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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Feb 23. 2024

왜곡된 기억이 펴지는 순간

Attila Marcel, 2013 /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폴은 어릴 때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두 이모와 함께 산다. 아가때의 충격적인 사건 때문인지 성인이지만 말을 못 하고, 피아노를 칠 때를 제외하면 수줍은 아이 같다. 날마다 같은 악몽에 시달리고 이모들의 댄스학원에서 공허한 눈빛으로 피아노 반주를 하면서 늘 정해진 루틴대로 살아간다. 그의 유일한 위안은 피아노를 칠 때 먹는 슈게트.


어느 날 장님 피아노 조율사 '코엘료'가 흘린 레코드를 주려고 따라갔다가 같은 건물에 사는 '마담 프루스트'의 집을 알게 된다. 그녀의 집은 밖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실내를 개조해서 온갖 식물들이 자라는 비밀정원이다. 취향이 동물성보다는 식물성인 나는 이미 이 한 장면만으로도 영화가 말하려고 하는 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마담 프루스트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비밀스럽게 그녀의 정원을 찾아온 사람들은 각자 가져온 추억 속의 음악을 틀어놓고 그녀가 만든 허브티와 마들렌을 먹으면 몽환적 상태가 되어서 과거의 기억 속으로 들어간다. 그들은 그 안에서 행복하게 머물기도 하고, 그녀의 도움으로 고통과 슬픔의 기억을 치유하기도 한다.


하지만 폴은 알고 온 것이 아니라 어쩌다 오게 된 것이라서 혹시라도 아파트 실내에 정원을 만든 것을 발설할까 걱정이 된 마담 프루스트는 그에게 아스파라거스 티를 먹인다. 아스파라거스는 그날의 기억을 모두 지운 후 오줌으로 나오게 한다고 그녀는 말한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폴은 다음날 아침 화장실에서 역한 냄새에 놀란다. 실제로 아스파라거스를 많이 먹으면 오줌에서 특유의 냄새가 난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는 내겐, 아스파라거스는 감탄할만한 소품이었다. 그러나 그 후로 폴의 아픔을 안 마담 프루스트는 폴을 초대하고 과거의 기억 속에서 왜곡된 부분들의 진실을 알게 해 준다.


그중 하나가 프로레슬러였던 아빠가 엄마를 폭행하는 나쁜 남자였다고 기억해서 사진 속 아빠의 얼굴을 모두 도려낼 만큼 미워했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가 기억하는 부모님이 몸싸움을 하는 장면은 서로 사랑을 나누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어린아이의 눈에는 싸움과 육체적 사랑을 분별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 아주 오래전에, 프렌치 키스라고 하기엔 좀 수위가 낮지만 꽤 오래 입술이 맞닿아 있는 어느 커플의 키스장면을 보고 '왜 서로 먹으려고 하냐'고 걱정스럽게 묻던 어린 생명체가 우리 집에도 있었기 때문에^^ 영화를 보면서도 아, 그렇게 비칠 수도 있겠구나.. 했다. 폴이 이 부분에 대한 오해를 푸는 장면은, 링 안에서 웃통을 벗은 아빠와 매력적인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엄마가 탱고를 추듯 경기하는 모습으로 나온다. 엄마가 이기고 아빠는 그런 엄마를 껴안고 즐거워한다. 복합적으로 뒤섞인 기억의 왜곡을 풀어주는 상징으로 꽤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폴은 마침내 행복해진다. 마치 이제 막 미소짓는 법을 배운 사람처럼 그의 미소가 너무 어색해서 그가 정말 행복하다는 걸 알았다. 부모님에 대한 기억은 사랑으로 바뀌었지만 믿고 고마워했던 이모들은 충격적인 고통이 되었고, 피아노도 포기했지만, 그는 왜곡된 기억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자기 식으로 극복하고 현재의 삶에 놓여있던 소중한 것들을 찾아내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마담 프루스트의 마지막 부탁처럼.



이 영화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워낙 오랫동안 쓰인 방대한 양의 책이라 내용은 아니고 일부에서 얻은 모티브로 시작되었다. 영화속애 프로스트의 글이 인용되기도 했다.  


기억은 일종의 약국이나 실험실과 유사하다.

아무렇게나 내민 손에 어떤 때는 진정제가 때론 독약이 잡히기도 한다.


영화에서 중요한 부분인 '기억'을 불러오기 위해 쓰인 매개체는 허브티와 마들렌이다. 허브티를 마시고 그 쓴맛을 중화하기 위해 달콤한 마들렌을 한 입 먹으면 이내 아득하고 먼 어느 기억 속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특정한 향기에서 의도치 않게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 나는 것을 '프루스트의 효과'라고 한다. 향기는 지극히 주관적이다. 같은 냄새나 향을 맡아도 사람들의 반응은 각자 다를 수 있다. 그 사람이 갖고 있는 기억에 따라서 느낌이나 해석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기분 좋은 상황일 때 어떤 향기를 바로 맡아두면 나중에 그 향기만 맡아도 기분이 좋아질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내가 남과 다르게 분별하는 어떤 향이 있다면 그건 내 기억과 연관된 향기일 것이다.


영화는, 무엇이든 강요하거나 따져서 분별하려 하지 않는다. 그냥 흘러간다. 그래서 이기적이고 경박한 이모들과 지인들이 나올 때조차도 영화는 여전히 같은 원형 속에 머문다. 아침 산책길에서 언뜻 본 듯한 풍경, 이웃 어딘가에서 조용하게 살고 있을 것 같은 마담 프루스트, 내 안에도 잠재되어 있는 유년의 아픈 기억이 폴의 그것처럼 오해였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고, 그것만으로도 잠시 맛보게 되는 평안한 한숨, 죽음 앞에서도 담담하고 여전히 아름다운 인연, 변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들을 변화시켰을 때의 홀가분함, 내가 싫었던 순간의 행위를 타인에게 반복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한결 보드라워지는 관계, 그리고 마침내 시작되는 오래 잊고 있었던 행복의 순간들.


이런 것들이 아름다운 색채와 다양한 음악 속에서 유영하는 영화다.



사소한 끌림 _ 아스파라거스 베이컨 말이 & 마들렌



아스파라거스를 좋아합니다. 지금도 냉장고에 있어요.ㅎ 대개는 소금, 후추, 올리브오일, 허브파우더를 뿌려서 오븐에 굽거나 팬에 볶지만, 손님이 오거나 갑자기 손이 좀 많이 가는 음식으로 먹고 싶어 지면 이렇게 베이컨 말이를 해서 굽습니다. 아, 가래떡에 말아서 구워도 맛있어요.



그리고 마들렌. 자주 굽진 않습니다. 마들렌을 좋아하지만 칼로리에 비해 양이 허무해서..ㅎ 그리고 티보다는 커피와 먹는 걸 더 좋아하고요. 사실 저는 먹을 때 보다도 '마들렌'이라고 쓸 때의 글자 모양이나 발음의 뉘앙스를 더 좋습니다. 그래서 제게 마들렌은, 음식이라기보다는 사랑스러운 '은유'같습니다.



오븐에서 꺼내 둔 마들렌이 적당히 식었습니다.

찻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동안

햇살이 먼저 나른하게 앉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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