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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a Kim Sep 04. 2021

마음을 지켜주는 건 '진심'이 아니다


몇 년 전, 우리 반에 머리 커튼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녔던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학생 개별 상담 때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 아이의 목소리도, 미소도 알 수가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됐다. 아빠로부터 오랫동안 학대를 당해 왔다는 것과 오랜 기간 친구들로부터 배제된 생활을 해왔다는 것을.



나는 그 아이를 1학기 동안 하교 때 종종 따라다녔다.

학원 앞에서 버스를 내리는 그 애를 붙잡고 길가 어묵집에서 김밥, 어묵을 같이 먹었다.

그리고 학원 문 앞까지 데려다줬다.



1학기가 끝나던 여름방학식 날, 그 애가 교무실로 찾아왔다. 그때 그 아이의 목소리를 처음으로 제대로 들은 것 같다.

“방학이니까 이제 선생님 쉬세요.”



나는 그 말을 듣고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했다.

“나 야행성인 거 알지? 샘은 밤에 깨어있으니까 어디 혼잣말이라도 하고 싶으면 새벽이라도 나한테 톡 보내. 그리고 아침엔 가끔 나 좀 깨워주라.”

서로 마주 보는데 '푸훗'하고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왜 우리 둘 다 눈가엔 눈물이 맺혔을까.





만화를 기가 막히게 잘 그리는 아이와 짝으로 앉혔다. 이야깃거리가 많으니 그 아이의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만화는 거의 매일 이슈가 됐고 반 아이들 전체가 점점 그 자리로 몰려들었다.



가끔 내가 아이스크림을 사줄 땐 늘 그 둘을 불러서 나눠주게 했다. 어쩌다 그 아이의 책상에 먹을 게 있으면,

“나 한 입만.” 하면 감추는 시늉도 했다.

“우리 분필 없어 얘들아!” 하면

그 아이가 말없이 일어나 가지고 오기도 했다.



체육대회 때도 슬쩍 보면 우리 반은 각개전투가 없었다.

내가 일부러 철퍼덕 그 아이의 옆에 앉아서 실없는 소리를 해대면 다른 아이들은

"샘! 썰렁해요!", "아, 진짜 꼰대 마인드!" 하며

장난스럽게 나를 면박 주며 다가왔다.




지금도 정말 미안한 게 사실 난 그 아이의 인지능력이 다소 느린 줄 알았다. 글씨도 이상하게 알아볼 수 없게 써서 더 그랬던 것 같다. 그러다 백일장에서 그 아이의 시를 보곤 입을 틀어막았다. 정말이지 놀랍도록 잘 쓴 아름다운 시.



왜 지금껏 한 번도 상을 받지 못했을까 생각을 해봤다. 혹시 담임들이 그 아이에게 선입견을 가지고 아예 예선에서부터 제외를 시켰던 게 아니었을까. 그게 아니라면 알아볼 수 없었던 독특한 그 아이의 글씨 때문에 주목받지 못했던 건 아닐까.



나는 그 아이의 시를 그대로 타이핑 해 출력한 다음 원본과 함께 제출했고 그 아이는 무려 ‘장원’을 받았다.

엄마의 학창 시절과 벚꽃 봄에 대한 시였다.

교사가 되고 가장 기쁘고 벅찼던 순간이었다.



삶 곳곳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작은 아름다움과 따스함이 도처에 있었다. 지금 그 아이는 대학생이 되었고 카톡 프로필 사진을 보니 몰라 보게 미소가 밝아서 안도했다.




다음 학년 반 배치 기간에 부장교사를 찾아갔다.

담임들 중에 내가 가장 신뢰하는 선생님이 계셨고, 그 아이와 만화 덕후 아이를 꼭 그 선생님 학급으로 배정해 달라는 것과 서로 꼭 짝을 맺어 달라는 것 두 가지를 부탁했다.



마음을 지켜주는 건

‘진심’보단 ‘지속성’의 힘이 훨씬 더 크다.

‘안정성’ 속에 다음 걸음이 있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의 나의 걸음에 대해 또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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