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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Mar 15. 2024

프리즘을 통과한 고양이

The Electrical Life of Louis Wain, 2022



비 오는 어둑한 거리, 검은 옷의 장례 행렬이 지나간다. 몰락해가는 한 귀족 집안의 아버지의 장례다. 드문드문 숨어서 이 광경을 보고 있는 겁에 질린듯한 길고양이들, 비에 젖은 모습이 안쓰럽다.


우연히 한국에서 제작된 포스터와 간단한 리뷰만 보고 밝고 아름답기만 한 영화인 줄 알았다.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그림에 대한 영화겠거니 하며 무료로 볼 수 있는 곳을 검색하다가 '아마존 프라임'에서 찾아냈을 때만 해도 즐거웠다. 하지만 시작부터 심상치가 않다. 아무래도 마음의 변방으로 유배시키고 될 수 있으면 모른척하는 어두운 회색의 감성들을 불러올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영화는 이제 시작인데 순간, '보지 말까.. '라는 생각도 했다.


루이스 웨인 : 사랑을 그린 고양이 화가


이 영화는 고양이를 그린 화가, 루이스 웨인Louis Wain(1860~1939)의 삶에 대한 이야기다. 고대 이집트에도 고양이를 애완동물로 키운 흔적은 남아있지만 당시 영국에서는, 고양이는 요물스럽거나 불길함을 상징하는 존재였고 누군가 집에서 고양이를 키운다고 하면 쥐를 잡기 위해서라고만 생각하던 시기였다. 루이스 웨인은 이런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고 영국에서 고양이가 애완동물로 사랑받을 수 있게 한 사람이기도 하다. 고양이 그림으로 많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고양이들까지 행복하게 만들었지만 정작 자신의 삶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부양해야 할 어머니와 다섯 명의 여동생들이 있었다. 당시 귀족 여자들은 절대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세가 기울어 사는 게 힘들어도 모든 경제적인 책임은 그가 혼자 져야 했다. 이것저것 시도는 많이 하지만 의욕만큼 능력은 따라주지 않는 루이스, 얼핏 산만해 보이는 그는 다행히 그림에는 천재적인 재능을 지녔다. 사람은 절대 안 그리고 시골 풍경이나 농업박람회의 동물 등을 주로 그렸던 그는 개의 초상화도 그리고 신문에 동물 삽화를 그리며 가족을 부양한다. 사실은 그의 능력을 인정하고 친구로서 그를 아끼는 윌리엄 경의 후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윌리엄 경의 도움으로 크리스마스 특집으로 150마리의 새끼 고양이를 모아서 그린 삽화로 유명해지기 시작해서 의인화된 고양이 그림을 비롯해서  '조지 헨리 톰슨'이란 가명을 쓰기도 하면서 100여권의 아동도서에 삽화를 그렸다. 하지만 사업적 수단도 없고 순진해서 이용당하기도 하고 저작권도 챙기지 못해서 늘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어느 날 어린 세 동생들의 입주 가정교사로 들어온 에밀리. 지금까지 이성에 대한 사랑을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그녀를 만나자마자 특별한 감정을 느낀다. 어릴 때부터 구순구개열(harelip) 때문에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았던 그는 성인이 되면서 수염을 길러 흉터를 가렸는데 에이미를 만난 후 어느 날, 수염을 깎는다. 전날 습관적인 행동때문에 하게 된 작은 실수에 대해 사과하러 가려고 면도 할 준비를 한다.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장면 중 하나다. 공감하는 사람이 없을 수도 있지만 내겐 그랬다. 그가 수염을 깎는 행위는, 타인에게 숨겼던 자신의 약하고 치명적인 부분까지도 다 보여주겠다는, 전심으로 다가가겠다는 마음을 나타내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사과하고 싶은 마음속에는 이미 사랑의 감정이 스며있는 것 같다. 뽀얀 아침 햇살이 가득한 실내,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진 포슬린 물병에서 부어지는 김이 나는 따뜻한 물과 거품면도 솔의 유연한 움직임, 수염을 깎고 거울을 보며 뭔가 다짐하듯 옅은 숨을 들이마시는 말간 아침의 한순간, 그 어떤 장면보다도 내겐 아름다웠다.


신분적 차이 때문에 많은 소문과 가족들의 반대도 있었지만 결국 두 사람은 결혼을 한다. 드디어 사랑과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6개월 후, 에밀리는 유방암 말기 진단을 받는다. 그날, 왕진 왔던 의사를 배웅하고 집안으로 들어오는 길에, 정원 한구석에서 비를 맞으며 울고 있는 아기 고양이를 만난다. 마치 벼락처럼 찾아온 이 불행속의 연약하지만 유일한 희망인양.


그들은 이 고양이에게 '피터'라는 이름을 준다. 루이스의 첫 고양이 그림의 주인공이다. 피터는 그들의 아픔을 희석시킨다. 아픈 에밀리를 위해 피터를 그린 그림 여러 장을 전시하듯 작업실에 펼쳐놓고 에밀리에게 보여준다. 그녀는 기뻐하며 말한다. 당신은 프리즘이라고, 빛을 굴절시켜 더 많은 아름다운 빛을 보여주는 프리즘처럼 고양이 그림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며 그들을 행복하게 해 주라고. 그러면 언젠가는 사람들이 고양이를 애완동물로 기르게 될 거라고.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이 그의 삶을 재촉한다. 마치 상실의 고통과 슬픔을 그림으로 극복하는 것이 그의 생의 원동력인것처럼. 아버지 대신 가족을 책임지기 위해서, 에밀리와의 약속을 위해서, 피터를 기억하기 위해서 그는 그림을 그린다. 하지만 벽난로 앞에서 에밀리와 피터와 함께 있던 때만큼 행복한 적은 없었다는 그의 말과 에밀리에 이어 피터가 죽었을 때의 그의 통곡을 기억하는 내겐, 아무리 사회적인 성공을 거두고 수많은 사람들의 찬사를 받았더라도 그는 결코 행복하지 않았을 것 같다. 혼자 남아 지키는 사랑과 약속의 외로움은 뼈에 사무쳤을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아팠다. 그가 무엇을 하든, 박수와 존경을 받는 순간마저도 내겐 자꾸 그의 슬픔만 보였다. 아마도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연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분장술이 훌륭하다는 건, 단지 기술적인 것뿐만이 아니라 분장한 배우가 그 역을 얼마나 잘 연기하느냐에 달려있다는 걸 깨달았다. 다른 영화에서도 늘 그랬지만 특히 이 영화에서그의 연기는 압권이다. 그가 곧 루이스 웨인이었다.



말년의 루이스는 15년 동안 정신 병동에서 지낸다.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가난해서 열악한 환경의 병원에서 지내다가 다행히 우연히 다시 만난 댄과 동생들의 모금활동 덕에 좀 더 좋은 병원으로 옮긴다. 병원에서도 고양이 그림은 계속 그리지만 그림에 많은 변화가 있다. 후대 사람들은 그의 변화된 그림이 싸이키델릭 아트 (psychedelic art) 같아서 그가 조현병에 걸렸을 거란 추측도 하고 한편에선 아스퍼거 증후군이라고도 한다. 병이든 아니든 내겐 그의 그림들이, 출구를 찾지 못하고 기억과 마음속에서 웅웅거렸을 수많은 슬픔과 외로움의 표현 같다. 안쓰럽고 슬프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력적이다.


그는 어느 순간 자신만이 느끼는 어떤 전류(electricity)를 삶과 예술의 가치로 여겼다. 에밀리가 죽기 전의 어느 가을날, 다 함께 산책을 나간다. 세상의 아름다운 가을은 죄다 불러다 모아 놓은 것 같은 퓽 갱 속에서 루이스와 에밀리, 그리고 피터가 나란히 앉아있는 뒷모습은 아름답고 평온하다.

여기가 우리의 장소야.

나는 어떤 전류를 느낄 수 있어.

당신이 내가 필요할 때, 나는 여기 있을 거야.

에밀리는 그에게, 당신이 그림을 그려서 세상과 연결되는 것은 당신의 일부를 내어주는 것이고 그러면 그림을 보는 사람들과도 연결되는 것이니 그게 바로 당신이 말하는 일렉트릭시티라고 말했고, 그녀의 말은 실현되었다. 그는 그림을 통해서 단지 고양이를 우리 곁에서 함께 살아가는 반려동물로 만든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세상도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바꿔놓았다. 타인은 물론 다른 생명체를 향한 관심과 사랑만이 소모적인 이기심을 덜어낼 수 있다. 문득, 내 마음속 ‘일렉트릭시티’는 무엇인지 짚어보게 된다.


루이스는 어릴 때부터 한 악몽에 시달렸다. 자신의 스케치북에 그 꿈에 대한 그림을 그려놓았는데 서로에 대해 잘 모를 때, 에밀리는 우연히 그 그림을 보고 루이스의 고통을 알게 되어 서로가 더욱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었었다. 에밀리는 죽기 전날 밤에 자신의 숄에서 잘라낸 조그만 조각천을 그림 갈피에 끼워 넣는다.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숄이자 루이스를 만난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그가 예쁘다고 말한 숄이다. 그 천 한 조각이 자신이 떠나도 분신처럼 남아 그를 위로하고 지켜주길 바랐을 것이다.


이제 백발이 된 루이스, 사랑하는 이를 품고 홀로 살아가는 것만큼 외로운 인생이 또 있을까? 자신의 스케치북을 넘기던 그는 에밀리가 남기고 간 천 조각을 발견한다. 순간 그는, 마치 누가 부르기라도 하는 듯 벌떡 일어나 벌판을 가로질러 숲으로 간다. 아마 그 장소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느꼈을 것이다. 감았던 눈을 뜨자 '우리들의 장소'라고 했던 그 풍경 속에 서있다. 그는 그렇게 고단한 이 세상을 떠나서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로만 채워진 다른 세상으로 가는 중이다. 좀 유치한 욕심 같지만, 마지막 장면에 그를 혼자 세워두지 말고 이전의 그 가을날의 풍경처럼 에밀리와 피터도 함께 있는 뒷모습으로 끝났으면 어땠을까 싶었다. 영화 '타이타닉'의 마지막 장면에서 받았던 위로처럼 말이다. 아마도 영화를 보는 내내 그의 고단함과 외로움에 너무 감정이입이 된 탓이리라. 하지만,


클로징 크레딧이 올라가면서 마치 위문공연처럼 이어지는 루이스 웨인의 고양이 그림으로 마음은 이내 아문다. 마치 변덕쟁이처럼 좀 전의 감정은 다 잊고, 아마 나는 내내 미소 지었을 것이다.  만든 사람들의 수고에 예의를 갖추는 의미로 늘 영화의 엔드 크레딧이 끝날 때까지 보는데 그 어떤 영화보다도 말랑말랑한 마침표였다.



주로 '루이스 웨인'의 내면을 따라가며 쓰다보니 글의 분위기가 좀 무거워졌다. 하지만 재밌고 사랑스런 장면도 많고, 예쁜 고양이들도 나오고, 아름다운 풍경들도 있다. 이 영화의 장르가 biographical comedy-drama 로 분류된 이유를 수긍하게 하는 즐거움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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