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침만이라도 늘어지게 자고 싶었다. 또 그 목소리 때문에 깼다. 나는 베개로 뒤통수를 감싸 안고 화가 나서 씩씩거렸다. '도대체 목소리는 왜 저렇게 큰 거야?', '아니 왜 시도 때도 없이 오냐고!', '잠 좀 자자고!'
앞집 아줌마는 목소리가 정말 컸다. 키가 작고 뚱뚱한 몸에 넙덕한 얼굴, 항상 옆 가르마의 단발머리는 밖으로 삐쳐 나있었다. 손은 복어마냥 퉁퉁했고, 미간 사이에는 큰 사마귀가 나있어서 자꾸 눈길이 쏠렸다. 걸을 때도 뒤뚱거리며 걸었는데 뛰는 건지 걷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지은아! 앞집 아지매한테 밥 잡수러 오시라 해라."
"아니 왜 또 밥을 같이 먹어? 음식 했으면 갖다 드리면 되지!"
늘 이런 식이었다. 엄마 표현으로 내가 '땍땍거리고' 있으면, 어김없이 아줌마의 호탕한 웃음소리는 우리 집 대문이 '딸깍, 쿵' 열고 닫히는 소리와 함께 개선장군 행차 팡파르처럼 요란하게 등장했다. 아줌마는 항상 탤런트 전원주처럼 '헤헤헤헤' 웃으면서 말을 시작하는 버릇이 있었다. 당시 12살이었던 나는 아줌마를 온 마음을 다해 미워했다. 그걸 잘 아는 아줌마는 내 볼을 꼬집으며, "으이그, 이 쪼매난 가시나 이거 성질내는 것 좀 봐라!" 하면서 특유의 웃음으로 '으하하하' 하고 웃었다.
엄마는 심부름을 꼭 밤 10시에 드라마가 시작할 때 시켰다. 엄마의 집안일이 끝나는 시간이었다. 최진실과 최수종이 편의점에서 라면을 먹으며 다투고 있는 장면을 볼 때는 심장이 쿵쾅 뛰어서, 그 시간이면 엄마가 내 이름을 부를까 봐 늘 마음을 졸였다. 엄마가 심부름을 시키면 조금만 뻔뻔해지면 됐다. 그러면 엄마가 짜증 내는 걸 나보다 더 못 견디는 동생이 자진해서 다녀왔다. 편의점에서 라면을 먹는 것도, 물을 돈 주고 사 먹는 것도 모두 신세계 같던 시절이었다.
ㅣ 엄마와 아줌마의 인연
엄마와 앞집 아줌마의 인연은 25년이나 되었다. 아줌마는 우리 엄마보다 열 살이 더 많았다. 엄마가 중학교 때부터 한 동네에 살았고, 아줌마는 수출무역단지 근처의 공장을 다니고 있었다. 엄마는 청소년기를 떠올리면 벌써부터 울먹였다. '어릴 때'라는 말로 시작하는 모든 말투에 울분이 가시처럼 쓰라리게 박혀 있었다. 그 시절에 아줌마가 아니었다면 엄마는 벌써 죽었을 거라고 했다.
외할아버지의 부모님은 몇 대가 먹고살 수 있는 재산이 있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돈을 다 싸들고 피난 갈 수가 없어서 아궁이나 다락방 바닥을 뜯어 돈 보따리들을 숨기고 왔다고 했다. 외할아버지의 가족은 다시 그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믿었고 다시는 돌아가지 못했다. 증조 외할아버지의 선산도 다 빼앗기다시피 했고 외할아버지는 하루가 멀다 하고 술에 취해 있었다. 엄마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동생들을 먹이고 입히고 집안일을 하며 외할아버지의 레퍼토리를 지겹도록 들었다. 그때 엄마를 건져 올려준 게 바로 아줌마였다.
엄마와 아줌마는 어린 내가 듣기에도 쓸데없는 말들만 했다. 배추값 폭등이나 고추값 폭락, 시장에 '김민재 아동복'집 아저씨가 또 술을 먹고 시장에서 꼬장을 부린 것, 쌀집 아줌마가 부싯가게 아줌마랑 드디어 한 판 했다는 것, 우리 외할머니가 성도사 절에 가서 스님한테 듣고 온 미신 같은 말들, 이번에 담근 고추장이 엄청 맛나다는 것, 그딴 것들 뿐이었다. 나는 공부를 할 때마다 들리는 저런 무쓸모 말들을 참다 참다 결국은 성질을 부렸다. "제발 공부 좀 하자고! 남들은 자식 공부 못 시켜서 안달인데, 왜 우리 집은 내가 공부할 때마다 못 하게 하냐고?!" 그러면 엄마는 나를 째려보며 "저 못된 가시나 봐라." 했고, 아줌마는 내가 싫어하는 웃음소리로 "아이고, 우리 지은이, 눈깔 봐라! 썽 내도 이뿌네? 헤헤헤헤, 내 간다잉!" 하고 돌아갔다.
ㅣ 아빠와 아저씨의 술상
아줌마는 아저씨를 매일같이 구박했다. 옆에서 보기 민망할 정도로 아저씨를 면박 주고 괄시했다. 아줌마의 남편은 군무원이었고 하루가 멀다 하고 우리 아빠와 같이 우리 집에서 술을 마셨다. 매일 저녁 8시 30분만 되면 어김없이 우리 집 초인종이 울렸다.
아줌마와 아저씨의 차이라고 한다면, 아줌마는 벽돌 사이 비밀 장소에서 열쇠를 꺼내 우리 집 대문을 열고 들어온다는 것이었고, 아저씨는 벽돌 틈에 대문 열쇠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늘 초인종을 누른다는 것뿐이었다. 아저씨는 아줌마와 마찬가지로 똑같이 시끄러웠고 호탕했고, 덩치가 크고 목소리는 더 컸다. 가게 가서 술을 마시지, 왜 하필 만날 천날 우리 집에서 술을 마시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언제 거나한 노랫소리가 시작될지 나는 매번 날이 서 있었다.
"지영이 아부지 계십니까?"
"아니오. 아빠 주무시는데요. 안녕히 가세요."
"누고? 지은이가? 가시나, 또 뻥치고 있네. 빨랑 문 안 여나?!"
인터폰 전화기를 내려놓기도 전에 아빠는 안방에서 옷을 입고 나오며 같은 말만 했다. "지은이, 들어 가서 공부해." 또 동네가 떠나갈 듯이 시끄러울 텐데 공부를 하란다. 아빠는 언제나 저녁 7시 땡 하면 집에 들어왔다. 퇴근시간이 어떻게 저렇게 정확할 수가 있나 싶을 만큼 성실했다. "아빠는 친구도 없어요? 왜 매일 퇴근해요? 출장 같은 거 없어요?" 1년에 표정 한 번 안 변하는 아빠가 그럴 땐 피식 웃음을 보이기도 했다. 아빠는 말이 없이 점잖았고, 아저씨는 말이 쉴 새가 없었다. 도대체 한 구석도 맞는 게 없던 두 아저씨가 무슨 재미로 술을 함께 마시는 건지도 신기하기만 했다.
아빠는 전주 사람이었다. 군대를 제대하고 일자리 때문에 전라도에서 경상도로 왔다. 아빠의 단칸방이 엄마 집 근처여서 오고 가며 엄마를 보았다. 아빠는 엄마를 보자마자 첫 눈에 반해 결혼해야겠다고 생각했단다.
아저씨와 아줌마는 초등학교 동창이었다. 그때부터 그렇게 싸우다가 미운 정이 들어 결혼을 했단다. 미운 건 미운 거고, 정은 정인데 어떻게 두 단어가 합성어로 공생할 수 있다는 건지 그땐 이해되지 않았다.
우리 집 거실에 술상이 펼쳐지고 아줌마까지 출동하면 그날은 드라마도, 공부도 모두 포기 했어야 했다. 공부해야 하는데 못 하니까 온갖 성질은 다 나고, 결국은 내 마이마이 워크맨으로 드라마를 소리로만 들으며 화를 삭였다. '아...... 어떻게 매일 오냐고?!' 아저씨가 출장을 가는 날이나 아줌마가 친정 가는 날이 제일 좋았다. 나는 아줌마, 아저씨 때문에 시끄러운 모든 걸 싫어했다.
ㅣ 다 같이 절에 가는 날
아빠는 기독교였고, 엄마는 불교였다.나는 아빠가 엄마처럼 경상도 사투리를 장난으로 따라 쓰는 게 너무 싫었다. 말 수도 적은 아빠는 하루에 몇 마디나 말을 한다고 그 적은 말조차 억센 경상도 말을 따라 쓸까.
명절에 친가가 있는 전주에 가면 작은 아빠 가족들과 고모네 가족 할 것 없이 빙 둘러앉아 기도를 했다. 우리한테는 마지막 '아멘'만 하면 된다고 힌트를 줬지만 나는 달랑 그 두 음절조차도 낯설었다. 엄마는 혼잣말로 우리한테 윙크를 하면서 "야야. 예수쟁이들은 국 데울 필요도 없겠다. 기도 한다고 맨날 식은 국만 먹을 것 아이가."라고 말하며 킥킥거렸다.
"아지매! 지금 갑시다!"
엄마와 아줌마의 말은 참 신기했다. 목적어도, 보어도 없었다. 그런데도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할 건지 다 통했다. 두 사람은 20년째 같은 절에 다니고 있었다.
"여보! 준비됐어요? 지금 갑시다!" 나는 절에 가는 것만 좋아했다. 엄마가 다니는 절의 스님은 결혼 후에 출가해서 아들이 셋 있었다. 스님의 세 아들들은 우리 세 자매들 보다 두 살씩 많았다.
나는 큰 오빠를 좋아했다. 나는 5학년, 큰 오빠는 고2였다. 나는 매번 못 이기는 척 엄마를 따라나섰다. 용석이 오빠는 어른들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내 머리를 큰 손으로 목탁을 닦듯이 슥슥 만지며 "까탈쟁이도 왔네?"라고 인사했다. 이게 몇 시간을 빗어서 묶은 머리인데 그걸 그렇게 센스 없이 흐트러뜨리나 싶어 쏜살같이 해우소로 달려가 머리를 다시 매만지고 나왔다.
아빠는 절에 도착하자마자 일하기 편하게 스님 바지로 갈아입었다. 기독교였던 아빠는 예불은 드리지 않았고 절 곳곳을 다니며 전기가 나간 건 없는지, 바닥이 패인 곳은 없는지, 수도와 가스는 괜찮은지 등을 점검했다. 나는평상에 앉아 보살님이 주시는 시원한 식혜를 마시며 다리를 까딱까딱 튕기면서 스님의 목탁소리를 들었다. 바람이 휘휘 지나가는 그 순간들이 참 좋았다.
햇살에 반사되는 눈부신 아빠의 대머리를 보며 거울에 반사되는 햇빛으로 아빠를 조준하기도 했다. 절에 처음 온 어떤 신자들은 절 마당에서 아빠를 마주치면 손을 합장해 "스님, 안녕하십니까. 관세음보살."이라고 인사했다. 그럼 아빠는 똑같이 합장을 하고 인사를 한 뒤에 나를 뒤돌아 보고"아멘"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게 그렇게 웃겨서 스님의 예불 소리를 방해할까 봐 입을 틀어막고 낄낄거렸다.
우리 가족, 아줌마네 가족, 스님 가족은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보살님이 주시는 산채비빔밥과 시락국은 어찌나 맛있던지 더 먹고 싶어도 용석이 오빠가 있으면 꼭 남겼다. 용석이 오빠는 공부를 굉장히 잘해서 나는 매번 모르는 문제를 일부러 만들어서 들고 갔다. 용석이 오빠가 설명할 때 대답을 해야 하니까 이미 해설지의 과정도 다 외우고 갔다.
어쩌다 언니도 같이 절에 가면 옆에서 지켜보던 언니는 혀를 차며 "지랄한다."라고 상소리를 해댔다.
용석이 오빠는 손가락이 무척 하얗고 길었다.
절 평상 옆에는 커다란 버드나무가 있었는데 바람이 불 때마다 용석이 오빠의 얼굴에 버드나뭇잎들이 살랑살랑 그려졌다. 햇살 아래에서 풀벌레 소리, 새소리를 들으며 우리가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 어른들은 절 마당에 돗자리를 깔고 차담을 나누었다.
스님은 가끔 사주 같은 걸 봐주었다. 느낌이 안 좋은 것들, 이렇게 선택했으면 하는 말도 안 되는 것들을 근거 없는 직감으로 조언해서 나는 속으로 트집을 잡았다. 그날 스님의 예언은 아저씨는 절대로 운전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오토바이도 안되고 자전거도 안된다고 했다. 아저씨는 매일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고 있었는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저런 말을 지어내나 싶었다. 아저씨가 껄껄 웃으면서 "아니 스님. 그럼 만날 택시만 타고 다니라고예?" 스님은 버스든 택시든 어쨌든 아저씨한테 자동차나 오토바이만큼은 절대로 조심하라고 했다.
ㅣ 나의 아지트
엄마는 성격이 정확하고 합리적인 가운데 잔정도 많았다. 내가 새를 무서워하는 것도 못됐다며 핀잔을 줬고 내가 절 산길을 올라갈 때마다 바닥의 개미들을 발로 툭툭 차고 가면 어김없이 등짝을 때렸다. "비둘기는 악마의 자식 같이 생겼어." 그때이 한 마디로 얼마나 꾸중을 들었는지 모른다. 왜 살아있는 죄 없는 생명에게 악담을 하느냐며, 성질머리가 그렇게 뾰족하면 이다음에 사회생활을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알지도 못하는 내 학교생활, 교우관계까지 의심을 했다. 이런 식으로 시니컬했던 나는 늘 엄마에게 꾸지람을 들었다.
엄마에게 크게 혼난 날은 최대의 반항이 가출이었다. 그런데 가출해 봐야 늘 아줌마 집이었다. 아줌마 집과 우리 집 사이에는 매우 좁은 골목이 있었는데 우리 집 대문은 아줌마 집의 반대편으로 나있었다. 어느 날 그걸 굳이 인부들까지 불러 아줌마 집 쪽의 우리 집 담을 뚫어 대문을 하나 더 만들었다. 웃기게도 그 이후로 나야말로 아줌마 집을 내 집 드나들듯 했다.
학교 갔다가 집에 왔는데 아무도 없으면 무서워서 아줌마 집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아줌마가 해주는 미더덕 된장찌개는 정말 맛있었다. 우리 엄마 된장찌개는 호박이 들어가 국처럼 묽은데, 아줌마의 된장찌개는 감자가 들어가서 걸쭉했다. 미더덕, 우렁, 바지락을 잔뜩 넣고 쌈장과 고운 고춧가루를 넣어 강된장 같았다. 그걸 호박잎에 쌈싸 먹으면 그게 그렇게 맛있었다.
아줌마 집은 한옥이라 마루에 걸터 앉아 있으면 비가 내리는 걸 보기에 참 좋았다. 처마 끝으로 떨어지는 빗물은 내 무릎에 닿을까 말까 했다. 내 무릎 위로 거의 막바지의 빗물이 똑 떨어져서 찰나를 머물다가 내 종아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그 감촉이 좋았다. 거기에 앉아서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는 것도 좋았다.
내 친구들과 내 동생, 내 동생 친구들과 편을 먹고 숨바꼭질을 하면 아지트는 언제나 아줌마 집이었다. 아줌마 집은 본체 옆에 시멘트로 지어진 엘리베이터 만한 공간의 창고가 있었는데 그 옆으로 계단이 나있어서 옥상까지 연결이 됐다. 거기로 올라가면 온 동네가 한눈에 다 보였다.
우리 집은 2층짜리 단독 벽돌집이었는데 아줌마 집 옥상에 올라가면 2층 내 방이 훤히 다 보였다. 다른 공간에서 내 공간 속을 들여다보는 게 좋았다. 해질 무렵의 주황빛이 내 방의 창으로 한가득 들어와 내 침대 위에 내려앉는 것까지 다 보였다. 놀이에 지친 우리는 아줌마 집 옥상의 장독대 난간에 참새들처럼 조르륵 기대앉아 해가 지는 걸 함께 봤다. 그러면 아줌마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들아! 찌짐 무러 온나! 아지매가 정구지 찌짐 바삭하니 맛있게 꿉어 놨다!" 아줌마는 지나가는 모르는 동네 아이들도 다 먹였다.
친구들과 같이 아줌마 집에서 밥을 먹으면 아줌마는 꼭 내 밥 위에만 반찬을 올려 줬다. 특히 생선을 올리기라도 하면 나는 엄마한테 성질을 부리듯이 기겁을 했다. "아, 아줌마! 저 생선 싫어하잖아요! 나는 밥을 하얗게 먹는 게 좋은데. 밥 위에 고춧가루 묻는 거 진짜 싫다고요." 푸념하면 아줌마는 또 호탕하게 웃으며 "으이그, 이 놈의 가시나는 우째 이리 땍땍댈꼬?" 그러면서도 끝에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한 마디를 더 얹었다. "지은아, 니는 한국 사람이 우째 이리 생깄노? 어이?" 나는 아줌마가 싫다가도 마지막 저 말이 좋아서 한 마디를 더 땍땍거리기도 했다.
ㅣ 현자 언니와 훈이 오빠
아줌마는 하루에도 수 차례 우리 집을 들락거렸지만, 화요일과 수요일 밤 8시는 더 특별했다. 주간 행사처럼 무슨 반상회도 아니고 그 시간은 우리 외할머니까지 가세해서 모였다. 화요일은 드라마 '전원일기'를 하는 날이었고, 수요일은 '경찰청 사람들'을 하는 날이었다. 이걸 왜 이렇게 모여서까지 봐야 하는지 누가 만든 규칙인지 알 수도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모여서 마시고 먹고 같이 티브이를 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끔은 지나가던 옆집 가족들도 우리 집에서 나는 소리를 듣고 들어와서 같이 술 한 잔을 기울이고 갔다. 나는 거의 매일 심통이 나있었고 성질을 부렸다. 엄마와 외할머니는 무슨 초등학교 5학년짜리가 고시 공부라도 하는 거냐며 나만 보면 공부 좀 그만 하라고 했다. 언니와 동생은 사이에 껴서 잘만 노는데 왜 유독 가운데 낀 너만 까탈이냐며 핀잔했다.
차라리 내가 아줌마 집으로 가는 게 나았다. 아줌마 집 마루에 걸터앉아 한옥 기둥 끝에 달린 등불에 비추어 책도 읽고 공부도 하고 워크맨에 이어폰을 꽂아 드라마도 들었다. 어쩌다 등불로 달려드는 박쥐만 한 나방이 펄럭이고 날아다니면 나는 '꺅' 소리를 질렀고, 그럼 훈이 오빠가 방에서 쿵쿵 나와 에프킬라로 시원하게 죽여줬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박쥐만 한 나방이 죽어가는 걸 훈이 오빠 뒤에 숨어서 지켜봤다. 마치 건전지가 다 된 장난감의 마지막 진동 같은 여린 날갯짓이 징그러우면서도 자꾸 보게 됐다.
서서히 줄어들어 꺼져 가는 촛불처럼
날개짓이 서서히 느려지는 나방을 보며
사람도 저렇게 서서히 쇠약하며 죽어가겠지 라고 생각했다.
훈이 오빠는 아줌마의 아들인데 어릴 때 사고로 다리를 절었다. 바지를 항상 저 아래까지 내려 입어서 훌러덩 벗겨지면 어쩌나 불안했다. 훈이 오빠는 말이 거의 없었고 아저씨가 일하시는 부대에서 같이 일을 하고 있었다. 훈이 오빠는 내가 아줌마 집에 갈 때마다 신기한 미국 과자를 줬다. 나는 훈이 오빠의 무심한 애정이 좋고 편안했다. 미국 과자가 있으면 아줌마가 진작에 나한테 줬을 텐데, 훈이 오빠는 그걸 꼭 오빠의 서랍에서 꺼내 왔다. 오빠는 내가 내 친구들과 오빠 방을 들락거려도 싫은 내색 한 번을 안 했다.
왜 내 방에는 에어컨을 안 달아주냐고 시위를 했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는 '가정환경 조사서' 같은 걸 적어서 냈는데 거기에는 부모님의 직업, 직급, 월급, 집에 있는 가전제품까지 조사를 했었다. 우리 반에 에어컨이 있는 집은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에어컨이 있는 거실에서 상을 펼쳐놓고 방학 '탐구생활' 숙제를 하는 시간이 제일 좋았다. 엄마가 가끔 만들어 줬던 대형 카스텔라 크기만 한 '컬러 학습 대백과 사전'을 펼쳐 놓고 알록달록 색색 볼펜으로 예쁜 글씨를 꾸며가며 실험 결과 같은 걸 쓰는 걸 가장 좋아했다. 나에겐 그게 힐링 시간이었다. 아줌마 부부와 우리 엄마, 아빠, 가끔은 작은 외숙모까지 거실을 차지하고 있으니 방학 숙제를 하려면 내가 도망가야 했다.
그럴 땐 현자 언니 방으로 갔다. 현자 언니는 아줌마의 큰 딸인데 아줌마와 똑같았다. 아줌마처럼 목소리가 크고 호쾌하게 웃었고, 아줌마처럼 덩치도 크고 아줌마처럼 따뜻했다. 언니는 아가씨였다. 내가 언니 방에 가면 언니는 내 얼굴에 예쁘게 화장을 해주었다. 그때는 야유회나 가족 나들이가 아니면 사진을 찍을 일이 없었다. 언니는 아줌마와 똑같이 말했다. "아이고. 우리 지은이, 와 이래 예뿌노? 사진 찍어놓고 싶네. 나중에 크면 남자들이 졸졸 따라다니겠다!" 마지막 문장만은 달랐다. 아줌마는 그런 말 하면 팔자가 사나워진다고 언니한테 입방정 떨지 말라며 혼을 냈다.
아줌마 집 냉장고에는 늘 아줌마 표 단술이 있었다. 그게 어찌나 맛있던지 친구들과 고무줄놀이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고 나면 냉큼 아줌마 집으로 달려갔다. 나는 신발도 안 벗고 아줌마 집 마루에 엎드려, 두 발을 들고 포복하며 냉장고 문까지 기어갔다. 그럼 훈이 오빠가 말없이 방에서 나와 식혜를 컵에 따라서 바닥을 기고 있는 내 코 앞 바닥에 툭 놓고 들어갔다. "흔들어야지!" 내가 몇 번을 말했는데도 훈이 오빠는 매번 병을 흔들지 않고 식혜를 따랐다. 그럼 훈이 오빠는 시익 웃으면서 다시 나와 식혜 병을 슬슬 흔들어 또 따라 줬다.
어떤 날은 내가 훈이 오빠 방에 들어가서 서랍을 열고 미국 과자들을 내 치마에 잔뜩 담아 보자기로 싸듯 들고 나와서 아줌마 집 마당의 평상에서 친구들과 같이 나눠 먹었다. 가끔은 내가 아줌마 같을 때도 있었다.
ㅣ 땍땍대도 나를 예뻐한 아줌마의 식구들
나는 차라리 겨울이 나았다. 여름은 온 동네가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사니까 아줌마 부부가 우리 집에 와있는 날은 지나가던 온 동네 사람들도 우리 집으로 들어왔다. 겨울은 내 공간이 독립적이었고 그래서 안정감이 들었다.
5학년 겨울 방학이었다. 이쪽 남부 지방에 이례적으로 펑펑 함박눈이 내렸다. 설날에 전주의 할아버지 댁에나 가야 눈 구경을 할 수 있었다. 우리는 태어나 처음으로 우리 집에서 함박눈을 보았다. 언니와 동생은 진작에 마당으로 뛰쳐나가 눈을 먹고 던지며 방방 뛰었다. 둘이서 맨 손으로 눈사람을 만들겠다고 설치는 걸 2층 내 방에서 내려다 보고는 한심해서 혀를 찼다.
아줌마 집 누렁이도 신이 나서 아줌마 집 창고의 계단을 몇 번이나 미친 듯이 뛰어오르고 뛰어내렸다. 나는 개 눈에도 눈이 보이는 게 신기해서 한참 동안 누렁이를 관찰했다. 아니 저렇게 헐떡거릴 만큼 힘들면서 도대체 왜 저렇게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바보 누렁이.
아줌마 집 개는 무려 새하얀 흰색이었는데 이름이 '누렁이'였다. 이건 이 개의 정체성을 너무나 무시한 처사가 아니냐며, 아저씨가 술 취해서 장난으로 지은 줄 알았던 이름을 따진 적이 있었다. 아저씨는,
"지은아. 요요, 우리 누렁이 한 번 자세히 볼래?
야가 귓속까지 하~~~얗다. 니 이게 무슨 말인고 아나?
우리 누렁이처럼 개가 온몸이 하얗다는 거는 다음 생에는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뜻이다. 근데 이기 또 하늘이 알면 시샘을 한다꼬. 그래서 야가 흰 개라는 걸 동네 사람들도 모르게 해야 한다 이 말이다. 그래서 절대로 니 야아한테 '흰둥이'라꼬 부르지 마래이!
원래 '오늘은 안 바빠서 참 좋네?'이래 말해뿌면 안 바쁠 일도 갑자기 바빠지그든? 입이 방정이라꼬, 입이 보살이어야 우리 누렁이, 다음 생에 사람으로 태어난데이. 긍께 니도 나쁜 말을 하면 안돼! 그기 다 니 복이 된다! 알았제?"
흰 양말에 모래 한 톨이라도 묻을까 봐 운동장을 빙빙 돌아서 돌길로만 걸었고, 옷에 물 한 방울이라도 튀면 당장 갈아입어야 했던 까칠하고 예민했던 나를 아줌마네 식구들만 예뻐했다. 엄마가 대노한 날은 어김없이 아줌마가 출동해서 내 손을 잡아끌고 아줌마 뒤에 숨겨놓으며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이고! 숙희야! 사람이 허허거리기만 하는 기 좋은 긴 줄 아나?! 지은이처럼 따지고 성깔 있고 정확하고 욕심이 있어야 사람이 뭐가 돼도 되는 기지! 야 까탈시럽다고 뭐라 하지 마라! 나는 보는 것도 아깝구만. 내 딸 하자! 지은아, 느그 엄마 오늘 안되겠다! 가자! 현자 언니 방에서 자그로."
ㅣ 지영이 아부지 계십니꺼?
펑펑 함박눈에 온 동네가 축제였던 그날 밤, 어김없이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아저씨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은 싫지가 않았다. 되려 아줌마 부부가 오셨으면 했다. 아줌마 부부가 와야 마당에서 눈 구경을 하며 늦게 잘 수 있으니까. 내 마음이 이런 날은 1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했다.
2층 내 방에서 고개를 쏙 내밀자 아저씨가 보였다. 아저씨 양 손에는 아빠가 좋아하는 OB 맥주 두 병이 들려 있었다. 나는 아저씨를 향해서 소리쳤다. "아저씨, 대문 열고 들어오세요! 아줌마는요?" 아저씨는 이미 거나하게 술이 한 잔 돼서 내 목소리도 못 알아 들었는지 위는 안 쳐다보고 자꾸 좌우로만 찾아 헤맸다. "아저씨! 위예요. 위! 지은이 방!"이라고 하자 아저씨는 껄껄 웃으면서 "오야, 지은아! 아빠는?"
내가 대답을 하려던 차에 언제 올라왔는지 엄마가 나를 비집고 내 방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아재요! 지영이 아빠, 잡니다! 내일 오이소!" 나는 엄마를 보며 "아빠 벌써 자?"라고 물었더니 엄마가 나를 슬쩍 뒤로 밀었다. 아저씨는 큰 소리로 "요요, 맥주 사 왔는데 이거라도 받으소!"
엄마는 "아닙니더! 그거 들고 내일 오이소!",
"지금 10시도 안 됐구만 벌써 잡니꺼? 하... 오늘은 마이 서운한데? 지영이 엄마, 이거 내 영영 못 오게 하는 거 아닙니꺼? 내 오토바이 자랑 좀 해야 되는데?"
아저씨는 일주일 전에 새로 산 오토바이를 매일 닦았다. 혼다를 사고 싶었는데 우리 아빠를 통해 20%나 할인을 받을 수 있어서 효성스즈키로 샀다. 까만 오토바이는 쇼바가 말 궁둥이처럼 둔하고 높았다. 앞모습은 아몬드처럼 흘겨보듯 밉살스럽게 생겨서 내 생각엔 뭘 저런 걸 샀나 싶었다. 꼭 까진 청소년들이나 탈 것 같은 디자인이었는데 아저씨는 볼 때마다 한 번 닦고 뒤로 나와 가만히 쳐다보고, 또 한 번 닦고 뒤로 나와 술 마실 때처럼 "캬아!" 소리를 냈다.
ㅣ 이건 꿈일까?
어젯밤, 아저씨가 돌아가고 오늘 밤은 조용히 잘 잘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처음으로 함박눈이 와서 그런지 심장이 벌렁거려 잠이 잘 안 왔다. 언니와 동생까지 우리 셋은 맨 손으로 눈사람을 만들어서 온몸이 얼어 있었다. 서로 눈만 마주쳐도 으르렁대며 싸웠던 우리지만 그날은 하얀 눈 덕분인지 언니 방에서 바닥에 이불을 깔고 셋이나란히 다 같이 잤다. 라디오로 별밤을 듣다가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게 잠이 들었다.
아침인지 점심인지 여느 때처럼 아줌마의 목소리에 깼다. 그런데 평소랑 사뭇 달랐다. 동생은 겁에 질려 이불속으로 파고들었다. 내가 이불을 걷어내자 다시 잽싸게 이불을 훔치며 소라게처럼 쏙 들어갔다. 언니는 거실에 서 있었다. 아줌마는 이상한 소리로 비명을 지르더니 우리 집에 들어오자마자 나무토막처럼 그대로 거실 바닥에 떨어지듯 '쿵'하고 드러누웠다.
나는 아빠가 말을 그렇게 빨리 하는 걸 처음 봤다.
"지영아!!! 지은아!!! 119! 빨리! 빨리 전화해!"
뒤뜰 장독대에서 동치미를 푸고 있던 엄마는 아빠 목소리에 놀라 욕실을 통해 뛰쳐 들어오다 아줌마를 보고는 국대접을 그대로 놓쳐버렸다. 그릇은 욕실 타일과 부딪혀 둘 다 산산조각으로 깨졌다. 엄마는 맨발로 도자기와 타일 파편들을 그대로 밟고 뛰어들어왔다.
"아지매...... 아지매!!!" 엄마는 울부짖었다.
언니는 119로 전화하며 울고 있었고 주소를 말하지 못해 내가 전화를 뺏었다. 우리 집 주소를 말한다는 게 아줌마 집 번짓수로 나도 잘못 말하고 있었다. 아줌마의 통나무처럼 뻣뻣하게 경직된 몸은 부르르 떨고 있었고 눈은 까뒤집혀 흰자만 내보이고 있었다. 아빠는 우리에게 다 나오라며 소리를 질렀고 빨리 아줌마의 몸을 주무르라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아줌마가 벌떡 일어나서는 너무나 멀쩡하게 양 손으로 단발머리를 귀 뒤로 꽂으며, "지은아! 니 와 학교 안갔노?"라고 말했다. 나는 이 상황이 도대체 무슨 일인지,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조차 혼동됐다. 그러더니 또 갑자기 다시 바닥에 철퍼덕 앉아 복어 같이 퉁퉁한 손바닥으로 바닥을 철썩 철썩 치며 "아이고...... 아이고......" 꺼이꺼이 울었다. 아줌마는 한겨울에 신발도 안 신고 맨발로 미친 사람처럼 우리 집 대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지금까지 내가 본 게 대체 무엇인지 심장이 벌렁거려 진정할 수가 없었다.
아빠는 곧바로 신발을 반쯤 신고 아줌마를 쫓아 뛰어 나갔고, 엄마는 집 안을 허둥지둥 왔다 갔다 하며 점퍼와 지갑 등을 챙겼다. 엄마의 발자국이 닿는 거실의 나무 바닥은 무당벌레 등껍질처럼 핏 무늬가 찍혔다. 엄마는 넋이 나가 흐느끼며신발도 짝짝이로 신고 아빠 뒤를 따라 쫓아 나갔다.
나는 언니를 보며 "이거 뭐야?"라고 물었고 언니는 온 얼굴이 눈물로 뒤덮여 있었다. 이불속에 소라게처럼 숨어 있던 동생은 언니 품으로 뛰어들어 서럽게 울었다. "야, 김지영! 이게 무슨 일이냐고?!" 어젯밤 펑펑 함박눈처럼 내리던 언니의 눈물은 주르륵 흘렀다가 꽉 다문 언니의 입술 사이를 지나 턱 끝에 고드름처럼 맺혔다.
"아저씨가
돌아가셨대......"
말도 안 돼.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나도 모르게 점퍼를 입고 운동화를 신고 엄마를 쫓아 뛰어나갔다. 큰길 저 멀리로 엄마가 뛰어가고 있는 게 보였다. 엄마가 중앙 시장 쪽으로 사라졌다. 시장 쪽이면 현대병원이고 예식장 쪽이면 제일병원이었다. 현대병원 앞은 아수라장이었다. 뉴스 취재진들도 와있었다. 다친 사람들은 응급실 대기 의자에도 있었다. 나는 아저씨를 찾았다. 응급실 간호사에게 가서 "저기요. 강병진 씨는요?" 간호사는 차트확인도 안 하고"영안실로 가보세요."라고 말했다.
영안실? 영안실이 뭐하는 곳이더라.
영. 안. 실......
아줌마 집 옥상 위노을처럼 내 얼굴도 점점 벌게지고 뜨거워지고 있었다. 눈물로 젖은 앞 섶도 뜨거웠다. 앞이 보이지가 않았다. 비명 소리가 들렸고, "저기요. 어어? 현자 아빠! 현자 아....빠...... 현자 아부지요!" 아줌마는 절규하고 있었다. 아저씨 나이, 겨우 쉰둘이었다.
나는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다가 계단에 주저앉아 버렸다. 다리가 후들거려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무서웠다. 아저씨가 저기 누워있다는 게. 다른 사람들은 모두 경미한 부상자들인데 왜 아저씨 이름만 이렇게 다급한 글자로 영안실 앞에 휘갈겨 쓰여있는지. 계단에 주저앉아 영안실 문만 계속 바라봤다. 문 앞에 붙은 A4 종이 한 장이 점점 명함 크기로 작아졌고, 내 시야는 점점 어두워져 암흑이 되었다가 다시 점점 밝아지며 앞이 보이기를 반복했다.
걷는 건지 뛰는 건지 매번 알 수 없었던 아줌마는 어떻게 그렇게 빨리 현대병원까지 뛰어갔을까. 뒤뚱거리며 걷다가도 발을 헛디디는 아줌마였다. 아줌마는 초인처럼 한겨울 얼음 길바닥을 위를 맨발로 뛰어 병원까지 갔다. 나는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우리 집 현관문을 열고 멍하니 서있었다.
우리 셋은 서로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언니는 방 문 옆에 기대 웅크리고 앉아 있었고, 동생은 곰인형을 안고 소파 밑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나는 왕 자리는 왜 만날 아빠만 앉느냐고 투덜댔던 아빠의 자리로 갔다. 아빠가 앉던 왕 자리에만 발받침이 있었다. 아빠 자리로 깊숙이 앉을 생각이었는데 거기까지 갈 힘도 없어 겨우 발받침에 털썩 주저앉았다. 온몸이 자동차 진동처럼 떨렸다.
분명 어젯밤 10시까지만 해도 거나하게 취해서 양 손에 술 병을 들고 초인종을 눌렀던 아저씨였다. 아저씨의 어젯밤 모습이 떠올랐다. "지영이 엄마요! 이거 영영 내 못 오게 하는 거 아닙니꺼?"영영 못오게 하는 것 아닙니꺼. 영영 못 오게...... 영영......
뉴스에는 강 모 씨가 나왔다.
전날 새벽까지 과음한 8톤 덤프트럭 운전기사가 출근길에 신호 대기 중이던 오토바이 한 대를 추돌했고, 오토바이 운전자 강 모 씨는 8미터를 날아 그 자리에서 즉사. 했다.
현자 언니와 훈이 오빠는 아줌마의 동생들과 함께 집에 들러서 옷가지와 물건들을 챙겼다. 아줌마처럼 호쾌했던 현자 언니는 계속 흐느끼며 울고 있었다. 훈이 오빠는 절름거리는 다리로 다급히 걷다가 넘어졌고 넘어진 채 일어나지 않았다. 훈이 오빠의 등이 떨렸다. 우리는 아줌마 집 앞 골목에 서서 박쥐 나방보다도 무서운 이 상황을 넋이 나간 채 바라봤다.
ㅣ 우리 누렁이는 다음 생에 사람으로 태어날 끼다
장례를 치르는 모든 단계마다 아줌마는 실신했다. 매일 큰 소리로 동네가 떠나갈 듯"이 놈의 영감탱이, 어디 가서 고마 확 디져뿌라!" 같은 무서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퍼붓던 아줌마였다. 아줌마는 검은 상복을 갈아입을 때도, 화장실을 다녀올 때도, 심지어는 머리에서 떨어진 흰 리본을 주워 다시 달 때도 실신을 했다.
아줌마는 장례 첫날에 이미 목이 상해 목소리가 전혀 나오지 않았다. 아줌마의 웃음소리가 세상에서 제일 시끄럽고 싫었다. 그런데 그렇게 우렁찬 아줌마가 '아' 한마디를 못했다. 차라리 비명이 나을 것 같았다. 바닥을 엉금엉금 둥근 등으로 기어 다니며 벌레 소리보다 작은 쇳소리로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숙였다 들었다 우는 아줌마의 모습은 가슴이 미어지게 처참했다. 아줌마가 소리도 못 내고 울자, 아저씨를 조문하러 온 사람들은 개미 소리 조차 낼 수 없었다. 아저씨의 3번 방만 조문객들의 절 하는 옷자락 소리뿐이었다.
아저씨의 영정 사진을 봤다. 영정 사진을 왜 저렇게 근엄한 걸로 했을까. 아저씨 웃음이 얼마나 호방한데저런 호랑이 같이 부라리는 사진을 갖다 놓았을까.
화장하는 걸 처음 봤다. 아저씨의 관이 도착했고 육중한 철문이 철컹하고 열리더니 엄청난 불길이 보였다. 아줌마 집 옥상 장독대 난간에 앉아 쭈쭈바를 먹으면서 보던 한여름의 타오르는 노을 같았다. 아저씨는 노을길을 따라 영영 가시는구나.
이제 갓 쉰을 넘긴 아저씨는 힘자랑을 한다고 양 팔에 뽀빠이처럼 나와 내 동생을 하나씩 걸고 아저씨 집에서 우리 집까지 우리를 데려다주곤 했었다. 아저씨의 두 팔이 들어가기에는 관 폭이 너무 좁아 보였다. 아저씨가 꽉 껴서 숨이 찰 것 같아 나도 숨이 막혔다.
그때 처음으로 영혼에 대한 생각을 했다.
내가 열 살 때 우리 집 진돗개 재롱이가 죽었다. 나는 2주일을 내내 울었다. 학교에서 '머지않아'라는 단어를 배웠고 같은 제목의 노래도 배웠던 날. '머지않아 산과 들에 복사꽃이 필 때엔, 엄마하고 나하고 꽃놀이 가죠. 푸른 밤과 흰구름 두둥실 떠올라...' 아직도 생각나는 노랫말. 아빠와 같이 뒷 산에서 재롱이를 묻으며 나는 젖은 목소리로 '머지않아' 노래를 불렀다. "아빠. 재롱이 몸은 여기 이렇게 있는데 왜 우리 재롱이가 안 짖어요?" 아빠는 한쪽 눈에서만 눈물 한 줄을 흘리더니 아무런 말도 없이 삽으로 땅만 팠다.
화장 중 대기실에 누워있던 아줌마는 벌떡 일어나 둘레둘레 고개를 돌리며 퉁퉁 부어 떠지지도 않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현자 아부지요!" 나오지도 않는 쇳소리로 불렀다가 이내 다시 정신이 들어 바닥을 또 기며 쎄쎄 소리로 오열했다. 벽을 보며 서 있던 아빠는 재롱이가 죽었을 때처럼 아무 말도 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아빠의 어깨가 들썩였고 이번에는 양 쪽 눈에서 두 줄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턱 끝에서 빠르게 뚝뚝 떨어지는 아빠의 눈물은 마치 아줌마 집 지붕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물 같았다. 내가 가장 사랑했던 공간과 시간들이 떠올랐고, 이 모든 상황이 전혀 현실 같지가 않았다.
ㅣ 오토바이만큼은 절대로 안됩니데이!
장례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아줌마는 전기 장판을 불이 날 정도로 뜨겁게 달궈서 그 위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엄마는 아줌마를 안고 같이 누웠다. "아지매. 이래 뜨거워가 이라면 화상 입는다. 보일러 더 킬게." 아줌마는 엄마가 무슨 말만 하면 울었다. 목소리가 전혀 나오지 않는 날은 몸으로 울었고, 점점 목소리가 나오면 목청으로 울었다. 다시 목소리를 잃으면 바닥을 기어 다니며 울었고, 다시 목소리가 나오면 가슴을 치며 울었다.
두어 달이면 아줌마도 어느 정도 진정이 될 줄 알았다. 아줌마는 49제가 지나도, 두 달이 지나고 석 달이 지나도 슬픔이 전혀 흐려지지 않았다. 영원할 것 같은 슬픔의 구렁텅이 속에서 여전히 사력을 다해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우리 집에도 오지 않고 우리 집까지 다 들리게 꺼이꺼이 밤새 울부짖었다. 아줌마가 울면 온 동네 개들도 다 같이 울부짖었다. 동네 사람 그 어느 누구도 야밤에 무섭게 우는 아줌마의 목소리를 탓하지 않았다. 언니의 조용한 피아노 소리에도 그렇게 난리를 쳤던 윗집 할머니마저도 숨을 죽였다.
"아재,올해는 무조건 운전하지 마이소! 오토바이는 더 안됩니데이!"
바보 같은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토바이. 오토바이만 사지 않았더라도...
우리 아빠가 효성 스즈키에 아는 사람만 없었더라도...
스님이 저 말을 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아저씨는 노을 속으로 영영 사라져 버렸다.
엄마는 일하는 중간에도 아줌마 집에 갔다.
"아지매. 이거 묵자! 응?
아지매, 생각 나나? 내 고등학교 때 말이다.
우리 무용 선생이 맨날 내만 보면, '어이! 빨간 치마!'하고 불렀다 아이가. 내가 교복 살 돈이 없어서 누가 전봇대 밑에 버려놓은 거, 그거 주워가 깨끗이 빨아 입고 댕겼는데 그게 너무 낡아 물이 다 빠져 빨개지뿟다 아이가. 그거를 친구들 다 보는 앞에서 꼭 내를 '빨간 치마'라고 불렀던 거 기억 나제? 그 때...... 엉엉...... 언니야...... 언니 니가 그때 시장에서 그 무용 선생이랑 마주쳤던 날, 한 번만 더 우리 숙희한테 빨간 치마라고 불렀다가는 내 손에 죽을 줄 알라고 언니 니가......
언니 니 아니었으면 내 벌씨로 죽었다! 우리 아부지가 만날 천날 술 쳐묵고, 나는 아홉 살 때부터 밥하고 빨래하고...... 밤 열 시가 넘어서 새벽까지 공부하고...... 언니 니가 내 이대 합격했을 때 내보다 더 좋아하면서 등록금에 보태라고 학비도 내줬다 아이가. 내가 우리 오빠 학비 땜에결국은 이대를 중퇴하던 날, 언니 니 아니었으면 내가 고마 확 벌써 죽었다.
언니야. 내랑 살자. 응? 이제 우리랑 살자! 뭐, 언제는 같이 안 살았나? 이거 얼른 묵자...... 언니야...... 우리 살자...... 우리 다시 살자......"
엄마는 아줌마를 끌어안고 서글프게 울었다.
밝고 호탕했던 현자 언니는 호호 아줌마처럼 늘상 웃는 눈에 볼이반지르했다. 언니의 얼굴은 바싹 마른 면이불처럼 윤기가 없었고 반달눈도 사라져 퉁퉁 부어 붉고 가느다란 눈만 있었다. 언제나 열려 있던 훈이 오빠의 방문은 매일 잠겨 있었고 그 후로는 미국 과자도 먹지 못했다.
ㅣ 내 이 집에서 몬 살겠다
아줌마는 우리 집 에어컨이며 냉장고를 최고급으로 바꿔주었다. 6학년이 된 내가 수학여행을 간다니까 옷 사 입으라며 30만 원이나 줬다. 아줌마는 아저씨가 똑똑하게 보험을 잘 들어놨다며 이 돈 갖고 얼마나 살겠냐며 아저씨 따라 빨리 콱 죽어버릴 거라며 돈을 물쓰듯 썼다. 엄마는 아줌마가 주는 돈도 따로 챙겨뒀고, 아줌마가 바꿔주는 살림들도 환불을 받아 같이 모아두었다.
아줌마는 아저씨와 함께 지은 고풍스럽고 멋있는 이 한옥집에 더 이상 못 있겠다고 했다. 30년 가까이 아저씨와 함께 살았던 집터였다. 아줌마는 집을 팔고 옆 도시 아파트를 샀다. 연고가 전혀 없던 신도시였다. 아줌마 집 세간 살림이 이사를 나가던 날, 엄마는 며칠 전부터 매일 흐느꼈다. 엄마는 살점이 뜯겨 나가고 뼈가 바스러지는 것 같이 아프다고 했다. 아줌마는 끝끝내 떠났다. 엄마는 아줌마가 뿌린 돈뭉치를 현자 언니에게 몰래 돌려주었다.
아줌마 집이 텅 비었다. 나는 아줌마 집 시멘트 창고의 계단을 올라 옥상으로 갔다. 꽉 차 있던 장독대도 텅 비어 있었다. 나는 습관처럼 난간에 앉았다가 뒤로 자빠질 뻔했다. 그땐 장독대가 등받이 역할을 하고 있었다. 넘어지려던 순간부터 심장이 재빨리 뛰기 시작했다. 갑자기 재빠른 누렁이가 보고 싶어졌다. 해는 여전히 지고 있었고 노을은 여전히 내 방 창문을 뚫고 들어가 내 침대 이불을 물들이고 있었다.
아줌마가 양쪽 집을 오가기 편하게 우리 집 담장을 뚫어 새로 만들었던 철 대문도 여전히 빛을 내며 마른 햇살을 튕겨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 대문 색깔도 아줌마가 고른 색이었다. "나는 파란색이 그렇게 좋드라. 옛날에 내 젊었을 적에 그 수출무역단지 옆에 공장에서 일할 때 말이다. 바로 지척이 바다인데 을매나 가고 싶든지. 숙희야! 요요 대문은 내 꺼다 아이가? 요 대문을 내만 드나들지 누가 드나들겠노? 내 맘대로 한다이!"
아줌마가 골랐던 촌스러운 파란색 우리 집 대문, 아니 아줌마 전용 대문, 아니 사실은 내 전용 대문을 보니 가슴이 구멍이 난 것처럼 시렸다. 누가 내 마음을 삽으로 퍼내고 있는 것 같았다.
엄마에게 혼날 때마다 아줌마 생각이 났다.
"야야! 니는 맨날 지은이만 그래 잡노, 잡기를! 고마해라!" 아줌마 목소리가 귀 안에 들어있어서 버튼만 누르면 쏟아졌다. 우는 내 눈물을 닦아주며 뽀얗게 화장을 해줬던 현자 언니도 보고 싶었다. 사무실에서 퇴근할 때 리어카 아저씨에게 수박 삔, 리본 삔을 사서 내 머리를 땋아줬던 현자 언니, 신발도 안 벗고 기어서 냉장고 문을 여는 내 코 앞으로 센스도 없이 흔들지도 않은 식혜를 따라 주던 훈이 오빠도 그리웠다. 이제는 용돈을 척척 주는 사람도, 미국 과자를 매일 주던 사람도, 예쁜 머리띠를 사주던 사람도 없었다.
누렁아. 나만 끝까지 흰둥이라고 불러서 미안해. 흰둥이라고 불러도 저를 부르는 줄 어찌 알고 쫄래쫄래 와줘서 고마웠어. 아니다. 너는 뭐라고 불러도 다 달려와서 내가 바부, 멍충이라고도 불렀었구나. 너 다음 생은 사람으로 태어난다 그랬지? 아저씨가 그랬잖아. 그럼 너, 기왕이면 우리 강병진 아저씨로 태어나 주라. 그래서 다시 우리 양복순 아줌마 남편이 되어 주라. 잘 가 누렁아.
ㅣ 끝내 닫혀버린 파란 철 대문
아줌마 집에 다른 사람들이이사를 들어왔다.
그후로, 늘 열려 있던 우리들의 파란 철 대문은 다시는 열리지 않았다.가로로 잠긴 손잡이를 열어봤다. 페인트가 햇빛에 녹아 손잡이와 걸쇠가 서로 맞붙어 꼼짝을 하지 않았다. 이 문은 조금만 오른쪽으로 손잡이를 밀어도 스스륵 열렸던 문이었다. 내가 아줌마 집 옥상으로 가는 날도 사라졌다. 갑자기 모든 것이 너무나 달라져 버렸다.
나는 내 초등학교 졸업식이 잔치가 될 줄 알았다.
아줌마, 아저씨, 현자 언니 당연히 올 테고, 훈이 오빠는 사진 찍어주러 올 테고, 우리 외할머니, 외삼촌 부부 당연히 올 테고, 다 같이 중국집에 가서 왁자지껄 짜장면을 먹으며 아저씨의 거나한 노랫소리를 듣게 될 줄 알았다. 아저씨는 노래를 정말 못 했다. 그런데 자기는 잘하는 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피식 웃음이 났다.
내 졸업식은 엄마와 아빠, 동생만 왔다.
외할머니는 큰 외삼촌 아들의 졸업식으로 갔고, 언니는 학교 가는 날이었다. 갑자기 눈물이 났다. 매일 짜증이 났던 왁자지껄했던 아줌마 부부만 이사 가면 숨통이 트일 것 같았었다. 이제 중학교에 가면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데 가장 큰 나의 적은 아줌마, 아저씨 부부라고 생각했었다.
내 초등학교의 마지막 방학이 끝났다.
내가 태어난 이래로 처음으로 아줌마 식구들이 없었다.
온 동네가 적막해졌다.
그렇게 내 초등학교 시절도 끝이 났고, 우리 모두의 한 시대도 문을 닫았다. 우리 집 담장에 굳게 닫힌 아줌마의 파란 철 대문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