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수술방 스토리

How was your day?

by 글쓰는 외과의사

전화 영어를 시작한 지는 6년째. Rona와 수업한 지는 이제 1년이 넘었다. 저녁 9시 40분, 지난 1년간 Rona의 수업 시작 인사는 동일하다.


Rona - "Hi, good evening, Can you hear my voice clearly?"

나 - "Yes, I can hear you well."

Rona - "Okay, good. How was your day?"


"How was your day?" 이 질문이 문제다. 여기에 대한 대답이 요즘처럼 단조로울 수 없다. 한 달 내내 나의 대답은 같다. "Same as usual. I stayed all day long in the operation room." 다른 대답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글을 쓰는 이 순간도 '오늘 하루가 어땠지?'를 떠올리면 수술방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3월 한 달은 말 그대로 수술방에서의 한 달이었다. 아침 8시 첫 수술을 시작으로 마지막 수술이 끝나면 저녁 6-7시이다. 늦게 끝나는 날엔 거의 하루에 12시간을 수술방에서 보내는 셈이다. 물론 수술과 수술 사이 20-30분간 빠르게 밥을 먹고 올 수 있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커피 한 잔도 가능하다. 하지만 교수님이 언제 들어오실지 모르는 마음에 마음 편하게 쉬고 올 수는 없다.


대략 하루에 세 개 정도의 수술을 한다. 하나의 수술 당 걸리는 시간은 3시간 정도. 한 교수님과 매일 수술하지는 않는다. 요일 별로 교수님이 다르고, 환자가 다르고, 수술 방법 또한 다르다. 덕분에 하루 종일 수술방에 있는 스케줄 상으로는 단조로울 수 있지만, 여러 해프닝들을 경험한다.



#1. 말씀이 없으신 A 교수님


- 월요일과 화요일은 A 교수님과 함께하는 날이다. A 교수님은 말씀이 없으시다. 어느 정도로 말씀이 없으시냐면, 한 달 동안 세 마디 이상 하시는 모습을 딱 한 번 뵀다. 이 사람은 과연 하루에 몇 마디를 하는지 궁금할 정도로 묵묵하시다. 수술 중에서도 정말 본인이 필요한 기구 단어 외에는 문장을 말씀하시지 않는다. '보비' '그래스퍼' '칼' 등 이런 단어조차 거의 말씀 안 하신다. 대부분 손짓으로 해결하신다. 덕분에 A 교수님과 함께하는 월, 화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적막한 수술방에서 자칫하면 졸음이 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점심이라도 먹고 들어가는 두 번째 수술은 비상이다. 개복 수술은 오히려 다행이지만, 모니터를 보고 하는 복강경 수술은 까딱하면 정신이 혼미해질 때도 있다. 수술이 끝나고 교수님이 나가시면 그제야 다들 숨을 쉰다.


사실 말이란 해서 문제가 되는 경우는 많아도, 안 해서 문제가 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말을 많이 하는 것보다 아끼는 게 훨씬 더 어려운 법이기도 하다. 3월이 끝나갈 무렵엔 묵묵히 본인의 환자 수술만 하시는 교수님이 존경스러웠다. '힘들다느니, 피곤하다느니' 앓는 소리만 하던 레지던트를 말없이 반성시키신 A 교수님. 새삼 감사한 마음이었다.



#2. 질문에 절대 답을 해주지 않는 B 교수님


- 수술은 사실 교수님과 독대하는 자리다. 두세 시간 동안 교수님과 맞은편에서 같은 일을 한다. 교수님과 떨어진 거리는 30cm.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건강한 거리는 1m라고 하지만, 가끔 교수님과 머리를 부딪힐 정도로 가까이 있기도 한다. 수술 시간 동안 교수님과 라포(rapport)가 생기면 이런저런 얘기를 한다. 보통 환자 얘기, 수술 얘기를 주로 한다. 교육의 장이기도 한 이 시간에 전공의는 가끔 용기가 생기면 질문도 한다.


하지만 'B' 교수님은 절대 속 시원한 대답을 해주시지 않는다. 예를 들면,


"교수님 A가 뭔가요?"

"a는 뭐겠어. b는 뭐인 거 같아. 알파벳에는 몇 개의 글자가 있니?"


A를 알려면 교수님과 스무고개를 해야 한다. 그렇다고 마지막에 알려주시느냐. 절대 안 알려주신다. 마지막은 항상 "교과서 보고 공부해 봐."로 끝난다. 덕분에 책을 많이 보긴 했지만, 아직도 미결로 남은 질문이 존재한다. 이제 와서 얘기하지만 "교수님 사실 물어보고 싶은 게 더 많았지만, 또 공부하라고 하실까 봐 삼킨 게 많았습니다!"



#3. 움직이면 안 되는 C 교수님


- C 교수님은 수술 시야를 상당히 중요시 여기신다. 수술방에서 "field를 잘 확보해야지."라는 말은 주변 구조물들을 잘 젖혀서 교수님이 수술하는 site를 잘 보여주는 것을 의미한다. field 가 망가지거나 흔들리는 경우에 C 교수님은 '대노' 하신다. 그래서 항상 C 교수님 수술방 인계는 '움직이지 말 것.'이다. 교수님이 잡아주신 수술 기구들을 들고 그 자리, 그대로 있어야 한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어허!" "움직이지 마!" 불호령이 떨어진다. 정말 숨만 쉬어도 움직임을 알아채신다. 한 자세로 오래 서있는 게 힘들어 발이라도 조금 움직이면 또한 번 불호령이 떨어진다. "어허!" 심지어는 몸의 무게중심을 이동시키다가도 혼난다. "어허!"


한 달간 "어허!"를 체감상 100번은 들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C 교수님과 어느 정도 친분이 생겨 마지막 수술엔 이런저런 얘기도 하셨다. 혼만 나던 C 교수님의 수술방에서, 마지막 수술엔 '고생했네 권 선생.' 한 마디해 주시고 나가는 게 왜 이렇게 기억에 남는지. 역시 사람은 100번 잘해주는 것보다, 99번 못해주다가 1번 잘해주는 게 더 인상적인가 보다.




"How was my day?"


내 하루가 어땠지를 돌아보았을 때, 3월 한 달은 결코 단조롭지 않았다. 피곤에 절어 있던 저녁 9시의 전화 영어시간이 아니었다면, Rona에게 해줄 수 있는 더 다채로운 얘기들이 있었다. 큰 사고 없어 다행이었던 한 달이었고, 수술방에서 한 단계 더 성장했음을 느낄 수 있는 한 달이었으며, 미숙한 레지던트를 묵묵히 기다려주시고 알려주신 교수님들께 감사한 한 달이었다.


"모두들 3월 한 달 고생 많으셨습니다. 꽃이 만개한 4월입니다. 활짝 핀 꽃처럼 4월의 시작도 활기차셨으면 좋겠습니다." 어젯밤 퇴근길 지하철 기관사님의 방송이었다. 얼마나 위로가 되던지. 평소처럼 이어폰을 꽂고 출퇴근을 했더라면 절대 느끼지 못했을 위로였다. 가끔은 이어폰이 없는 퇴근길도 괜찮을 것 같다. 다들 3월 한 달 고생하셨습니다!



keyword