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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Apr 10. 2024

구포역

요즘 김해 _ 지금 여행, 2022


기차가 구포역에서 멈췄다.


몇 번이고 미리 확인한 도착지인데도 낯선 지명은 설렘과 불안을 구분할 수 없게 했다. 하지만 이곳이 종착역이 아니란 걸 깨닫자 마음이 바빠진다. 서둘러 짐칸에 넣어둔 가방을 꺼내러 갔는데 가방이 뒤로 밀려있고 삐딱하게 놓여있던 다른 사람의 가방에 바퀴가 걸렸는지 아무리 당겨도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기차가 금세라도 다시 출발할 것 같아 초조했다. 짐칸으로 상체를 거의 다 집어넣다시피 하면서 간신히 가방을 꺼내 기차에서 내리고서야 손목의 통증을 느꼈다.


나 혼자 내린 것도 아니고 꽤 많은 사람들이 벌써 앞서서 걷고 있는데도 혼자하는 여행의 치명적인 단점이라고 할 수 있는 선천적 '방향치'인자가 벌써 불안해하고 있다. 마치 어미 오리를 따라가는 새끼 오리처럼 사람들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오니 바로 택시 승강장이 보였다. 주변에 여러 사람들이 서 있었는데 기사로 보이는 분께 김해까지 가냐고 물었더니 갑자기 멀리 있는 한 남자를 큰 소리로 불렀다. 김해 갈 손님 왔는데 뭐 하냐고 야단(?)을 치는 말투였지만 어쩐지 다정하기도 했다. 아마 택시가 나가는 순번이 있거나 기사마다 선호하는 방향이 따로 있는 모양이다. 금세 뛰어온 그는 마치 게으름 피우다 들켜서 무안한 사람처럼 덥석 내 가방부터 끌고 가더니 자신의 택시에 실었다.


한국에 와서 개통한 전화에는 데이터가 없었기 때문에 내가 가겠다고 말한 곳의 방향이나 소요 시간등을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인터넷으로 미리 찾아봤던 것들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알아서 가 주시겠지... 일단 마음을 놓고 혹시라도 조언을 들을 수 있을까 싶어서 기사분께 김해에 온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향토음식을 추천해 달라고 했더니 '뒷고기'를 말씀하셨다. 처음 듣는 음식이었다. 정육 할 때 나오는 자투리 고기를 칭하는 말이라고 한다. 김해에 와서 처음 추천을 받은 음식이니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어쩐지 혼자 가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따라왔다. '뒷고기'라는 이름만으로도 상상이 되는 광경은 최소한 두 사람 이상이 모여 앉아서 고기를 굽고 소주잔을 기울이며 허물없이 큰 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뭐 그런 것이었기 때문이다. 문득, 깨달았다. 아, 앞으로 먹는 걸로 고생할지도 모르겠구나.


집에서 혼자 밥을 먹는 게 일상이라서 혼밥이 싫다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한때는 식구들의 삼시세끼와 도시락에 목숨을 건 사람처럼 살았던 적이 있어서 혼자 먹는 이 단촐함이 너무 좋다. 그래서 아이패드를 틀어놓고 혼자 여유 있게 먹는 식사시간을 즐기는 편이다. 이러니 저러니 말이 많은 식습관이지만 아이패드는 가장 재밌고 편한 내 밥친구다. 그런데 그건 집이니까 편했다는 것을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깨달은 것이다.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은 적이 거의 없었다. 몇 년 전에 한국에 왔을 때도 혼자 지낸 적이 있지만 그때도 간단한 음식을 사다가 숙소에서 해결했었다. 간편하지만 맛있는 음식들이 널려있다는 것도 한국 여행의 매력 중 하나다. 하지만 여행기에는 이름난 노포나 향토음식 몇 개쯤, 고명처럼 얹혀야 비로소 완성형이 되는 게 아닐까. 갑자기 앞으로의 한 달이 더 막막해졌다.



우연히 유튜브에서 지자체의 '한 달 살기' 프로젝트를 알게 되었다. 내가 본 것은 그중 하나인 '김해'였다. 재택근무가 가능한 사람이면 일과 병행(workcation)할 수도 있고, 기간도 5박 6일에서 한 달까지 마음대로 정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숙박비를 제공해 준다는 게 가장 끌렸다. 물론 그리 넉넉지 않으니 맘껏 숙소를 고를 순 없겠지만 지방이라 아주 불가능한 것도 아니니 될 수 있으면 추가 비용 없는 숙소를 구하는 것도 일종의 묘미로 느껴졌다. 게다가 여행 관련 포스팅을 해야 하니 그저 놀러 가서 구경하고 먹고 돌아오는 여행과는 차별화된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더구나 한 번도 여행지로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곳이라서 더 끌리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처음의 계획과는 달리 일찍 다시 밴쿠버로 돌아가기 전에 나를 위한 위로의 시간이 필요했다. 지난 몇 달 동안 마치 복병을 만난 듯 낯선 상처가 여러 개 생긴 후였다. 떠나기 전에 그 상처들을 아물게 하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갈등이나 오해 없이, 말을 아끼며 견디지 않아도 되는 시간을 내게 선물하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밴쿠버에서 기다리는 아이에게 이런 속내를 털어놓으며 여행의 필요성을 설득하지 않아도 되는 명분이 있어서 좋았다.


택시는 예약해 둔 호텔 앞에 도착했고 나는 인터넷에서 검색했던 금액보다 조금 더 많은 택시비를 지불했다. 될 수 있으면 시에서 지원해 주는 숙박비에 맞추려고 전년도에 같은 프로젝트에 참가했던 사람의 리뷰를 보고 고른 호텔이었다. 김해에 오기 전에 호텔 지배인과 미리 통화를 하며 장기투숙 할인을 받아서 지원금과 거의 일치하는 금액으로 예약을 했다. 사실 조금 불안하긴 했다. 한 달 동안 지낼 곳인 데다 내가 주거환경에 꽤 까탈스러운 사람인걸 인정하기 때문이다. 숙소는 '호텔'이라는 명칭이 조금 애매한 건물이었다. 하지만  로비는 아담하고 깔끔했으며 안내데스크에서 맞아준 분도 친절했다. 다만 건물 밖 주변 환경에 조금 신경이 쓰였다. 택시에서 내리기 전부터 연달아 보이는 호텔, 모텔, 술집들의 간판에 이미 낭패감이 들었던 터였다. 숙박업소 밀집지역에다 작은 술집들도 꽤 있는 것 같았다. 이런...

그래도 찬찬히 둘러보니 동네 한가운데가 아니었고 바로 옆 건물의 프랜차이즈 커피숍을 끝으로 큰 도로가 있었다. 밤에 나올 일은 없으니 크게 거슬리진 않으리라 생각하면서도 조금 더 알아볼 걸 그랬다는 아쉬움은 남았다. 중간에 옮기는 게 귀찮고 장기 투숙이면 할인도 해 줄 것 같아서 덜컥 한 달을 몽땅 예약한 게 실수가 아닐까 조금 후회했다. 숙소는 아직 체크인 시간이 안되어서 로비에 가방을 맡기고 김해 시청으로 갔다.



너무 일찍 도착해서 주변을 걸어다니다 후문 앞에 있는 작은 카페에서 자몽에이드를 마시며 약속시간을 기다리다 오후 2시 반에 담당자와 시청 건물 안에 있는 카페에서 미팅을 했다. 직원전용인 줄 알았는데 일반인도 사용 가능한 카페였다. 담당자에게 꼭 해야 하는 일들과 추천 사항 등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마치 종합 선물 세트 같은 가방도 받았다.



아직 코비드19 으로 인한 제약이 완전히 해제되기 직전이라 가방 속에는 마스크가 많았고, 손 세정제, 여행용 어댑터, 요긴하게 쓸 각종 여행 안내서, 휴대용 부채, 그리고 의외라 살짝 웃게 만들었던 컬러링북과 색연필 세트 (컬러링 북의 내용은 김해와 관련된 것들이다)등이 들어있었다. 나름 알차고 귀여운 선물이었다. 여행을 하는 동안 전화와 특정 장소의 와이파이 만으로 충분할 거란 생각에 신청하지 않았던 휴대용 와이파이는, 도착한 지 몇 시간 되지 않았는데도 아주 중요한 소지품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뒤늦게 신청을 했다. 이틀 후에 다시 와서 수령하기로 했다. 30분 정도의 미팅이 끝나고 시청을 나오면서 그야말로 현타가 왔다. 이제부터 끝나는 날까지 이 낯선 도시에서 나 혼자 알아서 여행을 하고 밥을 먹고 포스팅을 해야 한다. 지금까지 해보지 않았던 종류의 여행이라 긴장과 기대는 늘 함께 왔다. 그나저나 날씨가 너무 덥고 습하다. 너무 오랜만에 겪는 한국의 여름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강릉에서 지내는 동안 간신히 무더위는 다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계속 남쪽으로 내려오는 바람에 생애 가장 긴 여름을 보내는 중이었다. 이런 날씨에 여행을 한다는 건 생각조차도 해본 적이 없어서 이 땡볕에 혼자서 낯선 거리를 걷고 있다는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김해 시청 앞의 화단, 이런 형태의 화분은 처음 보았다. 유적지 발굴을 연상시켜서 도시의 이미지에 어울리는 발상 같다


시청에 미리 제출하기 위해서 여행 계획서는 대충 만들었지만 동선 파악이 전혀 안 된 상태라서 오늘은 계속 택시로 움직이기로 했다. 피곤하고 배도 고파서 일단 숙소로 들어가려고 시청 앞에서 택시를 탔는데 이내 마음을 바꾸어서 기사분께 혹시 근처에 박물관 같은 곳이 있으면 가자고 했다. 택시는 차도 사람도 거의 없지만 넓고 시원스레 잘 정비된 도로위에 나를 떨궈놓았다. 근처에 갈 곳이 많을 거라는 말씀을 남기고 택시는 멀어졌고, 바로 앞에 대성동고분박물관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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