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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Mar 22. 2024

은유로 지은 세상

IL POSTINO, 1994 _  일 포스티노


재작년에 한국의 동해에서 세 달 정도를 지낸 적이 있다. 집에서 5분 정도만 걸어가면 송정 바다였다. 나는 날마다 이른 아침에 바다로 갔다. 마치 오래 묵은 시간의 갈피마다 넣어두었던 그리움과 회환을 모두 부려놓고 가고야 말겠다는 듯 바닷가 구석구석을 홀로 걸으며 파도의 말을 들었다. 그렇게 바다 곁을 걷다가 지치면 송림 안 벤치나 모래밭 위에 앉아서 쉬었다, 누군가에겐 늘 똑같은 사진으로 보일지도 모를 바다를 날마다 한 장이라도 찍었다. 내게 바다는, 볼 때마다 새롭고, 이번 파도와 다음 파도가 다르고, 햇살이 만져주면 응답하는 포말의 반짝임도 매번 다르기 때문이다. 가끔은 파도에 발을 담그고 서있거나 맨발로 해안선을 따라 걷기도 했다. 그럴 때는 사진보다는 짧은 동영상을 찍었다. 비록 지금 내가 듣고 느끼는 것들이 그대로 전달되진 않겠지만 그래도 들려주고 싶은 사람들이 생각 나서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매번 떠오르는 영화가 있었다.


파도와 바람소리를 녹음하던 마리오와 '시는 쓴 사람이 아니라 읽는 사람의 것이다'라는 대사가 맨 먼저 생각나는 영화, 일 포스티노(IL Postino). 이 영화는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소설인 네루다의 우편배달부(Ardiente paciencia by Antonio Skarmata)가 원작이다.





유명한 칠레의 민중 시인인 '파블로 네루다'가 본국에서 체포영장이 발부되자 이탈리아의 작은 섬, '칼라 디 소토'로 임시 망명을 오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그 섬에는 아버지와 함께 작은 고깃배를 타며 생계를 이어가지만 배만 타면 감기에 걸리고 멀미를 한다고 핑계 같은 하소연을 하는 마리오가 산다. 아버지는, 배를 타지 않으려면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며 마리오를 나무란다. 이때 마침 네루다가 섬으로 오면서 우편물도 엄청나게 늘어난 동네 우체국에선 네루다를 위한 전용 우편배달부가 필요했고, 글을 읽을 줄 알고 자전거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마리오는 채용된다. 마리오는 날마다 자전거에 우편물을 싣고 네루다를 찾아간다. 이렇게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세계적인 시인과 겨우 글을 읽는 정도인 우편배달부와의 만남이 시작된다.


영화를 볼 때 스포일러를 신경 쓰지 않을 만큼 스토리보다는 영상이나 대화의 표현에 더 마음을 빼앗기는 편인데 이런 개인적인 취향을 만족시켜 주는 영화기도 하다. 사실은 영화 뒷부분의 갑작스럽고, 충격적인, 그러면서도 너무 간단하게 처리된 사건 때문에 꽤 당황했지만 곧 마음은 잠잠해진다. 비 현실적인, 혹은 지나치게 현실적인 어떤 상황을 찰나처럼, 혹은 무심한 듯 표현하고도 변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 예술의 특권이자 아름다움일 테니까.


그래서 두 번째로 이 영화를 보는 나의 태도는, 좋아하는 표현이 들어있는 대사를 기다리고, 전혀 다르게 살아온 두 남자의 우정과 존경이 만들어내는 관계의 생김새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베아트리체의 고혹적인 미모에 찬사를 보내고, 관계나 믿음은 극적인 방법이 아니라 사소한 행위로 유지된다는 걸 배우고, 외로운 사람들이 의지하는 자연에 감탄하고. 가보지 못한 나라의 갈 수 없는 시간 속의 끌림에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이다.


영화는 -화면 속의 모든 형태와 색채, 배우들의 표정, 반도네온으로 연주되는 배경음악까지도- 멀리 떠났다 돌아온 파도처럼 아득하게 감성의 발목을 적신다. 그리고 이내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단어가 불쑥 나온다.


은유 metaphor.


네루다가 마리오에게 '은유'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구사하는 시적인 문장들보다 나를 설레게 했던 건, 설명을 들은 후에 마리오가 한 말이다.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것은 은유를 위해서 존재하는군요.


마리오는 타고난 시인이었다. 세상 모든 것을 은유로 표현할 수 있다, 가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은유를 위해 존재한다니! 이 대사 한 줄만으로도 '일 포스티노'는 가장 시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영화가 된다. 네루다가 친구들에게 안부를 전하기 위해 녹음을 하면서 마리오에게 이 섬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라고 하자 쑥스러워 머뭇거리던 마리오는, '베아트리체 루소'라고 대답한다. 마리오가 짝사랑하는 여자다. 내게는 과즙이 터지는 듯한 웃음을 준 대답인데, 나중에 이 대답은 조금 힘을 잃는다. 뭐... 사랑의 속성이 원래 그런 거니까.


칠레에서의 구속영장이 기각되어서 다시 조국으로 돌아가는 네루다, 네루다가 떠난 후 그를 그리워하며 소식을 기다리던 마리오는 네루다가 쓰던 물건을 보내달라는 비서의 편지를 받고(마리오가 생애 처음 받는 편지였는데 비서가 보낸, 게다가 목록을 첨부한 물건을 보내달라는 내용뿐이었다. 흔한 안부도 한 마디 없이... 너무해.) 세상을 다 잃은 표정으로 그의 집을 정리하다가 녹음기를 발견하고 예전에 네루다와 함께 녹음했던 대화를 들으며 너무나 행복하게 웃는다. 그리고는 우체국장의 도움으로 야외에서도 사용할 수 있게 개조한 이 녹음기를 싣고 바닷가로 가서 녹음을 한다. 전에 물어봤을 때는 당황해서 제대로 대답을 못했지만 이젠 이 섬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녹음해서 들려주겠다면서...(마리오 양반, '베아트리체 루소'는 탁월한 대답이었다오.)


그가 녹음한 것은,


칼라 디 소토의 잔잔한 파도소리

큰 파도 소리

절벽의 바람

덤불에 이는 바람

아버지의 서글픈 그물 ('서글픈'은 언젠가 그물에 관한 적절한 표현을 묻는 네루다에게 마리오가 한 대답이다.)

교회 종소리와 신부님

별이 반짝이는 섬의 하늘

파블리토의 심장소리(마리오의 아들이 베아트리체의 뱃속에 있을 때.)


그러면서 마리오는 말한다.

떠나실 때 좋은 건 다 가지고 가신 줄 알았는데 절 위해 남겨 놓으신 게 많다는 걸 알았어요.


누가 이 영화가 어떤 영화인지 간단하게 말해보라고 한다면, 지금 내 마음속에서 웅웅 거리는 그 많은 아름다움과 슬픔을 덮고서 나는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이 영화는, 우리가 관계에서 받는 상실감이나 상처에 대해 좀 더 유순해져야 한다는 걸 깨닫게 한다. 함께 있을 때 행복했다면 헤어져서 다시는 못 만나게 되더라도 변하는 건 없다. 함께 했던 그 시간은 영원히 남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주,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해서 지나간 사랑이나 관심, 고마움에 대해 슬퍼하거나 원망한다. 마치 그 추억에게 버림받은 것처럼. 이렇게 생각하는 한, 추억을 버린 건 바로 우리 자신이다.


그리고,

'일 포스티노'에 대해 말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영화 밖의 이야기가 있다. 영화가 끝나고 크로징 크레딧이올라가기 전 한 줄의 글과 함께 화면이 잠깐 멈춘다.


Al nostro amico Massimo 우리의 친구 마시모에게.


마시모 트로이시, '마리오'역을 맡았던 배우의 이름이다. 그는 원작소설을 각색해서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썼고, 우편배달부 역과 연출을 함께 하려고 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감독은 '마이클 레드포드'에게 부탁했다. 그에게는 심장 판막이 안 좋은 오랜 지병이 있었다. 영화 촬영 내내 의료진이 항상 대기하고 있었다고 한다. 영화가 시작할 때부터, 눈빛은 형형하지만 무척 피곤하고 수척한 모습이라 배역을 참 잘 골랐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야 그가 병중이었다는 걸 알았다. 그는 끝까지 영화를 촬영하려고 노력했지만 나중에는 뒷모습이나 먼 앵글은 대역을 쓰기도 했다고 한다. 정확하게 어느 장면이라는 정보는 없었지만 영화를 되짚어보니 알 것 같았다. 베아트리체를 찾아 바닷가로 가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던 그의 뒷모습. 짧은 순간이었지만 무딘 당당함이 마리오 같지 않고 낯설었다. 아닐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미, 뒷모습은 거짓말을 못한다는 말까지 떠올렸다.


그는, '일 포스티노'의 촬영이 끝난 지 12시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얼마나 혼신의 힘을 쏟아 버티며 영화를 촬영했는지 알 수 있다. 떠들썩한 아카데미 시상식엔 참석하지 못했지만 그래서 더욱 마리오는 '마시모 트로이시'로 남고, 영화는 마시모 트로이시의 '일 포스티노'로 기억된다.





*예전에 썼던 글인데 카테고리 정리하면서 일부 수정, 보완해서 다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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