 챙기고, 비 피하려고 타프 챙기고 밧줄 챙기고 하는 건데, 고작 애플페이를 핑계로 지갑을 안 챙기고 쇼핑을 나섰다니... 도시인의 캠핑 생활이란 무척 모순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망설이지 않았던 건 아니다. 워낙 날씨예보가 무척 심각했었는데, 평소에는 손바닥 뒤집히듯이 잘도 바뀌던 그 예보는 출발 일주일 전에도, 이틀 전에도 변하지 않았었다. 게다가 1월 3일, 올해 주립공원 캠핑 예약 사이트가 열었을 때 뛰어 들어가 잡은 예약에 뭔가 문제가 생겨서 부활절 연휴 중에 한번 장소를 옮겨야 하게 되었다. 금요일부터 월요일까지 4일 중 금, 토는 앨리스 호수 주립공원에서 일, 월은 포트코브 주립공원에서 지내게 된 것이다. 둘 다 스쿼미시에 있고 차로 30분 내 거리에 있지만, 비가 내리는 날 캠핑 짐을 걷은 후 다시 설치하는 일은 그다지 즐길만한 일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출발 이틀 전에도 부분적으로 돈을 날리더라도 취소를 해야 하나 아내와 상의를 해봤지만, 우리 둘 다 반드시, 꼭 가고 싶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날씨 때문에 취소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는, 애매모호한, 마치 쿨병 환자들과 같은 의견이어서 그냥 가기로 했다. 비가 뭐 하루 종일 오겠어? 가끔 갤 때 놀면 되겠지. 또 막상 나가면 좋잖아. 뭐 이런 식으로.
한 달 전에 차 정비를 받고, 일주일 전에 트레일러 점검을 마치고, 주중에 덩치 큰 짐은 미리 차에 실어두고, 금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준비한다고 했는데도 9시 반이 되어서야 출발하게 되었다. 매년 첫 캠핑은 아무래도 깜빡 빼먹는 것이 많아서 좀 더 꼼꼼하게 점검을 해서 그런 건지. 준비 과정은 좀 번거로웠지만 또 막상 길을 나설려니 설렌다. 앨리스 호수엔 2021년 5월에 마지막으로 가 보고 작년에는 한 번도 안 갔었으니 또 어떻게 바뀌었을지 또 궁금하기도 하다. 아니나 다를까 공원 입구로 들어가는 길이 회전 교차로가 생겼다. 그리고 오랜만에 가 본 엘리스 호수 캠핑장은 기억보다 각 사이트가 무척이나 넓고 사이트 간의 간격도 충분해서 좋았다. 광역 밴쿠버에 있는 캠핑장 중에 프라이버시로는 어쩌면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살벌한 일기예보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사이트에 캠퍼들이 가득 차 있었지만, 소란스럽지도 않고 공용 화장실도 무척 깨끗한 상태로 유지되어 있었다. 아, 그리고, (장소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었으나) 이제 LTE 데이터의 수신 상태도 많이 좋아져서, 스트리밍까지는 못했지만 넷플릭스 영화를 다운로드하여 보는 일은 가능했다.
도착할 때 즈음엔 빗줄기가 제법 가늘어져서 얼른 트레일러를 펴고, 가제보를 세우고 그 사이에 타프를 쳐서 트레일러와 천막 사이에서도 비를 안 맞을 수 있도록 했다. 그런 다음 가제보 옆에도 타프로 벽을 만들어서 가스난로의 온기가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했는데, 이것만으로도 무척 호화로운 캠핑이 되는 것 같았다. 따닥 거리는 빗소리와 함께 음악을 들으면서, 난로에 발을 녹이면서 비 내리는 침엽수림 정경을 바라보고 있으니까 정말이지 더할 나위 없었다. 게다가 중간에 비가 멎고 해가 고개를 내밀면서, 나무에 걸린 빗방울이 반짝거리고 나무 등걸에서 뿜어 나오는 거친 호흡을 보면서 산책을 하면서 4월 첫 캠핑 중에서 올해가 어쩌면 베스트가 아닐까 생각도 들었다. 적어도 이때까지는.
비 내리는 날 캠핑을 하면 아무리 소소한 일이라도 아무래도 번거로워지기 때문에 이번에는 캠핑장에서의 조리과정을 최대한 줄이기로 했다. 전기가 들어오는 사이트라서 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전자레인지나 에어프라이어를 쓸 수 있으니까. 출발 전 날 한국 슈퍼에서 사 온 감자탕 밀키트로 첫날 저녁과 다음날 아침까지 커버할 수 있었고, 이튿날 저녁엔 집에서 미리 양념을 해서 간 돼지 목살을 에어프라이어에 돌렸다. 역시 미리 만들어 둔 양념을 가지고 간단하게 야채를 버무려 샐러드를 만들고 아스파라거스 역시 에어 프라이어에 돌려서 고기에 곁들였다. 둘째 날은 거의 하루종일 비가 왔기 때문에, 가제보 안에서 책을 읽고, 미리 받아간 영화를 두 편이나 보고, 따뜻한 음식과 함께 술을 마시며 보냈다. 아! 그렇지. 작년 초에 수리해 둔 창문 씰에 또 틈이 생겼는지 침대로 물이 새어, 중간에 빗속에서 창문에 타프를 치는 약간의 소동도 있긴 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폭우가 쏟아지는 날에 생길 수 있는 해프닝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