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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말 한마디
03화
마음을 지켜주는 건 '진심'이 아니다
by
Mia Kim
Sep 4.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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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우리 반에 머리 커튼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녔던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학생 개별 상담 때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 아이의 목소리도, 미소도 알 수가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됐다. 아빠로부터 오랫동안 학대를 당해 왔다는 것과 오랜 기간 친구들로부터 배제된 생활을 해왔다는 것을.
나는 그 아이를 1학기 동안 하교 때 종종 따라다녔다.
학원 앞에서 버스를 내리는 그 애를 붙잡고 길가 어묵집에서 김밥, 어묵을 같이 먹었다.
그리고 학원 문 앞까지 데려다줬다.
1학기가 끝나던 여름방학식 날, 그 애가 교무실로 찾아왔다.
그때 그 아이의 목소리를 처음으로 제대로 들은 것 같다.
“방학이니까 이제 선생님 쉬세요.”
나는 그 말을 듣고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했다.
“나 야행성인 거 알지? 샘은 밤에 깨어있으니까 어디 혼잣말이라도 하고 싶으면 새벽이라도 나한테 톡 보내. 그리고 아침엔 가끔 나 좀 깨워주라.”
서로 마주 보는데 '푸훗'하고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왜 우리 둘 다 눈가엔 눈물이 맺혔을까.
만화를 기가 막히게 잘 그리는 아이와 짝으로 앉혔다.
이야깃거리가 많으니 그 아이의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만화는 거의 매일 이슈가 됐고 반 아이들 전체가 점점 그 자리로 몰려들었다.
가끔 내가 아이스크림을 사줄 땐
늘 그 둘을 불러서 나눠주게 했다.
어쩌다 그 아이의 책상에 먹을 게 있으면,
“나 한 입만.”
하면 감추는 시늉도 했다.
“우리 분필 없어 얘들아!”
하면
그 아이가 말없이 일어나 가지고 오기도 했다.
체육대회 때도 슬쩍 보면 우리 반은 각개전투가 없었다.
내가 일부러 철퍼덕 그 아이의 옆에 앉아서 실없는 소리를 해대면 다른 아이들은
"샘! 썰렁해요!", "아, 진짜 꼰대 마인드!"
하며
장난스럽게 나를 면박 주며 다가왔다.
지금도 정말 미안한 게 사실 난
그 아이의 인지능력이 다소 느린 줄 알았다. 글씨도 이상하게 알아볼 수 없게 써서 더 그랬던 것 같다. 그러다 백일장에서 그 아이의 시를 보곤 입을 틀어막았다. 정말이지 놀랍도록 잘 쓴 아름다운 시.
왜 지금껏 한 번도 상을 받지 못했을까 생각을 해봤다.
혹시 담임들이 그 아이에게 선입견을 가지고 아예 예선에서부터 제외를 시켰던 게 아니었을까. 그게 아니라면 알아볼 수 없었던 독특한 그 아이의 글씨 때문에 주목받지 못했던 건 아닐까.
나는
그 아이의 시를 그대로 타이핑 해
출력한 다음 원본과 함께 제출했고 그 아이는 무려 ‘장원’을 받았다.
엄마의 학창 시절과 벚꽃 봄에 대한 시였다.
교사가 되고 가장 기쁘고 벅찼던 순간이었다.
삶 곳곳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작은 아름다움과 따스함이 도처에 있었다. 지금 그 아이는 대학생이 되었고 카톡 프로필 사진을 보니 몰라 보게 미소가 밝아서 안도했다.
다음 학년 반 배치 기간에 부장교사를 찾아갔다.
담임들 중에 내가 가장 신뢰하는 선생님이 계셨고, 그 아이와 만화 덕후 아이를 꼭 그 선생님 학급으로 배정해 달라는 것과 서로 꼭 짝을 맺어 달라는 것 두 가지를 부탁했다.
마음을 지켜주는 건
‘진심’보단 ‘지속성’의 힘이 훨씬 더 크다.
‘안정성’ 속에 다음 걸음이 있다.
그리고
나는 앞으로의 나의 걸음에 대해 또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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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마음
선생님
Brunch Book
따뜻한 말 한마디
01
아홉 살 예준이의 사과 주먹
02
[ 서로를 지켜낸 골목길 ]
03
마음을 지켜주는 건 '진심'이 아니다
04
죽음을 기다리는 나이
05
고깃집 아주머니와 카페 아르바이트생 사이
따뜻한 말 한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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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구두 디자이너였고 현재는 고등학교 교사로 근무 중인 미아입니다. 삶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글로 시간을 정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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