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선택한 경로의 오류
심청이도 이제는 늙어 안경을 쓰고 에구구를 달고 기력이 없다.
어린 시절, 언제부터일까?
헤아리기도 가물가물한 시절부터 심청은 부모를 무척 위했다.
6.25 때 피난 내려온 모(母)는 착한 마음뿐인 부(父)를 만나 장손 며느리로 10년을 넘게 무자식으로 살고
그 후 어렵사리 낳은 자식이 하필 두 딸이었다. 첫 딸이야 부담없이 살림밑천이라 둘러치면 되었지만
두 번 째 딸은 더이상 자식이 없던 부모에겐 인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죄인의 증거품이었다.
그 까닭에 비논리적 구실의 구박은 지속적이고 집중적으로 가해졌다.
그런 둘 째 심청은 그녀 자신을 보호하듯 부모를 친가 세상에서 보호해야할 대상으로 여기고 말았다.
세월은 흘러 부가 돌아가시고 홀로 남은 모에 대한 심청의 집착은 모를 행복하게 하고 그녀 자신을 뿌듯하게 했다.
그렇게 또 20년이 흘러 심청이도 늙어가던 어느 날,
심청은 돌연
'이렇게 사는 것이 맞는 것인가?'
......
어느 날, 심청은
자신의 효에 패러다임을 바꿔버렸다.
중년의 나이에 선 대부분의 삶에는
양 어깨에 부모와 자식을 얹어 꽤나 무거운 삶을 고민한다.
중년인 자신은 자식이면서 부모이다. 그 모습은 양쪽 어깨와 중첩된다.
중년인 심청은 자신이 누려야 할 삶의 종류 중에서 대부분을 자식으로의 역할로만 존재했다.
내 이야기다.
그러니 얼마나 아쉬운 것들이 많았겠는가!
나를 위로해야 할 때 부모를 위로하고 나에게 써야 할 시간들을 부모에게 쏟고 살았으니 얼마나 나의 젊은 시절이 그립겠는가!
시대가 만들고 가족이 실천하고 그리고 내가 다시 답습한 효녀 심청을 서서히 벗고 싶은 마음이 꿈틀거렸을 때 죄책감이 밀려와 잠을 잘 수 없을 정도였다.
심청이 콤플렉스는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눈알을 브럿치로 멀게 했듯 자신이 결단하고 아플만큼 아픈 후 서서히 해답이 찾아온다.
그 해답은 만국민의 공용이 될 수 없다.
딱 자신만의 해답이다. 세상에 선과 악이 아닌 자신의 해답.
토마스 S. 쿤은 현재 패러다임에 해답이 있을 것으로 여기는 우물 안 개구리 과정을 정상과학의 시대라 정하고 그러다 스스로 오류를 찾아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이동하는 과학 구조를 혁명적으로 제시했다.
나의 효 또한 혁명적 구조를 맞이했다.
세상은 달라지고 나도 달라진다.
모든 것에 그 때가 있는 법이다.
그래서
중년의 심청은 그저 중년이 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