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든이어즈 주립공원 - 골드크릭 캠핑장
이민 와서 처음에 자리 잡은 곳은 외곽 지역의 임대용 아파트 단지였다. 지금은 한번 이사를 가려면 어떤 동네의 범죄율, 대중교통이나 도로 사정, 근린 시설 등 이것저것 따지게 되었지만, 밴쿠버에 발을 막 내디뎠을 때는 고개를 쳐들지 않고도 뻥 뚫린 파란 하늘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감격스러웠었다. 모든 건물들이 나지막하게 자리해 있었고, 건물 주변의 많은 나무들이 건물들 키를 훌쩍 넘어 자라 있었다. 따가운 햇볕을 받으며 걷다가도 가로수 아래에 서있으면 서늘해지는 느낌도 좋았다.
서민들, 사회 소외계층, 초기 이민자들이 주로 살았던 아파트 단지였는데, 단지 뒤편으로 잔디구장 (주로 모여서 야구를 했었다)이 있었고, 단지 내에는 작은 풀장이 있어서 아이들과 노인들이 헤엄을 치고 놀기도 했다. 물론 모든 시설이 '럭셔리'라는 단어와 절대 어울리지 않은, 무척 아담하고 소박한 시설이었지만, 서민 임대 아파트 단지에 이 모든 시설들이 있다는 것만으로 너무 커다란 문화적 충격을 받았었던 기억이 난다. 건물 자체는 40년 된 노후한 목재 아파트 (60살이 된 지금도 그 아파트는 여전히 건재하고 임대 중이다) 였지만, 침실 한 개짜리 아파트가 무척 넓어서 당시 키우던 강아지가 거실에서 여기저기로 뛰어다니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무척 행복했었다. 처음에는 차가 없어서 주로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시장을 보고는 했었는데, 그러다 보니 "밴쿠버 왔으니까 여긴 한번 꼭 가봐라"라며 지인들이 추천해준 밴쿠버 명소도 쉽게 가볼 수는 없었다. 어딜 놀러 다닌다는 것도 주로 걸어서 동네 산책 같은 것 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눈과 마음이 즐거웠다. 1년 차 초기 이민자인 우리에게 밴쿠버의 생활환경 모든 곳은 여전히 관광지와 같았고, 우린 도보로 이국의 어느 마을 뒷골목 탐험을 하는 관광객의 마음이었다.
하지만, 몇 달 후 여름이 되면서, 이민 오기 전에 어느 정도 세우고 있었던 모든 계획이 어그러지고, 또 마침 구직활동마저 좀처럼 성과를 내지 못하는 날들이 반복되면서, 처음 느꼈던 그 감사함을 계속 가지고 있기에는 무척 팍팍하고 마음만 바쁜 시기로 들어섰다. 매일 하던 동네 탐험도 더 이상 신기하거나 즐겁지 않아서 다른 곳으로 훌쩍 여행을 가볼까 생각하더라도, 변변한 고정수익이 없는 상태에서 승용차를 덥석 사기에는 용기가 나지 않았다. 집 앞 산책 한번 하는 것도 불안해지고, 계속 컴퓨터만 바라보면서 구인공고를 확인하고, 이력서를 고치고, 번역 알바를 하고... 또 잠시 머리를 식히는 것조차 집 안에서 갇혀 만화책을 읽거나 컴퓨터로 한국 예능 프로그램을 보는 걸로 소일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 지인분이 차편을 제공해주신 덕분에 '골든이어즈 주립공원 (Golden Ears Provincial Park)'에 처음 가보게 되었는데... 처음 들었던 건 "이런 게 바로 별천지이구나" 하는 감정이었다. 당시 처음 정착했던 동네에 있던 나무들을 봐도 '무슨 사람이 거주하는 동네에 이렇게 큰 나무들이 있나?' 하는 느낌이었었는데, '골든이어즈'의 침엽수림은 큰 나무에 대한 내 사전적 정의를 다시 하게 만드는, 하늘 높이 치솟은 침엽수들이 빽빽하게 (왕복 2차선) 도로를 따라 도열하고 있어서 왠지 거인들에게 엄청난 환대를 받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수많은 초록들이 눈앞에 가득하다 보니까, 마치 나는 가만히 정지해있고, 거대한 초록색 파도들이 좌우로 갈라져서 슬로비디오로 흘러가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다. 머릿속에서는 유한킴벌리 광고에서 나오는 "우리 강산 푸르게 푸르게..." 내레이션이 반복되어 돌아가고...
그렇게 강렬한 첫인상 덕분인지, 이후에 우리가 캠핑을 시작하면서 첫 번째 캠핑 지역으로 '골든이어즈'로 정했을 때에도 아무런 주저함이 없었다. 거대한 침엽수림 속에서 몸과 마음을 힐링하고 올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가득했으리라. (지난 책에 서술했듯이) 비록 정보 부족, 준비 부족 때문에 문자 그대로 얼어 죽을 뻔했었지만, 그 이후에도 매년 꾸준하게 가게 되는 걸 보면 빽빽한 침엽수림이나 (매운탕 가게의 흔적 없이) 끝없이 펼쳐진 호수를 넘어선 그 무언가가 우리를 계속 이끌어 온 것 같다.
우선 골든이어즈 주립공원 캠핑의 단점 먼저 언급해 본다면, 일단 생각보다 멀다는 점. 광역 밴쿠버 메이플릿지에 위치해있다고는 하지만, 캠핑장에서 가장 가까운 민가까지는 15km 정도 떨어져 있다. 주립공원 입구에서 캠핑장 까지도 12km, 20분 정도 계속 오르막 길이다. 그렇다 보니 '음... 메이플릿지니까 삼십분 정도 잡으면 넉넉하게 가겠지...' 생각을 하면 낭패를 겪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게다가 캠핑장 입구에 있는 RV 급수 시설도 수압이 너무 낮아서, RV에 물까지 채우고 가면 약속시간보다 훨씬 늦게서야 도착하게 된다.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산속 깊이 있는 캠핑장이다 보니까 핸드폰 신호가 잡히지 않는다. 두 군데 백컨트리 캠핑장은 물론, 세 곳의 프런트 컨트리 캠핑장도 상황이 매우 열악하다. 만일 누군가를 초대하거나 만나기로 약속을 했는데 돌발상황이 생겼다 하더라도 그들과 연락하기는 무척 어렵다. 심지어 주립공원 입구를 지나면 커다란 표지판에 "당신이 이곳에 있다는 걸 누군가 알고 있습니까?"라는 문구를 볼 수 있다 (몇몇 캠퍼들은 매일 핸드폰만 보고 있는 아이들에게, 오히려 이렇게 인터넷과 단절된 경험이 좋다고 하기도 한다).
아무래도 침엽수가 가득한 숲 속에 있는 캠핑장이라서 춥고 습한 것도 어쩔 수 없다. 메이플릿지에 있다고는 하지만, 골든이어즈 주립공원과 메이플릿지 시내는 기온이 5도 이상 차이가 난다 (밤에는 10도까지 차이가 난다). 사이트마다 침엽수림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햇볕에 뭔가를 말리는 건 무척 어렵다. 춥고 습하다 보니까 의자에 오래 앉아 있으면 당장 신경통 증상이 오기도 한다. 무엇보다 가장 열악한 부분은... 바로 샤워시설이다. 170여 개 사이트가 있는 '골드크릭 캠핑장 (Gold Creek Campground)'에는 샤워실이 달랑 두 군데뿐이다 (이 말은 수세실 화장실도 두 군데뿐이라는 뜻). '노스비치 캠핑장 (North Beach Campground)'에는 아예 샤워시설이 없고, 230여 사이트의 '알루엣 캠핑장 (North / South Alouette Campground)' 역시 노스와 사우스 알루엣 각각 샤워시설은 한 곳만 있다 (대신 독립된 수세식 화장실 시설들이 있다). 이렇다 보니 아침 7시에서 8시 사이, 사람들이 막 일어났을 무렵에는 샤워실 앞에 줄이 길게 늘어져 있는 걸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만일 샤워실 청소라도 하는 시간과 겹치기라도 한다면 대형재난이 벌어진다. 주변에 있는 재래식 화장실이라도 찾아서 빨리 뛰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골든이어즈 주립공원'으로 캠핑을 가는 이유는 뭘까? 그리고 왜 광역 밴쿠버의 수많은 사람들이 '골든이어즈'에서 캠핑을 시작하는 걸까? 일단, 뭐니 뭐니 해도, 다른 주립공원 캠핑장과 비교하자면 예약이 훨씬 쉽다는 점이 있다. 광역 밴쿠버에서 '골든이어즈 주립공원'과 비슷한 거리 (이동시간)을 가진 주립공원 캠핑장이라고 하면 '포트코브 주립공원 (Porteau Cove Provincial Park)'과 '롤리 호수 주립공원 (Rolley Lake Provincial Park)' 정도를 들 수 있을 텐데, 둘 다 엄청난 인기에 비해서 사이트 수가 너무 부족하기 때문에 (포트코브 : 44사이트 , 롤리 호수 : 63 사이트), 예약에 있어서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한다. 거기에 비하면, '골든이어즈 주립공원'의 경우 총 400개가 넘는 사이트가 있다 보니까 그나마 예약시작 시간 아침 7시에서 10초 정도 지나더라도 여전히 남은 사이트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골수 캠핑 환자들 뿐만 아니라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캠핑 가서 가족 파티나 여름휴가를 즐기는 사람들에게도 '골든이어즈 주립공원'은 보다 나은 접근성을 제공한다.
이렇게 사이트가 많은 캠핑장임에도 불구하고 개별 사이트 크기가 크고, 사이트 간 간격이 널찍널찍해서 비교적 프라이버시 보호가 좋다는 점도 장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 간격이 나무들로 차 있어서 옆 사이트 소음이 거의 들리지 않는다). 특히 '골드크릭 캠핑장'의 캠핑장 주변 둘레길 'Trillium Drive'에 배치된 TD 사이트들의 경우, 뒤쪽 산 길이나 계곡길과도 연결이 되어있어서 사이트 크기도 무척이나 여유롭다. 또 ('롤리 호수 캠핑장'과 달리) 모닥불 화로도 캠프 사이트 안쪽 깊숙이 배치되어 있어서 프라이버시를 만끽하면서 불멍을 즐길 수 있다.
그리고, 주립공원 자체가 크다 보니까 주변에 놀 거리가 많은 점도 큰 장점이 되겠다. 캠핑장에서 조금만 걸어 내려가면 '알루엣 호수 (Alouette Lake)'의 해변가를 즐길 수 있는데 날이 좋으면 풍성한 햇볕의 은총을 받을 수도 있고, 군데군데 핸드폰 수신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정 급한 일이 있으면 호숫가까지 뛰어내려 가서 전화를 하곤 한다). '노스비치 캠핑장' 근처에는 귀여운 산책로가 있어서 왕복 3km 정도 길이의 평지에 가까운 산책로를 따라서 걷다 보면, 각종 야생화와 산딸기 류들이 즐비한 (하지만 산딸기를 채집 / 섭취할 때는 어깨 높이 아래에 있는 것들은 피합시다. 개들이 산책 도중 실례를 많이 하거든요) 개울가나 폭포 Lower Falls를 즐길 수도 있다. 그 외에도 주립공원 도로 (Golden Ears Pkwy) 주변으로 각종 볼 거리, 놀 거리, 산책로들이 즐비하기 때문에 캠프 사이트 안에 가만 앉아있는 것이 지겹다면 얼마든지 놀 거리는 많다.
끝으로, 뭐라 딱 집어서 표현하기 어려운 부분인데, 이렇게 빽빽한 침엽수림으로 둘러싸인 캠프 사이트에 앉아있다가 보면, 정말이지 문을 열어보니 집 앞에 무슨 별천지가 있는... 그런 느낌이 든다. 분명 캠핑은 중노동이자 스포츠가 맞고, 여기까지 오느라 준비도 많이 하고, 또 캠핑을 마치고 집에 가면 정리하느라 진이 빠지겠지만, 여기 이 순간, 이렇게 나무들로 가득 찬 숲에 있다 보면, 이게 바로 일상에서 벗어나는 느낌이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캠핑인구가 늘고 예약이 어려울 정도로 매 주말 가득 찬다고 하지만, 골든이어즈는 여전히 서늘하고, 여전히 고즈넉하고, 여전히 초록이었다. 작년과 다른 점은 이곳의 캠핑장 관리가 예전보다 좀 더 꼼꼼하고 철저해졌다는 것이었다. 철저한 관리로 명성이 자자했던 '롤리 호수 주립공원' 관리에 비슷할 정도로 하루에도 몇 차례씩 화장실 청소를 하고, 캠퍼가 체크아웃하면 곧바로 곧바로 사이트를 청소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예전에는 조금 일찍 체크인을 할 경우 (몰지각한 이전 캠퍼들이 남기고 간) 음식물 쓰레기들이 모닥불 화로에 그대로 남겨져 있던 걸 종종 볼 수 있었는데, 이제는 청소도 꼼꼼하게 하고 조금 일찍 체크인하는 것도 금지되어 있다 (주립공원 캠핑의 일반적인 체크인 시간은 오후 1시).
밴쿠버에서 캠핑 시작을 이곳 골든이어즈에서 했고 그 후로도 20여 년간 줄곧 찾던 곳이어서, 그만큼 추억의 무게가 많이 담겨 있다. 첫 캠핑에서 혹한의 경험, 한국에서 방문한 사람들을 데리고 온 접대 캠핑, 캠핑 와서까지 아내와 끝장나게 싸운 일, 먼저 간 강아지가 좋아서 뛰어다니던 기억, 그리고 우리 캠핑을 찾아 주었던 수많은 사람들. 친구들.
춥고, 축축하고, 화장실은 불편하고, 다람쥐와 새들은 호시탐탐 먹거리를 노리고, 가끔 벌레들도 많이 덤비고, 종종 비에 잔뜩 젖은 텐트나 천막을 걷어야 하는 일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밴쿠버에서 캠핑... 하면 우리에겐 골든이어즈가 제일 먼저 떠오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