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리 호수 주립공원
캠핑 짐을 차에 싣고 빼다 보면 주차장에서 만난 이웃들이 묻는다. "캠핑 가니? 어디로? 엉? 거기가 어딘데?” 또, 일 하다가 만난 다른 수리기사들과 수다를 떨다가 캠핑 얘기가 나와도 "어? 너 캠핑 좋아했었어? 어디로 가는데? 엉? 거기가 어딘데?" 하고 묻는다.
캠핑을 시작한 이래로 우리는 계속 광역 밴쿠버 공원, 주립공원, 국립공원 캠핑장, BC 레크리에이션 사이트 중심으로 찾아다니게 되었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아는 사람만 아는 숨은 보석 같은 곳은 힘들고) 온라인에 정보가 친절하게 안내되어 있는 곳, 그리고 온라인에서 예약이 가능한 곳만 다녔던 셈이다. 하지만, 밴쿠버, 캐나다에서 태어나 여기서 자란 사람들과 캠핑에 대해 얘기를 하다 보면 좀 다른 점을 느낀다. 우리가 하는 캠핑이 '주말여행' + '아웃도어 경험' + '사교 및 야외 음주' + '관광 코스에서의 숙박 해결' + '휴식'과 같은 의미가 주로 있다면, 이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저마다의 다른 목적 ('별장에서의 휴가', ' 낚시', '가족 여행' 등)을 가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들과 얘기를 하다 보면 자신들의 캠핑 철학에 의외로 완고함을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어, 매년 여름에 두 차례 이상 낚시 캠핑을 다니는 친구는 어릴 적 아버지와 다니던 BC 내륙에 있는 무명의 호수로 항상 다닌다. 그냥 때 되면 낚시 장비와 트레일러를 끌고 가족들과 같이 일주일 묵고 오는 식이다. 예전에 B 섬에 살 때 알고 지냈던 M 할머니도 매년 여름 캠핑을 가는 곳이 정해져 있었다. 그곳에서 낚시도 하고, 사람도 초청하고, 낚시 강좌도 하면서 여름 몇 개월을 보내곤 했다. 누구는 매년 휴가 때마다 카약을 타고 4시간 동안 노를 저어 가야 하는 섬으로 캠핑을 가고, 누구는 온천 마을의 민영 캠핑장에 한 달 정도 장박을 하면서 캠핑을 즐기는 경우도 있다. 어쩌면 이들에게 캠핑이란 마치 어릴 적 여름방학마다 놀러 가던 외갓집과 같은 느낌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보니, 우리처럼 "와.. 이번엔 새로운 캠핑장에 함 가볼까?" 하면서 도장깨기 놀이를 하는 캠퍼들로서는 "어디로 캠핑을 다니니?" 하는 질문에 적당한 대답을 찾기가 난감해진다. 막 한 군데를 정해놓고 그곳에서만 캠핑을 하는 게 아니다 보니까, "뭐... 여기저기?" 이런 식으로 답을 하거나 "주립공원이나 국립공원 위주로 다녀." 하며 얼버무리기도 한다. 가끔, '포트코브 주립공원 (Porteau Cove Provincial Park)'이나 '골든이어즈 주립공원 (Golden Ears Provincial Park)'처럼 이민자들 사이에선 나름 슈퍼스타캠핑장을 들먹이더라도, "엉? 거기가 어딘데?" 하는 반문을 듣게 되는 경우도 많고, 또 이러다 보면 우리 입장에선 '아니... 어릴 적부터 캠핑을 다녔다면서 그렇게 유명한 곳도 모른단 말이야?' 하며 놀라게 되는 경우도 있다. 우리처럼 '불타는 조개구이집'과 '대만 카스테라'처럼 사회 전체를 관통하는 트렌드와 정보 공유에 익숙해온 사람들로는 무척 생소한 현상이지만, '홈닥터'를 구하거나 '취업활동'의 정보조차 내 개인과 내가 알고 지내는 친구들끼리만 공유하는 사회다 보니까, 캠핑장 하나에도 나만의 선호도와 나만의 역사가 있는 곳을 고집하는 것이 딱히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얼마 전 짤막한 캠핑을 했던 '롤리 호수 주립공원 (Rolley Lake Provincial Park)' 역시 컬트적인 인기를 가지고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매년 주립공원 캠핑장 예약 전쟁을 치르다 보면 몇몇 캠핑장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동이 나는 걸 볼 수 있는데, '포트코브 주립공원'이나 '앨리스 호수 주립공원'의 경우는 광역 밴쿠버 주립공원 중 몇 안 되는 전기가 제공되는 캠핑장이라서 그렇더라고 하더라도, '롤리 호수 주립공원' 역시 매번 몇 초 차이로 예약 완료가 되는 건 의아했었다. 하지만 또, 예약을 못하면 막상 가서 경험을 해 볼 수가 없는 터여서, 이 캠핑장이 왜 이리 인기였는지는 계속 미스터리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 2019년 가을에 확인할 수 있었던 '롤리 호수 캠핑장'의 첫인상 역시 솔직히 별 거 없었다. 숲으로 둘러 쌓여있고, 호수를 따라갈 수 있는 가까운 산책로가 있는 것도, 밴쿠버 사람들이 쉽게 갈 수 있는 '골든이어즈 주립공원'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가장 큰 차이점을 들자면... 캠핑장의 위치 정도? 광역 밴쿠버에 있는 대부분의 주립공원 캠핑장들이 첩첩산중에 있어서 전화도 잘 안되고 식자재 쇼핑에 어려움이 있는 반면, '롤리 호수 주립공원'은 '메이플릿지 (Maple Ridge)' / '미션 (Mission)' 주택가 인근에 있어서, 캠핑장까지 이동하는 것도 쉬웠고, 캠핑장 내에서 발생할 수 있었던 다양한 비상사태에 대처하기도 쉽다는 점이 있었다. 그렇게 주택가에 가까움에도, 일단 캠핑장 안으로 들어가면 서늘한 숲 속 그늘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은 장점이라고 할 만한 일이긴 했다.
하지만, 이틀 밤 정도를 캠핑장에서 보내고 났더니, 사람들에게 이토록 사랑받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바로 '철저한 관리 시스템'. 물론 다른 주립공원 캠핑장이 몇 백개 사이트를 가지고 있는 반면 이곳은 달랑 60여 개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으니 그만큼 관리가 쉬운 점이 있을 것이다. 그렇더라 하더라도, 최소 한 시간에 한 번씩은 돌아다니는 순찰차량이라든지, 낡았어도 항상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샤워장이나 화장실 등은 사용하는 사람들 기분을 좋게 만들어 준다. 어쩌면 '내 돈 주고 사용하는 캠핑장인데, 소비자로서 너무나 당연한 것에 쉽게 감동하는 것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을 텐데, 이민생활 20년 동안 헐렁한 캐나다 사회에서 뇌가 많이 물렁해져 다른 캠핑장의 너절한 환경에 익숙해진 건지, 아니면 워낙 어려운 경쟁률을 뚫고 따낸 캠핑장 예약이라서 뭐든 좋게 받아들이게 된 건지는 잘 몰라도, 이렇게 다른 캠핑장에서 받기 힘든 서비스를 보게 되면 약간의 감동을 받게 된다. 이번에도 오후 1시쯤 사이트에 도착했더니 깨에끗하게 청소된 캠프파이어 화로와 캠핑 사이트에 아직 남아 있는 빗자루 자국이, 마치 침구류가 깨끗이 정리된 고급 호텔방에 들어온 느낌을 받았다.
샤워실 / 수세식 화장실 앞마당에는 아이들용 놀이터가 있는데, 항상 가족 단위의 캠퍼들로 북실북실하다. 캠핑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에게 모두 각각의 이유가 있을 텐데, 이렇게 가족이 같이 캠핑을 오는 경우에는 뭐니 뭐니 해도, "아이들에게 재미난 경험을 제공해주고 싶어서 (동시에 캠핑장에 애들 풀어놓고 부모들은 좀 쉬고 싶어서)"라는 이유가 가장 클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어쩌면 '롤리 호수 주립공원'의 깐깐한 관리 시스템은, 아이들과 같이 캠핑을 즐기려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매력 포인트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캠핑을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매 주말 짐을 싸고 길을 떠나는 건 좀 지치는 일이지만, 아내는 연초 '포트코브 주립공원' 캠핑이 무척 즐거웠나 보다. 그날 캠핑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주립공원 캠핑 예약 사이트를 뒤적이더니 한 자리 취소된 걸 덥석 물어버렸다. '아... 좀... 무리 아닌가?' 생각도 들었는데, '롤리 호수 주립공원'이 '메이플릿지' / '미션' 시내에서 가는 길이 그리 멀지 않다는 지리적인 장점 때문인지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걱정은 들지 않았다. 식사도 만들기 귀찮으면 나와서 사 먹고 들어가고, 뭐... 힘들면 다시 짐 싸서 돌아오면 되겠지... 싶었다. 문제는, 하룻밤 자는 캠핑 여행에 트레일러를 달고 다니는 게 부담이 되어 이번엔 그냥 텐트만 가지고 가기로 했다는 것이다. 광역 밴쿠버에서 4월에 텐트로 캠핑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건 맨 처음 캠핑을 시작할 때부터 (문자 그대로) 뼈에 사무치는 경험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지만, 무슨 배짱인지 "아... 뭐... 하룻밤이니까 그냥 텐트 들고 가 보지, 뭐..."라고 쉽게 합의를 보았다. 물론 맨 처음보다는 여러 가지로 기능이 뛰어난 텐트와 침구류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약간 오만했던 것도 있었을 것이다.
'미션' 시내의 낮 기온은 15~18도를 왔다 갔다 하는 포근한 날이었지만, 주립공원 침엽수림 아래에 있는 캠핑장에는 서늘한 기운이 맴돌았다. 그래도 마침 '롤리 호수 주립공원' 근처에 살고 계시는 지인의 도움으로 장작용 나무를 차 트렁크 가득 얻어 갈 수 있었기 때문에 난방에 크게 문제는 없었다. 여기에, 출발하는 길에 한국 슈퍼에 들러서 사서 간 '감자탕' 밀키트의 얼큰한 국물을 들이켜고 있자니 금세 몸이 후끈해졌다. 21불 정도 가격에 4명이 먹어도 넉넉할 정도로 양이 푸짐하고, 살코기 듬뿍 돼지 등뼈나 시래기 등의 건더기도 한가득 들어있어서 평소에도 가끔씩 사 먹는 제품이었는데, 이렇게 캠핑장에서 돼지 등뼈를 뜯고 있자니 또 감회가 남달랐다.
음악을 들으면서, 술을 마시면서, 아내와 수다를 떨면서, 그리고 막판에는 태블릿에 담아 간 예능 프로그램을 같이 보고 있자니 어느새 주변에 짙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한 후에 핫팩 서너 개와 함께 침낭 속으로 들어갔는데... 텐트 속 냉기에 놀라 새벽에 깨면서 깨닫게 되었다. '아... 아직 4월이었지... 우리가 언제 마지막으로 4월에 텐트 캠핑을 했던가? 아마... 2005년, 캠핑 처음 시작했을 때..? 역시 밴쿠버 4월에 텐트 캠핑은 아직 무리구나.' 동계 텐트와 동계 침낭 그리고 핫팩은 침낭 속 보온은 적어도 확실하게 유지해 주었지만, 텐트 속 공기가 무척 차가워서 자는 내내 코가 시렸다. 비몽사몽 속에서 '아 쒸... 왜 내가 마스크를 안 쓰고 자고 있는 거지..??' 하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죽을 만큼 춥거나 하지는 않았는지, 아니면 나이가 들어서 더 게을러진 건지는 몰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뭔가를 해볼 생각은 나지 않았다. 아침에 깼을 때에도 예전 캠핑 때 느꼈던 근육통 같은 건 없었다. 코가 시려서 불편은 했지만, 그래도 동계 침낭과 동계 텐트는 그럭저럭 제 몫의 일들을 해낸 것이다.
6시쯤 일어나 밖에 나와 기온을 재 보니 6도 정도였다. 동이 트기 전이 가장 추운 법이니, 밤에 자는 동안의 기온은 아마도 7~8도 정도 되었을 것 같다. 그리고 보통 한 밤의 땅바닥 온도는 기온보다 7~14도 정도 내려가니까, 바닥의 온도는 -5도 내외였다고 보면 되겠다. 그래도 야전침대 하나 없이 깔판만 깔고 이렇게 추운 날 텐트 캠핑을 할 수 있었다니, 아직 좀 쓸만한 몸뚱이 아닌가.. 하는 싸구려 자족감이 들기도 했다. 딱딱하게 언 신발을 끌고 화장실에 갔다 오니 아내가 커피를 갈고 있다. '아... 그래... 내가 캠핑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새벽 숲의 기운을 받으면서 마시는 갓 내린 커피였었지......' 하는 기억이 떠올랐다.
일반적으로 주립공원 캠핑장의 (그리고 아마도 대부분의 캠핑장의) 체크아웃 시간은 오전 11시. 캠핑장 관리 스타일에 따라서 앞뒤로 조금 여유를 주는 곳도 있겠지만, '롤리 호수 주립공원'처럼 빡빡하게 관리하는 곳은 융통성을 전혀 기대할 수 없다. 그래서 이젠 애초에 캠핑장 예약을 할 때 가능하면 일요일 밤도 같이 예약을 하려고 한다. 말하자면, 토, 일 이렇게 2박과 월요일 아침 체크아웃으로 예약을 하는 식이다. 이렇게 하다 보니, 일요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아침 챙겨 먹고 서둘러 짐 싸고 하는 일이 없어서 좋다. 아침에 지난밤 남은 장작으로 모닥불을 떼고, 느긋하게 커피를 내려 마신 후에, 천천히 아침 식사를 하고 나서 다시 텐트로 들어가 눕는다. 빽빽한 침엽수림 사이로 햇빛이 삐져 들어와서 텐트를 비추고 있자니 텐트 속 온도도 덩달아 올라간다. "휴일엔 역시 아침 먹고 또 자야지..." 따위의 덕담을 서로 나누면서 아내와 실컷 게으름을 피웠다. 그리고 정오가 지나서, 천천히, 아주아주 느긋하게, 짐을 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