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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선 Nov 19. 2021

막무가내의 은혜

가리발디 주립공원 - 엘핀 호수

이왕 질러버린 RV… 최대한 아낌없이 써주는 것이 본전을 뽑는 일이다라는 생각으로 2017년 한 해 동안 열심히 다녔었다. 이때는 최대한 카라반 설비들과 익숙해질 겸, 1박 2일 캠핑에도, 심지어 겨울에도 억지로라도 끌고 다녔던 것 같다. 하지만, RV로 캠핑을 할 경우 텐트 캠핑에 비해 현저하게 기동성이 떨어지는지라, 볼 거리, 놀 거리에 제한을 종종 느끼고는 했다.


아내의 경우, 각종 아웃도어 활동의 인생샷들로 전 세계 SNS가 도배되기 시작했던 2016년부터, 이미 꾸준하게 백패킹에 대한 열망을 키워오고 있었기 때문에, 커다란 덩치의 트레일러를 끌고 다니면서 하는 캠핑이 주는 한계에 더 안타까움이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백패킹 장비가 너무 비쌌고 (보통 100g의 무게를 줄이는데 100불을 더 써야 한다는 얘기가 있다), 안그래도 RV를 사느라 새로 은행 빚이 쌓인 터여서, 쉽게 백패킹을 시도해보려는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던 중, 어떤 모임을 통해서 P 님과 J 님을 우연히 만났다. 살아온 환경도 비슷하고, J 님은 나처럼 몸을 쓰는 직업을 가지고 있어서 더 친근감이 들었고, 하루라도 젊을 때 최대한 많이 놀자는 인생관도 비슷했다. 특히 두 부부 모두 암벽등반을 즐기는 등 (J 님의 경우는 전문적인 산악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아웃도어 액티비티에 진심이어서, 평소에는 새로운 인연에 소극적이었던 아내역시, 이들 부부와 같이 어울리는 걸 매우 즐거워했다. 휴일만 되면 소파와 한 몸이 되어 움직이지 않으려는 남편에게 영향을 좀 주면 좋겠다는 계산이 깔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렇게 2017년 여름부터  다음해 P 님 J 님 부부가 한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거의 매 주말 같이 어울리며 술을 마시고, 허튼 농담을 하며 낄낄거리고, 같이 캠핑을 했다. P 님의 캠핑 요리는 족발이나 굴 보쌈 등 기존 상식을 초월하는 것들이었고, 이들 부부와 나란히 술을 마시면서 사는 얘기, 살아갈 얘기들을 나누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다.


그렇게 겨울이 되었고, 11월부터는 아내가 몇 년간 별러왔던 스노슈잉 (Snowshoeing 설피를 신고 가는 겨울 등산)을 시작했다. 폭설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눈을 치워야 하는 다른 지역 캐나다 주민들에게는 매우 송구한 일이지만, 몇 개월간 줄기차게 비만 내리는 밴쿠버의 겨울 역시 어떤 사람에겐 혹독하긴 마찬가지여서, 비구름 위를 걷는 겨울 산행과 스노슈잉은 우울한 마음에 작은 활기를 넣어주기 충분했다. 왕복 4시간 남짓, 400m 정도의 오르막을 한번 오르내리는 것만으로 저렇게 좋아하는데 진작 시작할걸... 이라는 나답지 않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이해에도 어김없이 크리스마스가 돌아왔다.


처음엔, 모임 사람들을 잔뜩 초대해서 우리 집에서 조촐한 만두 파티로 시작을 했다. 다 같이 모여 한국 방송의 연말 시상식 들을 틀어놓고, 만두를 빚고 깔깔대면서 보내는 연말 행사였다. 그리고 다음 날엔, P 님 J님  부부는 스키를 타러, 우리는 스노슈잉을 하러 겨울 산을 올랐다. 처음부터 약속하고 같이 간 것이 아니라, 하산을 하면서 ‘오늘 크리스마스이브인데 이 부부는 뭐 하시나..?’ 궁금해서 전화를 했더니 바로 옆에 있는 스키장에서 열심히 다운힐 중이셨던 걸 알아냈다.


자연스럽게 뭉쳐서 이틀 연속 술자리가 만들어졌다. 전날 만두를 만들고 남은 숙주와 돼지고기를 함께 굴 소스와 볶으니 훌륭한 술안주가 되었다. 맥주에 보드카에.. 정신없이 마시고, 웃고, 떠들고,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연말에 이렇게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웃으며 술을 마시니, 왠지 가족을 떠나 이렇게 둘이 타지에서 사는 삶이 외롭지 않은 것 같았다.


누가 먼저 말을 꺼냈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아내가 백패킹을 한번 가고 싶다는 오래된 소망을 말했고, 그거 하나 못 들어주는 남편에 대한 주변의 질타가 이어졌다. 물론 모두 불콰하게 취해있었고, 나도 술김에 “가자.. 뭐.. 그거 그냥.. 가면 되는 거지..” 하며 떠들었다. 이미 몽롱해 있어서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이때쯤 J 님이 “아.. 그러면 내일 갈까요?” 하며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모두들 “그래요. 내일 갑시닷!!’ 하며 술잔을 비웠다. 이때가 새벽 2시쯤.


그리고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아마도 남편이 말이 많아지자 실수를 할 걸 우려한 아내가 끄집어내어 침대에 눕혔으리라 추측만 할 뿐. 그리고, 이렇게 파장을 하고 나서… 한 2시간 정도 잤나? J 님, P 님 부부가 다시 나타났다. 아니…. 이건 꿈인가? 평행우주인가? 뭔가 되풀이되고 있는 것 같은데..?


알고 보니, J 님은 집으로 가서 겨울 산행 채비를 마치고, 우리 부부 배낭까지 다 싸서 들고 왔고, P 님은 해장국으로 된장국을 끓여 오셔서는 “자.. 이거 드시면 술이 좀 깰 거예요…” 하며 나를 깨웠다.  ‘아니… 우리 바로 몇 시간 전까지 같이 술 마시고 떠들고 그랬는데…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인가요..? ‘싶었는데, 두통으로 머리가 깨어질 듯했지만..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그 바로 몇 시간 전에.. 웃고 떠들면서.. 같이 백패킹을 가자고 말했다는 걸.. 그리고 J 님은, 자신이 한번 말한 약속을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란 걸.. (‘조프리의 저주’ 편을 참고하세요 https://brunch.co.kr/@vanheading/72)


P 님께는 죄송한 일이었지만.. 이번에도 도저히 음식을 밀어 넣을 속이 안되었다. “이제부터 산에 오르려면 속에서 안받아도 한 숟갈 뜨는 것이 좋을 거인디..”하며 J 님이 말했지만, 이 모든 상황이 현실인지, 꿈인지 아직 분간이 안되는 상황이었다. ‘아니.. 똑같이 술을 마셨는데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멀쩡한 거지..?’ 하는 등.. 입에서는 계속 ‘아니…’, ‘아니…’를 반복했지만, 나도 모르는 새에 등산 장비를 갖추고 J 님의 차에 오르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꿈도 꾸지 않았던 ‘엘핀 호수 (Elfin Lake)' 겨울 캠핑이 시작되었다.


J 님의 차는 오프로드 전용 SUV였는데, 작고 단단한 차돌바위처럼 생겨서 평소에 한 번 타보고 싶었던 차였지만, 이렇게 술이 덜 깬 상태에서 타는 건 너무 무리였다. 머리는 빠개지는 것 같았는데 오프로드 전용 차량의 소음과 진동이 더 과장되어 느껴졌다. 그리고 내 날숨에서 나는 술 냄새를 내가 다시 들이키는 과정이 반복되어, 결국 가는 도중에 포트코브 주립공원에서 들러서 속에 든 걸 게워내야 했다.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면서도..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한 가지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었던 건, 저분들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쪽잠을 자고 나서, 우리 등산 짐을 다 챙기고, 캠핑 음식까지 죄다 준비하고, 심지어 해장국까지 끓여서 다시 찾아주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아무리 힘들어도, 못가겠다고 나자빠지면 내가 인간실격이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훗날, 아내의 얘기를 들어보면, 스노슈를 신고 벼랑 위를 걸어갔던 일보다, 오히려 차를 가지고 스쿼미시에서 등산로 입구까지 들어갈 때가 훨씬 더 무서웠다고 한다. 예전에 토피노에 갈 때 한번 아슬아슬한 눈길 사고를 겪은 적이 있었던 터라, 눈이 그렇게 쏟아지고 있어서 시야가 안 좋은 상태에, 길도 미끄러웠기 때문에 계속 걱정을 했는데, J 님의 Toyota FJ Cruiser는 생각보다 쉽게 오를 수 있었다. 물론 1단 기어에 디퍼런셜 락까지 걸어놓고 아주아주 천천히 가야 했다.


텐트와 캠핑 음식까지 혼자서 다 짊어진 J 님의 배낭은 30kg은 족히 넘어 보였다. 마침, 크리스마스 당일이었고, 눈도 많이 와서, 엘핀 호수 산장에는 자리가 남아있었다. 눈밭 위에 겨울용 텐트를 치고 별빛을 보면서 잠에 드는 경험을 제공하고 싶었던 J 님은, 산장 예약을 극구 반대했지만, “이렇게 눈이 와서는 별은 안보일 거예요..” 라며 말하던 내 표정에서 뭔가 절박함을 읽었는지, 결국 산장에서 자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텐트가 배낭 맨밑에 들어가 있어서 다시 꺼내기 귀찮다는 이유로 J 님은 그 무거운 배낭을 그대로 짊어지셨다. 뭐,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려는 이유가 더 컸겠지만)


등산로 입구부터 엘핀 호수까지는 약 편도 10km의 거리, 700m의 경사였다. 뭐.. 사실.. 맘먹고 가면 못 갈 거리도 아니지만.. 여전히 어떻게 갔는지 기억이 안 난다. 눈이 너무 많이 왔고 빈속에 산에 오르느라 첫 1km 만에 금방 지쳤다는 것 밖에… 전날 밤 남편을 감시하느라 과음을 자제했던 아내는, 그래도 나보다는 정신이 말짱한 상태로 등산 준비를 한 터라 물도 챙기고 말린 야자 대추 등 에너지 보충용 음식들도 잔뜩 싸서 갔다.


아내가 준비한 대추를 먹으면서 조금씩 기운을 차려 올라갔는데, 2km 정도 가니 오른쪽 허벅지에서 쥐가 났다 (이날 이후로, 조금만 많이 걸으면 같은 곳에 쥐가 난다). 숙취 때문에 몸에 수분도 없고 전해질 상태도 엉망이었을 테니 쥐가 안 날 리가 없다. 나 때문에 이렇게 조금 걷다가 조금 쉬는 일이 반복되었다. 새벽에 집에서 출발했건만 중간에 한 번 쉬며 게워내고, 등산로 입구까지는 또 초저속으로 와서 주차장에 도착하니 이미 11시가 넘은 후가 되어서야 등산을 시작할 수 있었는데, 그런데도 내 컨디션 때문에 또 이렇게 일행들의 발목을 붙잡고 있으려니 매우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무거운 짐을 지고 묵묵히 산을 오르는 J 님


입구에서 4km 정도 오르고 나니, 조그마한 휴게소가 나왔다. 휴게소 안에는 화목 난로와 땔감 나무들도 있어서, 사용하는 사람이 직접 난로도 피울 수 있게 되었다. 이때쯤 되니 좀 정신이 들었고, 이 모든 상황이 너무 코미디라 웃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내 얼굴에 웃음이 도니까, 반 시체를 끌고 다니느라 고생을 했던 일행들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은 벌써 오후 1시를 가리켰지만.. 전체 10km 등산에 4km를 왔으니 이만하면 해지기 전에 도착할 것 같았다 (물론, 속마음은 ‘이만하면 그만 돌아가도 될 것 같았다’를 외치고 있었지만).


입구 4km 거리의 휴게소 내부 (좌)와 적설량을 대비해서 높게 만들어진 화장실


군대에서 고된 산악행군을 할 때, ‘중간에 쉬더라도 절대 눕지 말고 배낭을 풀지 말아라’라는 얘길 하는데, 격한 운동을 한 후에 근육을 긴장에서 풀어버리면, 다시 힘을 쓰기 어렵다는 이유로 기억한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저 말을, 이날 절절하게 실감하게 되었다. 제정신으로 돌아오니 피로가 몇 겹으로 몰아치기 시작했다. (눈이 그쳤는지, 눈구름 위로 올라왔는지 모르지만) 몸이 더 이상 젖는 일은 없었는데도, 스노슈를 착용한 다리 한 짝 올리는 데 너무 힘이 들었다.


내 상태를 눈치챈 J 님이 계속 농담을 해가면서 내 기운을 북돋아 주었지만, 내 표정이 점점 굳어가는 건 감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정말로 머릿속으로 환청이 들려왔다. 지금도 사람들에게 그때 얘기를 하면 모두들 내가 허풍 떤다고 웃고 넘기는데, 팔다리 근육에 힘은 없고, 숨은 계속 차고, 입김이 올라가 안경에서 얼음 성에가 끼고.. 그러면서 머릿속에선, 지인짜로, 배칠수 씨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오르막 지옥!!”



사방이 새하얀 눈으로 덮인 겨울 산행. 언제 미끄러질지 모르기 때문에 발 밑에 신경을 집중해야 하는 겨울 등산객들의 안전을 위해, BC의 겨울산에는 등산 경로를 따라서 표지 막대기를 꽂아 놓는데, 형광 흰색과 빨간색의 줄무늬로 멀리서도 금방 눈에 띈다고는 하지만, 어지간히도 띄엄띄엄 있어서, 가다 보면 이 길이 맞는 건가 하고 걱정이 되곤 하였다. 그래도 이 때는 경험 많은 J 님이 안내를 해서 우린 무작정 따라가기만 해도 됐는데, 만일 우리끼리 가려고 했다면 십중팔구 길을 잃었을 것이다. 제대로 가고 있나 걱정을 하다 보면 저 멀리에서 막대기가 보이고, 이 길이 맞나.. 하다가도 고개 하나 넘으면 저기에 막대기가 있고 그런 일이 반복되었다.

겨울 등반의 안전을 책임지는 표지 막대기


그렇게 막대기를 따라서 가고 있었지만, 오르막은 끊이질 않았다. 지쳐서 환청이 계속 들리니까, 저기 내게 보이는 저 막대기가 환각이었다고 해도 딱히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전적으로 J 님의 안내에 의존해서 따라가고 있었는데, 눈앞에 아주 가파른 고개가 하나 나왔다. "이제 저기만 넘으면 다 왔어요. 저기 넘으면 산장이 보일 거예요.”라고 하는 J 님 의 호언에 마지막 힘을 내어 꾸역꾸역 올라갔다. 산장에 가기만 하면, 밥도 안 먹고, 씻지도 않고, 곧바로 잘 거야. 꼭 그냥 잘 거야 하면서…


하지만, 고갯마루에 오르고 나니……






저어 멀리까지 펼쳐져 있는 눈밭 만이 내 시야 가득 보였다. 이제까지는 잘 눈에 띄지도 않던 표지 막대기들이 줄을 지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그 외엔, 최소 전방 3~4km에는, 그야말로 눈 밖에 없었다.


“으아아아아아이 쒸이이이이 ㅂ…” 육성으로 욕이 튀어나왔다.


그래도, J 님의 말이 아예 틀린 건 아니었다. 저 멀리까지 막대기들이 보인다는 건, 적어도 당분간 오르막 없이 완만한 평지나 내리막만 있다는 뜻이니까..


허탈한 마음을 달래려고 잠시 쉬어가자고 했으나, “엉? 여기가 아니었네..” 하면서 쿨하게 앞장서서 가는 J 님의 뒤를 부지런히 좇아가야 했다. 나 때문에 시간이 너무 지체되어서, 어둡기 전에 도착하려는 J 님의 발걸음에 조급함이 묻어 나왔다. 겨울 산은, 정말 순식간에 해가 져버린다. 특히 조금 전까지 눈발이 흩뿌리던 이렇게 잔뜩 찌푸린 날엔 더욱…


이후로 산등성이를 몇 차례 더 넘고 나서 간신히 산장에 도착했다. 이때가 오후 4시를 조금 넘은 시간. 젖 먹던 힘을 짜내어 올라왔더니, 산장에 도착하고 나서는 정말 손가락 하나 까닥일 수가 없었다. 올라오는 내내 징징대는 남편 때문에 힘든 내색을 못 하던 아내도, 산장에 도착하고 나서는 완전히 탈진상태가 되었다. 그렇게 우리가 취사장 테이블에 앉아서 멍 때리고 있는 동안, J 님과 P님 은 밖에서 눈을 퍼와 (그것도 야생동물 발자국이 없는 눈을 골라서 퍼와서) 물을 끓이고, 김치찌개와 밥을 만들어 주셨다.


만화를 보면 밥을 먹다가 눈물이 나는 장면이 종종 있는데, 그게 과장이 아니라는 걸 이때 깨달았다. 그동안, 그리고 그 이후에도 P 님, J 님과 같이 놀러 다니면서 P 님이 만들어주신 수많은 진수성찬들을 얻어먹었지만, 이날 먹었던 쌀밥에 김치찌개만큼 눈물 나는 음식은 없었다 (P 님은 그 와중에도  “급하게 하느라고 맛이 별로네” 하며 스웩을 보여주는 걸 잊지 않았다). 우리한테 겨울 산 구경시켜주려고, 그리고 도착해서 우릴 먹이려고, 식자재랑 취사도구를 모두 짊어지고 10km 겨울 산 등반을 해온 것이었다 (이쯤에서 다시 한번 감사를 전합니다).

엘핀호수 산장 입구 (좌). 눈이 쌓여 입구가 막히면 사다리를 타고 2층으로 들어간다. 왕후장상이 부럽지 않던 김치찌개 (우)



애초에 J 님이 산장보다는 텐트에서 자자고 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산장이 너무 시끄러워서 잠에 들 수 없을 거라는 점이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밤이 되면서 힘이 넘치는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북적였다. 그리고 곧이어 술을 마시며 카드놀이를 하는 것 같았는데, 2층에 있는 침실과 아래층 취사장 / 휴게실이 뚫려있어서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그대로 들려왔다. 그러나.. 그 소음에 뒤척이기에는 너무너무너무 피곤한 상태여서, 일단 눕고 나니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게 잠에 후욱하고 들었다.


다음날에도 새벽같이 일어나서 복귀를 준비했다. 눈이 더 오거나 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내가 오후에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이날 아침도 응석을 부리면서 P 님이 차려주신 만두라면을 먹고 (J 님.. 당신은 도대체 뭘 얼마나 지고 올라오신 겁니까?), 천천히 채비를 마치고 길을 나섰다. 이때가 새벽 6시 반. 아직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어서 별빛도 달빛도 없는 칠흑같이 깜깜한 산길이었기 때문에, 저마다 헤드라이트 하나씩 달고 조심히 걸어 나갔다. 어제는 잘 안 보이던 표지 막대기가 라이트 빛에 반짝여서 길을 가리켜 준다. 어제처럼 눈이 갑자기 쌓인 날은 벼랑 위로 눈 처마가 생길 수 있어서 막대기를 따라 걷지 않으면 자칫 벼랑에 떨어질 수 있어 위험하다.

불빛을 반사하는 표지 막대기


당연한 얘기겠지만 내려가는 길은 훨씬 수월하다. 많이 먹고, 푹 자고 일어나서 그런지 컨디션도 훨씬 나아졌다. 여유가 생기니 주변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어제 올라올 때는 그냥 죄다 하얗게만 보였는데, 저 멀리 눈 위에 펼쳐진 나무들이 동양화가 그려진 병풍처럼 보인다. 서로 농담도 하고, 이렇게 신선한 눈이 있으면 빼먹을 수 없는 ‘러브스토리”의 Snow Angel 놀이도 하면서 천천히 내려왔다. P 님과 J 님께 너무 신세를 져서 죄송할 따름. 막무가내 약속이라도, 약속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는 두 분 아니었으면 이런 모험을 떠날 엄두도 못 냈을 텐데. 정말 감사하다.


이렇게 술김에 계획되고 뭐라 설명할 기회도 없이 순식간에 실행된 첫 백패킹이었다. 그리고, 아내는 그 후 한동안, 쨍하게 상쾌한 공기와 눈 위를 걷는 재미, 아름다운 산의 풍경들을 잊을 수 없어서 (크리스마스 할인행사 기간이 다 지났음에도 뒤늦게) 백패킹 장비 쇼핑을 시작했고, 나는 한숨을 쉬며 “이것이 숙명이라면..”을 반복해서 뇌까렸다.






가리발디 주립공원 - 엘핀 호수 (Garibaldi Provincial Park - Elfin Lake https://bcparks.ca/explore/parkpgs/garibaldi/diamond.html) : 가리발디 주립공원은 광역 밴쿠버 근방에서 가장 큰 산악 공원으로 웨스트 밴쿠버에서 스쿼미시, 치카무스를 거쳐서 위슬러까지 이어진다. 당연히 (지리산 국립공원처럼) 입구도 여러 군데에 있고, 구역별로 산장이나 캠핑장이 여러 군데 형성되어 있는데, 밴쿠버에서 보통 ‘가리발디 공원’에 백패킹 간다고 하면 ‘가리발디 호수 캠핑장 (Garibaldi Lake Campground)’을 말하며, ‘엘핀 호수 캠핑장’으로 가는 길과 전혀 다르다. 엘핀 호수에 가려면 ‘Garibaldi Provincial Park - Diamond Head’라고 쓰인 입구와 주차장을 이용해야 한다. 스쿼미시 시내에서 Quest University를 지나서 30분 정도 들어가야 주차장과 등산로 입구가 나온다.


등산로 입구에서 10km 남짓을 꾸준히 걸어야 하는데, 겨울에는 눈길 때문에 등산로 가장자리 벼랑이 잘  안보일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하고, 여름에는 내려 쬐는 뙤약볕과 모기와 흑파리 때문에 악명이 높다. 양봉업자들이 쓰는 모기장 얼굴 가리개를 쓰고 올라간다고 한다. 그래도 엘핀 호수의 경우, 일단 도착하면 취사장이 설치된 근사한 산장도 있고, 두 호수 중에 물놀이용 호수와 식수용 호수를 구분해서 사용한다고 한다. 호수 가까운 곳에는 텐트를 치기 위한 목재 데크도 만들어 두어서, 광역 밴쿠버 백패킹 캠핑장 중에는 가장 시설이 좋다고 알려져 있다.


만일 산장에서 숙박을 하려면 반드시 예약이 필요한데 (예약 없이 무단 숙박할 경우 적발시 벌금 $144), 당연하게도 예약이 열리면 처음 2초 안에 마감된다. 팬데믹 기간 동안에는 산장 운영을 안한다고 한다.


가까운 시내 : 스쿼미시

광역 밴쿠버로부터 접근성 : 4/5

이동통신 / 데이터 : 안됨

프라이버시 : 1/5

수세식 화장실 / 샤워실 : 없음

시설 관리 / 순찰 : 1/5

RV 정화조 : 없음

RV 급수 시설 : 없음

캠핑 사이트 크기 : 1/5

나무 우거짐 : 1/5

호숫가 / 강변 / 해변 : 있음

햇볕 :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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